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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요약

[나는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가] 삶의 의미와 행복을 찾아가는 인생 수업_장재형 _미디어숲_Summary요약

by 림을위하여 2023.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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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는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가

 

        부제: 삶의 의미와 행복을 찾아가는 인생 수업

        저자: 장재형

        출판: 미디어숲

 

그림#1 책 표지

오늘 소개시켜드릴 책은 삶의 의미와 행복을 찾아가는 인생 수업이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는 나는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가라는 책입니다.

 

 

 

그대의 행운의 별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누구에게나 그 별이 있다.

불행은 자신의 별을 알지 못하기에 찾아온다.

발다사르 그라시안

 

자유는 책임을 뜻한다.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유를 두려워하는 이유이다.

조지 버나드 쇼

 

너는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네 자신 속으로 은신할 수 있다.

인간에게 자신의 영혼보다 더 조용하고 한적한 은신처는 없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롤로그

영원히 살 것처럼 꿈꾸고,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아라

 

우리는 살아가면서 숱한 질문과 마주한다. 나 역시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에 부딪혔다.

 

•내 삶을 지탱하는 것 들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는 동안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무엇을 꿈꾸고 욕망해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왜 살아야 하는가?

•죽음이란 어떤 의미인가?

•어떻게 해야 행복할 수 있는가?

 

그 해답을 찾고자 고전 문학에 빠져들었다. 이 책은 삶의 여정에 따라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감수성, 사랑, 욕망, 삶과 죽음 그리고 깨달음이라는 큰 틀 안에서 고전 문학에 인문학적 해석을 덧붙였다. 이 책은 어떻게 하면 고전 문학에서 우리 삶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을지를 궁리한 사색의 결과물이다. 28편의 고전 문학 속 주인 공들이 걸어간 길을 따라 여행하는 것과 같다.

 

작가가 작품 속에서 설정한 세상이라는 무대에 선 그들의 삶은 한 편의 연극과 같다. 우리는 그 무대 위에서 다양한 역할을 맡은 주인공들을 관객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들은 인생에서 다음과 같은 문제를 마주했고,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았으며, 해결했는지 그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 싱클레어는 어떻게 내면의 정원을 만들고 가꾸었는가?

• 오즈의 마법사 주인공들은 어떻게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얻을 수 있었는가?

• 사르트르에게 책은 무엇인가?

• 찰스 스트릭랜드는 예술을 통해 궁극적으로 무엇을 얻었는가?

• 마리오는 메타포를 통해 삶에서 어떤 것들을 배웠는가?

• 베르테르가 흘렸던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

• 어린 왕자에게 장미꽃이 그토록 소중한 이유는 무엇인가?

• 제롬이 알리사가 죽은 후에도 오랜 시간 그녀를 잊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 폴은 로제를 정말 사랑했을까?

• 개츠비의 삶이 진짜 위대한 이유는 무엇일까?

• 산티아고는 어떻게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간절함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 앙드레 지드는 왜 자신의 이야기를 읽고 난 후 이 책을 던져버리라고 했는가?

• 조르바는 왜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말했는가?

• 파우스트는 왜 자신의 영혼을 걸고 새로운 삶을 꿈꾸었는가?

• 노인은 누구를 위해 또는 무엇을 위해 청새치와 며칠간의 사투를 벌였는가?

• 생텍쥐페리는 하늘을 비행하면서 대지 위에서 무엇을 발견했는가?

• 로캉은 어떻게 구토 현상을 극복했는가?

• 미하일을 하나님이 이 세상에 보낸 이유는 무엇인가?

• 그레고르 잠자는 한 마리의 벌레로 변신한 후 얼마나 고독했는가?

•빅터 프랭클에게 시련은 어떤 의미였는가?

•안네가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버틸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인가?

•존시에게 희망이란 무엇일까?

•이반 일리치는 자신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싯다르타가 궁극적으로 추구한 삶의 지혜는 무엇인가?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에게 기다림이란 어떤 것인가?

•잔느는 자신의 운을 어떻게 바라보았는가?

•골드문트에게 친구는 어떤 존재였는가?

•화자는 맹인과 함께 대성당을 그리면서 무엇을 보았는가?

 

이제 작품 속 주인공들을 대신해서 위의 28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해 보자. 그러다 보면 한 발 떨어져서 자 신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꿈꾸지만, 대부분은 자기다운 멋진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 지금까지 어떤 삶을 잘 아왔든 우리는 영원히 살 것처럼 꿈꾸고 내일 죽을 것처럼 지금 이 순간을 충실히 살아야 한다. 특히 이 책에는 고전 문학 속에서 28가지의 삶을 받쳐주는 것들어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나의 안과 밖에 향상 존재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나를 지행해주는 것들은 긍정적인 모습으로, 대로는 부정적인 모습으로도 다가온다.

수많은 시련과 절망으로부터 무너지지 않고 다시 일어설 때. 우리의 삶은 여기가 끝이 아니라 계속 진행된다.

 

장재형

 

 

우리 내면에 잠자고 있는 강한 리더십의 도로시. 용기 많은 사자.

지혜로운 허수아비,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 양철 나무군을 깨워 보자.

오즈의 마법사는 더 나은 삼을 위한 이 모든 것들.

리더십, 지혜, 용기, 사랑 등이 이미 나의 내면에 있음을 깨닫게 한다.

 

1장 나 자신에게 이르는길

 

자아

나만의 정원을 만들고 가꾸어라  

헤르만 헤세 「데미안,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길의 추구, 오솔길의 암시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 이 되어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어떤 사람은 모호하게 어떤 사람은 보다 투명하게, 누구나 그 나름대로 힘껏 노력한다.

 

헤르만 헤세는 그의 대표작 데미안, 서문에서 우리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라고 말한다. 모든 인간의 삶은 그 자체가 자신을 찾아가는 길이고, 그 길을 가려는 시도이며, 각자 최선을 다해 자신의 본모습을 찾으려는 노력 그 자체라는 것이다.

, 「데미안」은 인간이 자신의 삶 속에서 온전한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렇다면 자기의 온전한 모습.

다시 말해 본모습을 찾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돈, 건강, 가족, 사랑, 자유 그리고 삶 자체 마저도 잃어버릴 수 있다. 하지만 살면서 가장 힘겨운 상황에 부딪힐 때, 자신의 내면으로 뛰어들어야 강력한 내면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내 곁에서 내 삶을 안정적으로 받쳐주던 것들이 흔들릴 때, 비로소 우리는 더욱 성장한다.

 

한 해가 지나 다시 봄이 오고 여름이 돌아오면, 갖가지 화려한 꽃과 식물들이 피어나는 나만의 정원을 가꾸어 보자. 그 곳에서 슬픔의 위안을 받을 수 있고, 힘든 내 영혼이 쉴 수 있는 은신처가 될 것이다. 그들은 내 안에 함께 살고 있으며, 그 들은 나를 지탱해 주는 믿을 만한 존재이다.

 

거짓된 자기 자신을 극복하라

누구나 한 빈쯤 들어 봤을 법한 '신은 죽었다'라는 말은 철학자 니체의 유명한 아포리즘이다. 하지만 영원성을 상징하는 신이 죽었다는 말은 오늘날 우리에게 그렇게 충격적이지만은 않다. 영적 가치보다는 물질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이미 ''이 아니라 '물질'이기 때문이다.

사실 목표도 없이 방황하던 시절에는 막연히 돈 좀 벌고 성공 좀 하면 삶이 나아질 줄 알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남부럽지 않은 성공을 이뤘고 돈도 벌었지만, 누군가 왜 사냐고 묻는다면 딱히 대답하기 힘들다. 또한 젊은 시절 내게 주어진 경 운과 성공의 기회를 놓쳐버린 후 끊임없이 추락의 길을 걷기도 했다. 돈으로 다 되는 질만능주의 속에서 우리의 삶은 전 지 공허하다.

빠르고 정신없이 돌아가는 삶 속에서 자신의 삶과 야망, 그리고 영혼조차도 송두리깨 타들어 가, 남은 것은 타다 남은 슬픔과 고뇌의 재뿐이다. 가끔은 자신의 꿈을 잃어버려서, 꿈 자체가 없어서 삶이 허무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무언가 이루려고 꿈을 계속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허무주의의 늪에 빠져 버린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이 시대의 허무주의를 예견했 던 니체는 그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며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나 너희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너희는 사람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 위버멘쉬가 대지의 뜻이다. 너희 의지로 하여금 말하도록 하라. 위버멘쉬가 대지의 뜻이 되어야 한다고!"

 

니체는 신이 죽었다고 말하면서 '위버멘쉬', , 초인법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니체가 말한 초인은 신이 죽은 세상에 서도 당당하게 살아가는 인간상이다. 니체는 극복하려는 의지에 따라 인간을 초인과 '인간말종' 두 부류로 나눈다.

, 초인은 '힘에의 의지'를 바탕으로 자기 극복을 위해 기존의 모든 관습과 굴레를 벗어나 자유로운 정신을 가지게 된 존재이다. 반면에 인간말종은 대지 위에 있는 벼룩과 같아서 자신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없는 경멸스러운 존재인 최후의 인간을 말한다. 따라서 그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진정한 의미의 자기 자신이 되려면 거짓된 자기 자신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자신의 약점이나 자신이 겪은 고통과 시련까지도 자기발전의 계기로 승화시킬 줄 아는 초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초인이 되는 것이 바로 헤세가 말한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 아닐까? 우리는 자신의 온전한 모습에 이 르는 길을 초인을 닮아가는 과정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또한 데미안은 니체가 말한 자기 자신을 극복한 본연의 모습을 한 자기self를 의미하는 '초인'이 아닐까?

 

내면의 성장을 위한 여정

싱클레어의 예제

 

먼저 극복해야 할 첫 번째 변화의 과정은 '낙타'의 단계이다.

무거운 짐을 버티는 삶의 태도가 바로 낙타 정신이다. 낙타가 무릎을 꿇고 짐이 가득 실리기를 기다리듯이 우리를 억누르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그 무거운 짐은 전통적인 종교와 철학이 요구하는 진리, 도덕, 관습과 규율 등을 말한다.

, 아무런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 짐만 지거나, 그것이 무엇인지 의문을 갖지 않는 낙타는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없는 인간말종에 대한 메타포인 것이다.

 

두 번째 변화의 과정은 자유를 쟁취하여 그 자신이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사자'의 단계이다.

하지만 니체는 "사자의 정신은 기존의 가치를 파괴할 뿐,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못한다."라고 말한다. , 기존의 가치를 부정함으로써 더욱 허무주의에 빠진다는 것이다.

 

마지막 변화의 과정은 '아이'의 단계이.

여기서 아이의 정신이란 어린아이가 춤을 추듯, 놀이에 흠뻑 빠지듯, 자신의 삶을 기쁘게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 아 이의 정신은 우리의 삶이 고난과 고통으로 가득하지만, 아이처럼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창조적으로 사는 것을 말한 다.

이러한 정신의 세 가지 변화의 과정이 바로 본래 자신의 모습에 이르는 길이다.

 

나를 둘러싼 세계를 깨트리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다

이제 싱클레어는 니체가 말한 낙타, 사자, 아이의 변신 과정을 통해 마치 새가 알에서 깨어나듯이 내면이 성장하는 과정을 밟아야만 한다. 싱클레어는 어두운 세계에 빠져 방탕한 삶을 살기도 하고, 아름다운 소녀 베아트리체를 알게 된 후 다시 고귀한 삶을 살기도 한다. 또한 오르간 연주자 피스토리우스라는 삶의 인도자를 만나기도 한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이름은 압락사스.

 

어느 날 싱클레어는 커다란 알에서 나오려고 애쓰는 새를 그려서 데미안에게 보냈다. 데미안은 답장으로 싱클레어에게 위와 같은 내용이 적힌 쪽지를 보냈다. 여기서 새는 싱클레어를 의미하고 자신의 운명을 찾아내기 위해 자신을 둘러싼 세계라는 껍질을 깨뜨려야 한다. 하늘을 나는 새처럼 자신을 속박하는 기존의 모든 것을 부수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야만 한다. 하지만 알에서 깨어 진정한 자신의 길, 꿈으로 가는 길이 평탄 하지만은 않다. 자기실현을 이루는 과정에서 가장 중 요한 것은 외부 세계가 아니라 자신의 내부인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삶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 뿐이다.

 

지친 내 영혼이 쉴 수 있는 곳, 그곳에서 편안하게, 내 마음대로 그리고 아름답게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허무한 우리의 인생은 기쁜 일보다는 여러 가지 힘든 일, 슬픈 일들로 가득 차 있다. 그래도 가끔 간절히 원했던 꿈이 실현되어 잠시 행복감에 젖기도 한다. 비록 인생의 우여곡절 속에서 이룬 그 행복이 결코, 오래가지 않을지라도 상관없다. 왜냐하면 그 행복은 작은 기쁨이 되어 아름답고 은은한 향기를 지금도 품어 내기 때문이다.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의 어머니인 에바 부인은 지친 영혼이 쉴 수 있는 꿈속에서도 그토록 그리워하던 여성이었다. 에바 부인을 만났을 때 싱클레어는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을 흘렸다. 슬픔과 고뇌로 가득해 죽고 싶었던 지난 10여 년간의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울음을 참지 못했던 것이다.

에바 부인은 싱클레어에게 '새가 알에서 나오려고 애쓰는 만큼 그 길은 무척 어렵지만, 아름답고 더 쉬운 길도 있다'고 말한다. , 자신의 꿈을 찾아내면 그 길은 쉬워진다는 것이다. 또한 운명이 우리 자신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언젠가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운명이 나를 사랑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이 내 운명을 사랑해야 한다. 니체가 스스로 자신의 험난한 운명을 사랑했듯이, 우리도 아무리 삶이 힘들지라도 '아모르 파티 (운명애)’ 자신의 운명을 사랑할 때, 운명도 우리 자신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싱클레어는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를 모두 이해하고 온전한 자신의 모습인 초인이 되는 길목에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너의 인생을 결정하는, 네 안에 있는 것은 그걸 벌써 알고 있어. 이걸 알아야 할 것 같아. 우리 속에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하고자 하고, 모든 것을 우리 자신보다 더 잘 해내는 어떤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이야."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이같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내 안에 또 다른 나 자신을 찾기 위해. 죽는 날까지 성장을 멈춰서는 안 된다. 니체는 우리에게 네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생을 다시 한번. 나아가 수없이 몇 번이고 반복하기를 원하느냐?"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 질문에 대한 각자의 답변에 따라 온전한 자기 자신을 실현하느냐 못하느냐가 달려 있다.

니체가 말하는 영원회귀 사상이란 현재의 삶이 다시 한번, 아니 영원히 무한 반복된다 해도 지금처럼 살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당신이 이러한 질문을 받는다면 어떠한 대답을 할 것인가?

 

 

여행

행복은 인생 곡선을 위로 향하게 한다

라이언 프랭크 바움 「오즈의 마법사」

 

삶의 목적이 행복이라면, 여행은 팍팍한 일상에서 벗어나 행복해지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에서 우리가 여행하는 이유에 대해서 '에우다이모니아’, , '인간적 번영'을 얻는 데 도움이 된다고 강조한다.

 

여행할 장소에 대한 조언은 어디에나 널려 있지만, 우리가 가야 하는 이유와 가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는 듣기 힘들다. 그러나 실 제로 여행의 기술은 그렇게 간단하지도 않고 또 그렇게 사소하지도 않은 수많은 문제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또 여행을 연구하게 되면 그리스 철학자들이 에우다이모니아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렀던 것, , 인간적 번영'을 이해하는 데에도 대단치는 않지만 도움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살다 보면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 일들이 만약 좋은 일이라면 우리의 삶이 더욱 풍요롭고 풍성해질 테지만, 좋지 않은 일이라면 고통과 고뇌를 안겨주고 불행의 늪으로 빠뜨릴 것이다. 우리네 인생길은 마치 미로와 같지만, 불행하게도 누구 하나 그 출구를 찾는 일을 도와줄 수 없다. 그리스 신화의 영웅 테세우스가 미궁 라비린토스에서 탈출할 때 사용했던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를 우리는 스스로 찾아야만 한다.

 

삶은 아름다운 여행이다

 

"걸어가면 돼. 아주 긴 여행이 될 거야. 이 나라를 지나가다 보면 때로는 즐겁겠지만 어떤 때는 무섭고 끔찍한 일도 생길 거야.

하지만 내가 아는 모든 마법을 동원해서 너를 지켜 줄 수 있도록 노력할게." (.....) 에메랄드 시로 가는 길은 노란 벽돌 길로 되어 있단다.”

 

우리의 삶은 한 편의 아름다운 여정이다. 진정한 여정이란 오즈의 마법사의 등장인물들처럼 길을 걸으며 각자가 지닌 세상살이 문제의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여행하면서 걷다 보면 깊은 사색에 잠기곤 한다. 잊었던 과거의 기억이 떠올라 자신의 내면으로 여행하게 한다. 과거에 느꼈던 기쁨, 슬픔, 사랑, 만남, 이별, 향수와 같은 모든 추억의 끈이 다시 이어지는 경험을 한다. 아련한 과거와 현재 나와의 만남은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이 올바른지', '정말로 내가 원해서 걷는 길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다비드 르 브르통Dvd Le Breton은 그의 산문집 「걷기 예찬」에서 이렇게 말했다.

걷는 동안 여행자는 자신에 대하여, 자신과 자연과의 관계에 대하여, 혹은 자신과 타인들의 관계에 대하여 질문하게 되고 뜻하지 않은 수많은 질문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게 된다.

 

사람들은 앞마당에 나가 행운의 네 잎 클로버를 찾기 위해 수많은 행복의 세 잎 클로버를 지나친다. 또한 무언가 혹은 누군가에게서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너도나도 그 행복을 찾아 나서느라 인생을 허비한다. 하지만 오즈의 마법사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처방을 내린다.

 

"행복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것', '우리가 생각하는 태도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그게 바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해답입니다." ***

 

 

독서

그 사람의 인생을 드러내는 것

장 폴 사르트르 「말」

 

프랑스의 유명한 미식가 브리야 사바랭 은 무엇을 먹는지가 그 사람을 규정한다고 했다. 만약 책을 음식에 비유한다면, 이 말은 책을 읽는 우리의 삶에도 적용된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면 그가 읽고 있는 책을 살펴보면 된다. 독서는 그 사람의 인생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독서는 '우리가 어떠한 존재인지,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다. 삶의 진리와 의미를 발견하게 해 줄 책들을 위해 책장에서 구태여 읽을 필요가 없는 무의미한 책들은 정리해서 버리고, 빈자리를 마련해 두자. 좋은 책 속에 나오는 수많은 아포리즘과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고통스럽고 고독한 우리의 삶에 작은 위안이 되어 다가옴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책을 읽어야 하는 세 가지 이유

우리는 왜 책을 읽어야 할까? 내게 맞는 책은 어떻게 골라야 할까?

 

첫째, 좋은 책은 우리의 영혼을 살찌게 한다.

만 권의 책을 읽었어도 자신의 삶에 적용하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좋은 책은 작가의 정신이 담겨 있다. 그래서 사르트르도 작가들은 죽은 것이 아니라, 책으로 변신해서 그들의 영혼이 작품에 늘 붙어 다닌다고 말한다

 

헤세는 「헤르만 헤세의 독서의 기술」에서 "인생은 짧고, 저세상에 갔을 때 책을 몇 권이나 읽고 왔느냐고 묻지도 않을 텐데 무가치한 독서로 시간을 허비한다면 정말 미련하고 안타깝다.”라고 말했다. , 독서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양의 책을 읽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좋은 책을 읽었느냐'이다.

 

둘째, 고전은 혼란스럽고 답답한 정신을 위한 청량제이다. ***

이탈로 칼비노 (alo Calvino는 「왜 고전을 읽는가」에서 '고전이란 특별한 영향을 미치는 책'이라고 정의한다.

어린 시절부터 고전을 읽는다면 삶을 살아가면서 앞으로 경험하게 될 세상을 미리 볼 수 있다. 고전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삶의 거울이자 나침반이다. 사르트르도 내가 세계를 만난 것은 책을 통해서'라며 책의 가치를 일깨웠다. 고전을 읽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수많은 세월과 수많은 사람에게 인정을 받아 검증된 책이기 때문이다. 헤세는 수백 년 세월을 버티면서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은 것이라면, 그에 대한 평가는 아마 우리 평생 큰 변동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셋깨, 책은 그 사람의 인생을 드러낸다.

 

 

예술

마흔에 그는 왜 모든 것을 버렸을까

서머싯 몸 「달과 6펜스」

 

서머싯 몸 william Somerset Maugham의 「달과 6펜스」는 화가 폴 고갱의 생애를 모티브로 한 이야기로, 예술가의 삶을 동경한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가 화가가된 후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다. 이 소설의 제목은 주제를 암시한다. ''은 스트릭랜드의 예술에 대한 열정을 비유하고, '6펜스'는 현실 세계나 돈과 물질의 세계를 비유한다. . 이 작품은 달의 세계에 매혹되어 6펜스의 세계를 탈출하는 화가의 이야기다.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단 말이오.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는 것이 뭐가 문제겠소? 우선 헤어나오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어요."

 

예술은 말이나 글처럼 쉽게 표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화가가 작품을 통해 전달하려는 것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 화가의 삶, 미술에 관한 예비지식 그리고 감수성 등을 갖추어야 한다.

 

스트릭랜드는 오랜 방황 끝에 남태평양의 타히티섬에 정착해 원주민 '아타'라는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고 예술에 몰두했다. 기이하고 환상적인 에덴동산 같은 그림을 자신의 집 벽 사방에 그렸다. 비록 그는 나병에 걸려 죽지만 자기가 바라던 것을 이루었고, 자기 삶을 드디어 완성해낸다. 그리고 예술에 사로잡혔던 영혼은 수많은 예술가가 그랬던 것처럼 드디어 휴식을 찾았다.

바로 이것이 예술의 힘이다. 어떠한 목적도 성과도 없는 순수한 열정의 몰입. 그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만으로도  도의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 예술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다. 인간은 태초부터 미 와 추의 구분을 알았고 미를 좇는 것은 본능에 가까웠다. 스트릭랜드 역시 운명을 거스를지언정 내면에서 솟구치는 미적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살았을 뿐이다.

 

감수성

삶의 길을 걸으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네루다의 시에 빠져 있던 마리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인처럼 메타포를 구사했다. 메타포, , 은유에 대해서 고대 그리스 최고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한 사실에서 다른 사실로, , 유에서 종으로, 종에서 유로, 종에서 종으로, 또는 유추에 의해 한 낱말을 옮겨서 쓰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 『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에서는 세련되고 호평받는 연설을 하고 싶다면 시인들이 쓰는 은유를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 어떤 것이 마치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하는데 은유가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좋아. 하늘이 울고 있다고 말하면 무슨 뜻일까?" “참 쉽군요. 비가 온다는 거잖아요."

"옳거니, 그게 메타포야."

 

 

2장 우리는 사랑으로 산다

 

사랑

사랑하는 만큼 사랑받지 못한다면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요한 볼프강 폰 괴테 ohann Woligang ron Goethe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사랑에 빠진 주인공 베르테르가 로테와의 사랑을 이룰 수 없자 스스로 죽음에 이르는 소설이다.

 

프랑스 근대 소설의 시초라고 일컬어지는 스탕달은 「연애론」에서 사랑이 발생하는 과정을 7단계로 분류했다.

'감탄, 접근, 희망, 사랑의 탄생, 1의 결정작용, 의혹의 발생, 2의 결정작용' 순으로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사랑의 결정화' 란 연애 초기에 일어나는 상대방을 이상화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이러한 결정작용은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행동과 말, 모습 등 눈앞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으로부터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정신작용이다. 우리는 이를 쉽게 말해 콩깍지가 씌인다고 표현한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대상은 늘 사람마다 다양하고 특별하며 유일무이하다.

 

스탕달은 겨울철에 잘츠부르크의 소금광산 깊은 곳에 나뭇가지를 넣어 두었다가 2~3개월이 지난 후에 꺼내 보면 그 나 뭇가지가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무수히 많은 소금 결정체로 덮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본래의 나뭇가지는 모 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랑에 빠진 사람의 마음속에도 눈꽃처럼 아름다운 결정체가 생긴다.

첫 번째 결정작용 때문에 사랑의 열병에 빠진 사람은 상대방의 어떤 모습이라도 아름답게 감싸려고 한다. 둘 사이의 관 계가 나빠진 경우에도 마음속으로 상대방을 미화하면서 그 사랑을 이어가려고 한다.

2의 결정작용 단계에서는 '그녀도 정말 나를 사랑하고 있을까?' 라는 생각으로 비통한 심정과 감미로운 심정에 번갈아 사로잡히면서 숨이 막힐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사랑이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 사랑은 내가 필요로 한 것을 상대방이 기꺼이 내어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랑은 자신을 괴롭힐 수 있고, 불행에 빠뜨릴 수도 있다. 베르테르처럼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받지 못하는 맹목적인 사랑이 위험한 까닭이다.

헤르만 헤세는 사랑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사랑은 우리가 고통과 인내하는 과정 속에서 얼마나 강할 수 있는가를 우리에게 보여 주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랑은 꽃과 흙의 관계?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진정한 사랑이란 사랑에 부과된 장애물을 지속적으로 극복해 가는 과정이다. 장애물을 극복하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있는 그대로 상대를 사랑하고, '' ''의 차이를 인정하는 데서 진정한 사랑이 시작된다.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사람만의 장점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진정한 사랑을 하려면 나부터 사랑해야 한다. 루이스 I. 헤이 Louise L. Hay는 「미러」에서 '타인과의 관계를 치유하고 싶다면 가장 먼저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개선하라'고 말한다. 타인과 사랑을 기반으로 맺은 관계는 둘이서 아무리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마음에 상처를 입을 수 있다. 사랑하는 과정에서 상처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랑하는 감정이 깊을수록 상처의 골은 더 깊어지기 때문이다. 오히려 상처를 받지 않는다면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지를 의심해 봐야 한다.

사랑이란 둘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을 허물고 나아가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슬픔과 후회, 그리고 눈물로 가득찬 자신의 마음을 치유한 후에 다시 타인과 사랑을 해야 한다. 손상된 사랑의 관계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스스로 자신의 아픈 곳을 붕대로 완전하게 감싸줘야 한다.

 

마르틴 부버Marin Buber는 「나와 너」에서 "온갖 참된 삶은 만남이다."라는 중요한 말을 했다. 나를 온전히 존재하게 만드는 너는 그만큼 특별한 존재다. 사랑의 진정한 의미도 내가 너에게로 다가가고, 네가 나에게로 다가오는 관계에서 비롯된다. 쌍방적이며 순환적인 사랑이다. ***

사랑이란 꽃과 흙의 관계처럼 묵묵히 모든 것을 받아 준다. 흙은 꽃을 피우지만, 흙은 꽃에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다.

그저 꽃이 아름답게 피고 자라는 데만 묵묵히 밑거름이 되어 줄 뿐이다. 또 꽃잎이 떨어지면 흙은 말없이 받아 준다. 서로에게 맞는 대상이 되기 위해 꽃은 흙의 성질을 받아 주고 흙 또한 꽃이 피는 과정을 지켜보며 양분을 제공한다. 길들이고 받아 주고 또 길들여진다. 그리하여 '사랑'이라는 결실을 맺는다. ***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앙드레 지드 「좁은 문」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은 제롬과 외사촌 알리사의 운명과도 같은 이루어질 수 없는 슬픈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주인공 제롭은 열두 살도 채 되지 않아 의사였던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따라 파리로 이사한다. 매년 여름 외삼촌 집에 놀러 가서 두 살 위였던 알리사, 한 살 아래였던 쥘리에트, 그리고 막내 로베르와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제롭은 눈물로 젖은 알리사의 얼굴을 보았다. 알리사는 젊은 장교와 바람난 자신의 어머니 때문에 슬퍼하고 있었다. 이 순간 제롭은 자신의 인생 목적이 오직 알리사를 지켜 주는 것이라고 다짐한다.

 

이별은 떠나는 사람과 남겨진 사람 모두에게 슬픔과 아쉬움이라는 감정을 남긴다. 이별이 슬픈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될 거라는 절망감 때문이다. 또한 영원히 사랑하겠다던 굳은 약속과 추억들이 먼지처럼 덧없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롬은 잃어버린 사랑으로 인한 슬픔을 어디에서 위안받아야 할까.

이별의 슬픔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으로 극복되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떠난 것이 아니라 곁에서 머물며 단지 '침묵'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슬픔이 가득할 때는 슬픔에 기대야 한다. 슬픔을 극복하려고 하는 사람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슬프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가만히 슬픈 내 그림자를 보며 하루하루 살다 보면 불행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힘이 생긴다. 슬픔을 일상으로 여기는 것. 그리하여 무뎌지는것. 요철처럼 튀어나온 슬픔을 평평하게 두드려 평온함을 유지해야만 한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프랑수아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사랑은 감정이 아닌 기술 *****

정신분석학자이자 사회철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을 흔히 생각하는 '감정'이 아닌 기술'이라는 말한다. 그러나 현대인들 대부분은 사랑을 단순히 감정의 문제로만 알기에 사랑에 대해서 배워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사랑에 대해서 배우려고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에리히 프롬은 세 가지를 언급했다.

 

첫째, 대부분의 사람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곧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한다. 자신이 적극적인 사랑을 표현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상대방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소극적 사랑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둘째, 사랑의 문제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랑한다'라는 것은 쉬운 일이고, 사랑할 또는 사랑받을 올바른 대상을 발견하기가 어려울 뿐이라고 생각한다.

 

셋째, 사랑을 '하게 되는' 최초의 경험과 사랑하고 '있는' 지속적 상태, 혹은 좀 더 분명하게 말한다면 사랑에 '머물러' 있는 상태를 혼동한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모르고 지내오던 두 사람이 갑자기 상대방과 사랑에 빠져 하나라고 느낄 때, 처 음에 느꼈던 친밀감과 기적적인 면은 점점 줄어들고 마침내 적대감, 실망감, 권태로 인해 이별을 택하게 된다.

 

이별을 겪고 나면 다시는 사랑하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또 누군가를 만나 사랑에 빠지곤 한다. 사랑은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라고 한 번쯤 자신에게 진지하게 물어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

사랑에 빠질 때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고독한 사랑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일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실천과 관련하여 사랑은 활동이라고 말한다. 사랑하고 있다면 사랑받는 사람에 대해 끊임없이 적극적인 관심을 둬야 한다.

 

프랑수아즈 사강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익숙함과 매너리즘에 매몰된 우리의 삶과 사랑에 대해서 '고독'이라는 형을 선고한다. 우리가 고독하다고 느끼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상대를 그저 내 안에 가둬 둘 존재로만 생각하기 때문이 다. 사랑이라는 커다란 유리관에 갇힌 대상은 유기적 존재가 아닌 무기적 존재가 되어 버린다. 그렇게 숨통을 조인 존재는 결국 숨을 멎고 우리는 고독이라는 중형을 선고받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고 있는 대상은 아무런 의지나 감정이 없는 인형이 아니다. 나와 마찬가지로 자유로운 의지와 기쁨과 슬픔을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지닌 존재다. ***

 

우리는 종종 이런 사실을 잊는다. 사랑하는 그 또는 그녀가 단지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치 집에 있는 오래된 가구나 의자처럼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의 어려움은 그 또는 그녀를 이런저런 방법으로 소유하려는 자기 욕망에서 비롯된다.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항상 내게 줄 수 있는 의무가 있다고 한결같이 생각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3

단 한 번 뿐인 삶, 욕망하라

 

열정

어떤 삶이 참되고 행복한가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개츠비는 왜 위대한가?

『위대한 개츠비」의 제목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바로 개츠비의 욕망은 스피노자가 말한 것처럼 가만이라는 부족함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역량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개츠비의 위대함은 자신의 욕망을 현실화하는 가운데 경험하는 기쁨의 감정, 사랑에 있다. 만약 그에게 데이지와의 사랑을 되찾고자 한 욕망이 없었다면 어떠한 행동도 결정도 삶도 없었을 것이다.

개츠비의 존재는 욕망이며, 욕망은 개츠비를 존재하게 하는 이유였다. 결론적으로 개츠비가 위대한 이유는 그의 앞에 나타난 가난과 장애물들을 뛰어넘으며 자신의 역량을 증대시키려 노력했다는 점이다.

 

알랭 바디우는 「참된 삶」에서 삶을 향한 문턱이라는 과도기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는 두 가지 내부의 적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즉각적인 삶에 대한 열정'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성공에 대한 열정'이다.

첫 번째 적인 즉각적인 삶에 대한 열정은 '삶을 불사르는 열정'으로, 말하자면 도박이나 쾌락, 한 곡의 음악, 대마초, 일시적인 바보 같은 장난에 대한 것이다. 두 번째 내부적인 위협인 성공에 대한 열정은 삶을 쌓아 올리는 열정'으로, 부유하고 힘 있고 좋은 자리에 앉고 싶다는 생각을 말한다.

바디우는 이러한 내부의 적들은 젊은이들을 위협하여 참된 삶에서 멀어지게 하며, 그들 자신 안에 있는 참된 삶의 가능성을 알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는 「아나바즈」라는 페르스의 시에서 '어려운 목적지를 향해 되돌아가는 혹은 거슬러 오르는 방황'을 의미하는 '아나바시스'라는 형상을 가져와 이 두 가지의 경향을 가진 젊은이들의 내적 모순을 설명한다.

, 창조적이고 참된 삶에 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하며, 그러한 삶 자체의 역량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고 말한다.

 

오늘날, 청춘들은 자유롭고 무한한 잠재적 가능성을 소유하고 있기에, 삶의 주체로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자유로운 만큼 방황이라는 불안한 상황에 놓일 수 있다. 참된 삶은 노력할 가치가 있는, 살아갈 보람이 있는, 그리고 돈이나 쾌락이나 권력을 훨씬 능가하는 그 무엇이 아닐까. 개츠비의 삶이 위대했던 것처럼 말이다.***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파울로 코엘료 「연금술사」

 

우리는 모두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 하지만 정작 행복한 삶이 무엇에 달렸는가를 모른 채 걱정과 고민이 가득 찬 상태로 오늘도 하루를 보낸다. 행복하기 위해 밤낮으로 노력해도 짧은 인생인데, 이리저리 헤매며 방황하는 가운데 에너지를 소진한다. 무엇보다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점이 우리를 더욱 불행으로 이끈다.

고대 로마 시대의 후기 스토아학파 철학자인 세네카는 행복한 삶은 자신의 본성에 맞추는 삶'이라고 말한다. 또한 무엇보다도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행복한 삶의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나쁘게 느껴지는 기운이지. 하지만 사실은 바로 그 기운이 자아의 신화를 실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네. 자네의 정신과 의지를 단련시켜 주지. 이 세상에는 위대한 진실이 하나 있어. 무언가를 온 마음을 다해 원한다면,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거야.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은 곧 우주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지.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는게 이 땅에서 자네가 맡은 임무라네."

"그저 떠돌아다니고 싶은 마음도 그런 것인가요? 양털 가게 주인의 딸과 결혼하고 싶다는 마음도요?"

"아무렴. 보물을 찾겠다는 마음도 마찬가지야. 만물의 정기는 사람들의 행복을 먹고 자라지. 때로는 불행과 부러움과 질투를 통 해서 자라나기도 하고, 어쨌든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 내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부과된 유일한 의무지. 세상 만물은 모두 한가지라네.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네."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이런 외적 조건에 압도되지 않고 자기 행동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으며, 내가 내 운명의 주인인 듯한 느낌 이 들었던 순간이 있을 것이다. 이때 우리는 기분이 마냥 고양되고 행복감을 맛본다. 이런 경험은 우리 뇌리에 오랫동안 남게 되고, 더 나아가 자신이 지향하고 싶은 삶의 이정표가 될 수 있다. 이런 경험을 최적 경험optimal experience이라고 한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이러한 최적 경험의 상태를 플로우라고 이름했다. , 플로우는 지금 하는 일에 푹 빠져 있는 몰입된 상태를 말한다. 누구나 한 번쯤은 자신이 하는 일이 너무나 즐거워서 고통스럽더라도 몰입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최적 경험이 하나둘씩 쌓이다 보면 어느덧 인생의 주인공은 나라는 강렬한 자각, 바로 이 느낌이 행복에 가장 가까운 상태라고 말한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서 '연금술'이란 값싼 금속을 값비싼 황금으로 만드는 방법이 아니라,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꿈을 찾아 보물 같은 삶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그 여정에서 우리가 찾는 보물은 먼 나라의 피라 미드가 아니라, 가까운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내 마음이 가는 곳에 나의 보물이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꿈을 이룰 자격이 자신에게는 없다고 생각하거나 이룰 수 없다고 지레 생각한 다. 대부분은 자신의 눈앞에 엄청난 보물이 놓여 있어도 알아보지 못한다. 보물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자신의 삶이 바라는 대로 바뀌지 않는다고 불평만 한다. 정작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또 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모른 채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

과연 자신의 진정한 꿈을 아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또 안다고 해도, 그 꿈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가 자신의 신화를 이룰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자신 안에 잠자고 있는 꿈을 깨워야 한다. 자신의 삶과 세상을 변화시킬 힘을 발견해 보자. ***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제비 한 마리가 날아온다고 하루아침에 봄이 오지 않듯, 사람도 하루아침에 또는 단기간에 행복해지지는 않는다'고 했다. 행복해지기 위한 내면의 노력은 평생토록 지속되어야 한다

 

살다 보면 크고 작은 우연한 사건들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사소한 불행이 삶을 곧바로 불행하게 만들지는 못하지만, 반 복적인 불행은 고통으로 이어질 수 있다. 반면, 하루하루를 소소하지만 좋은 일로 채워 간다면 더욱 풍요로운 삶이 될 것이다.

 

행복은 어느 날 우연히 찾아오는 것도 아니며, 행복한 삶을 방해하는 운명의 여신이 부리는 장난에 대항할 방법도 없다.

진정으로 행복해지고 싶다면 자신이 몰입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간절히 원했던 어떤 것을 한 번 성취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이 평생토록 지속되지 않는다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전 생애를 간절함으로 가득 채워야 할 것이다. ***

 

욕망

지금 당장 행복해지는 네 가지 길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현재 이 순간에 온 마음을 기울여라

우리가 겪는 고통의 원인은 무엇일까? 어떻게 해야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를 옭아매며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고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바로 '현재 이 순간'에 있다. 행복은 지금 이 순간이 주는 선물이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지속 가능한 행복감이다. 따라서 지속 가능한 행복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현존하는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앙드레 지드는 순간들의 '현존'이 얼마나 큰 힘을 가진 것인가를! 때로는 오직 그 순간에만 온 마음을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현재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현존', , 현재만이 유일하게 존재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지금 현재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열정적으로 나아가 가슴 뛰는 삶을 살라

한곳에 머물면서 나아가지 못한다면 죽은 삶이나 다름없다. 안락함과 나태함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한다면 그 시간을 헛되이 소비하는 것이다. 화자는 나타나엘에게 '열정' 이란 그대를 닮은 것 옆에 절대 머물지 않고, 그곳을 떠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너의' 가족, 너의' . '너의' 과거보다 더 너에게 위험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영훈을 다른 무엇보다도 열정의 불꽃으로 뜨겁게 타오르게 해야 한다.

 

미국에서 활동한 레바논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철학자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은 「예언자」에서 '그대들의 이성, 또 열정 이란 바다 위를 달리는 그대들 영혼의 키이며 돛'이라고 말한다. 만약 바다를 항해할 때 열정이라는 돛이나 키가 망가진다면, 우리는 바다 한가운데 내팽개 처진 채 표류하거나 바람 부는 대로 떠밀려 다닐 수밖에 없다.

우리의 마음이 무엇을 원하는지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익숙한 것들과 결별하고 새로운 변화를 찾아 떠나는 순간 우리는 참된 삶을 지속할 수 있다. 우리의 영혼을 새로운 것들 속으로 흠뻑 젖어 들게 한다면,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준비된 마음의 대기 상태'를 유지하라

앙드레 지드는 '기다림이란, 무엇이든지 받아들이기 위한 마음의 준비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마치 땅에서 불같이 뜨거운 바람이 솟아오르는 여름 동안 벌판이 비를 기다리듯이, 밤하늘의 별들이 하나씩 꺼져 가며 새벽을 기다리 듯, 기다림은 오는 모든 것들을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변화를 위한 기다림은 이미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될 수는 없다. 변화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또 무엇을 원하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그래서 앙드레 지드는 "오직 그대에게로 오는 것만을 원해야 한다. 오직 그대가 가진 것만을 원해야 한다." 라고 말한다.

 

나아갈 길이 불확실하기에, 삶은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생각해 보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선택이란 어떤 것을 택하든지 두려운 순간이다. 그래서 앙드레 지드는 '선택이 내게는 고르는 것이라기보다는 고르지 않는 걸 버리는 것'이라고 한다. 선택은 미리 준비된 사람의 몫이다. 왜냐하면 이것이냐 저것이냐 망설이는 순간, 시간은 우리에게서 멀리 달아나 버리 기 때문이다.

선택은 오직 자기 자신만 발견하기 위한 것이고 자기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만약 잘못된 선택으로 비록 후회한다고 하 더라도, 결코 미래에서 과거를 다시 찾으려 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을 선택하면 저것이 아쉽고, 저것을 선택하면 이것이 아쉬운 것이 인생의 영원한 딜레마일 수밖에 없다.

휘황찬란한 것들이 가득한 시장에 들어섰지만 쓸 수 있는 돈이 너무 적어서, 하나 밖에 살 수 없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라고 앙드레 지드는 말한다. 그리고 '그것밖에 소유'할 수 없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고 열정으로 삶을 살며, 새로운 것이 나타나면 언제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대기 상태의 자세를 갖추라고 강조한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아무도 '행복한 삶이란 이러이러한 것이다'라는 명쾌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해 볼 수 있다. '과연 행복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이제 겨우 어렵게 행복한 삶을 시작하자마자 행복이 사라지는 경험을 종종하기도 한다. 왜 행복한 감정은 지속되지 못하는 것일까?

그 이유에 대해서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은 「행복론」에서 우리가 행복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기 때문이라고 한다.

 

행복이란 저 진열장 속의 물건처럼 골라서 돈을 치르고 가져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외부에서 그 행복을 구한다면 결코 아무 데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요컨대 행복에 대해서는 추측도 예견도 할 수 없다. 현재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미래에 행복이 있는 것처럼 여겨질 때는 잘 생각해 보라. 당신은 이미 행복을 가지고 있다. 기대를 갖는 삶, 이것은 행복한 존재이다.

 

자유

삶을 의식하는 순간 심장은 힘차게 고동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카잔차키스는 그의 자서전 「영혼의 자서전에서 자신의 삶을 가장 풍성하게 만든 것은 여행과 꿈이었다고 말한다. 또한 자신의 영혼을 고양시키고 삶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 호메로스, 붓다, 니체, 베르그송의 책들을 탐독했다고 한다. 그는 조르바에게서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침을 받았다며 이처럼 말했다.

 

굶주린 영혼을 만족시키기 위해 오랜 세월에 걸쳐 책과 선생들에게서 받아들인 영양분과, 겨우 몇 달 사이에 조르바에게서 얻은 꿋꿋하고 용맹한 두뇌를 돌이켜보면 나는 격분과 쓰라린 마음을 견디기 힘들다. 그가 나에게 한 말과, 나를 위해 그가 추었던 충과, 갈탄을 찾는답시고 수많은 노동자와 크레타 해안에서 여섯 달 동안 땅을 파며 지내던 무렵 그가 나를 위해 연주한 산투르를 회상하 면서, 내가 어찌 가슴 벅찬 흥분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 두 사람 다 현실적인 목표란 세상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 위한 먼지일 따름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조르바는 살과 피로 싸우고 죽이고 입을 맞추면서 삶을 온몸으로 부딪히며 살아온 자연인이다. 반면에 화자인 ''는 고 독 속에서 의자에 앉아서 펜과 잉크로 삶의 문제를 풀어 보려고 했던 지식인이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와 조르바 사이의 대화를 통해 우리에게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것은 진정한 행복이 무 엇인지를 아는 것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사실 사람들 대부분은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행복을 엉뚱한 곳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행복은 방해받지 않는 '자유'에서 온다****

우리의 삶이 추구하는 행복은 우리가 원하는 바를 행하거나 경험하는 데에서 '방해받지 않음'으로 이루어진다. 방해받지 않는다는 것은 행복의 근원인 '자유'를 말한다. '자유'라는 개념은 어떻게 정의 내릴 수 있을까?

로마 제국 시대의 후기 스토아학파의 철학자인 에픽테토스는 가난한 노예로 태어나 평생을 절름발이로 살았다.

가난했고, 노예였고, 신체적 불구로 평생 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케이리디온」에서 자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존재하는 것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이고, 다른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이 아니다. 우리에 게 달려 있는 것들은 '믿음, 충동, 욕구, 혐오' 한마디로 우리 자신이 행하는 그러한 모든 일이다. 반면에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들은 '육체, 소유물, 평판, 지위'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 자신이 행하지 않는 그러한 모든 일이다. 게다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 은 본성적으로 자유롭고, 훼방받지 않고, 방해받지 않지만,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들은 무력하고, 노예적이고, 훼방을 받으며, 다른 것들에 속한다. 그러므로 만일 네가 본성적으로 노예적인 것들을 자유로운 것으로 생각하고, 또 다른 것에 속하는 것들을 너 자신의 것으로 생각한다면, 너는 장애에 부딪힐 것이고, 고통을 당할 것이고, 심란해지고, 신들과 인간들을 비난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라.

 

그가 말하는 자유란 인간이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정신적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다. 반면에 사회적 지위나 명예, 명성, 재산 등은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으로 나 자신의 의지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과 달려 있지 않은 것의 기준은 우리의 의지로 통제할 수 있는가이다. 결국 에픽테토스가 말한 진정한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과 하지 못하는 것을 잘 분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는 언젠가는 그 줄을 잘라낼 거라고 말하지만, 조르바는 그것이 아주 어렵다고 말한다. 조르바는 자유롭고 싶다면 무식해야 하며, 자유로운 삶을 위해 모든 걸 걸고 도박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진정한 정신적 자유를 얻기 위해 우리는 조르바처럼 할 수 있는 한, 영혼의 자유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 삶은 책을 통해서가 아니라 구체적이 고 다양한 경험 속에서 이루어진다.

 

자기 자신 안에서 행복의 근원을 찾아라

, 명예, 권력을 통해 얻은 행복은 이런 것들이 없어지는 순간 그 행복도 함께 사라진다. 우리는 삶이 베푸는 것들에 자 주 감탄하고 감동하며, 부족함 속에서도 행복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들에 핀 꽃 한 송이에서도, 따뜻한 봄 햇살에서도, 따뜻한 차 한 잔에서도 소소한 행복을 발견해 보자.

진정한 행복이란 '야망이 없으면서도 세상의 야망을 다 품은 듯이 말처럼 뼈가 휘도록 일하는 것', '사람들에게서 멀리 떠나,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되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것', 성탄절 잔치에 들러 진탕 먹고 마신 다음, 잠든 사람들에게서 홀로 떨어져 별은 머리에 이고 물은 왼쪽, 바다는 오른쪽에 끼고 해변을 걷는 것'이라고 말한다.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란 자신의 삶에서 이제 마지막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삶이다. 비 록 불행의 그림자가 우리 뒤에 늘 따라다니고, 자질구레한 걱정거리들이 머릿속에 맴돌지라도, 행복해지는 방법은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것이다. 삶이 고난과 고통으로 불행할지라도 그 길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담담히 걸어가라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한 줄기 빛처럼 재빠르게 지나간다. 내 삶이 현재 행복한가하고 가늠하기엔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 톨스 토이는 "과거는 이미 없는 것이며 미래는 아직 오지 않는 것이다.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현재의 이 순간 뿐이다. 그리고 그곳에, 그 순간에 우리의 모든 삶은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한순간에 자기의 온 힘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삶이 '카르페 디엠 Carpe Diem’ 이다. 카르페 디엠은 '현재를 잡아라'로 번역되는 라틴어다.

이 말은 '현재를 즐겨라',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 라는 뜻이다.

지금 이 현재의 삶에 집중해 보자. 지금 먹고 있는 음식, 지금 하는 일,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에 충실해야 한다. 조르바가 당차게 외치는 삶이 바로 그런 삶이다.****

 

“새 길을 닦으려면 새 계획을 세워야지요!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행복이란 마음속에서 바랄 때에만 행복해질 수 있다. 불행이나 불만, 불평 속에서 지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타인이 나를 즐겁게 해 주기를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 행복은 누군가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를 짜증 나게 하고 자신을 흔들고 있는 것들에서 벗어나 행복해질 것을 맹세해야 한다. 타인에게 행복을 주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속을 행복으로 가득 채워야 한다.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한다는 절망에 빠졌을 때, 너무나 고통스러워 얼마나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없었던가. 자신을 얽어 매고 있는 운명의 줄을 끊고 진정한 자유인이 되어 보자.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엔 이렇게 적혀 있다.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노력하는 사람만이 방황한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파우스트: ! 나는 철학도 법학도, 의학도, 심지어는 신학까지도

온갖 노력을 다 기울여 철저히 공부하였다.

그러나, 지금 여기 서 있는 나는 가련한 바보.

전보다 똑똑해진 것은 하나도 없구나!

 

파우스트는 세상의 모든 지식을 배웠으나, 사실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닫고 절망하여 가슴이 타 버릴 것만 같다 고 말한다. 무언가 올바른 것을 알았다는 자부심도 없고, 인간을 선도하고 개선할 만큼 그럴싸한 걸 가르칠 자신도 없다.

또한 재산과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 세상의 명예와 영화도 누리지 못했다고 한탄한다.

그는 모든 즐거움도 사라지고, 모든 것이 헛된 것임을 깨닫고, 삶의 의지 없이 권태로움을 느끼는 지식인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고통을 내려다보면서 삶에 대한 회의감과 당혹감으로 얼마나 잠 못 이룬 나날들이 많았던가. 결국 파우스트는 불안한 삶 속에서 안식을 찾지 못하고 역겨운 인생에 환멸을 느낀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길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방황' 이라는 단어에서 찾을 수 있다. 「파우스트」의 1부 앞 에 「천상의 서곡」 편에서 메피스토펠레스가 주님에게 파우스트를 악마의 구렁텅이로 끌어내릴 수 있다며 내기를 제안하 자, 주님은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비록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를 파멸시키기 위해 또 다른 세상으로 뛰어들게 했을지라도, 사실은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에게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 깨닫게 해 준 존재가 된 것이다. 메피스토펠레스는 그레트헨과 사랑, 헬레나와의 사 랑을 통해 파우스트의 본능을 자극해 그를 파멸시킬 것을 장담했지만, 결과적으로 파우스트가 내기에서 승자가 되었다.

 

우리는 대부분 파우스트처럼 절망을 경험한다. 하지만 자신이 절망에 빠져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들도 있다. 키르케고르는 이렇게 자신의 절망에 대해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이 절망 가운데 가장 위험한 형태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절망에 빠졌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절망이 없어지거나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지는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절망 상태를 깨닫고 있는 이들은 스스로 회복할 수도 있는 것이다.

 

변화를 꿈꾼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미지의 세계로 내던지는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이다. 삶은 그런 진통을 겪을 때마다 자신이 생각지도 못했던 무언가를 얻는다. 그러므로 안전한 모든 것을 뿌리치고 고통스러운 변화를 겪는 것을 그리 두려워하지 마라.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는 노력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삶이 스스로 힘으로 감당하기 어렵다고 느낄수록 변화를 꿈꾸자.

 

 

 4

살아 있음이 곧 기적이다

 

의지

파멸당할 수는 있어도

패배할 수는 없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것은 인간의 운명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라는 문장은 『노인과 바다」를 대표하는 가장 의미심장한 말이다. 사실 파멸과 패배의 의미를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다. 사전적으로 파멸은 '파괴되고 없어짐'이고, 패배는 '겨루어서 짐'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위 문장은 인간은 파괴되고 없어질 수는 있을지 몰라도 겨루어질 수는 없다는 뜻이다.

 

누구나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며 산다. 항상 보다 좋은 것을 꿈꾸며 살기도 하고 동시에 과거에 놓쳐 버린 것들에 대해 후회와 고통 속에 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 인생은 지금 말하는 순간 영원히 과거 속으로 흘러가 버린다. 생존을 위해.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다가 결국 대부분 자신의 삶을 즐기지도 못한 채 공허한 삶만 살다가 생을 마감한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생애는 희망에 의해 끊임없이 기만 당하면서 죽음의 품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삶이 슬픈 것은 결국 시간에 얽매인 삶을 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자신의 고통스러운 삶과 겨루어서 무릎을 꿇 어서는 안 되는 존재라는 것을 헤밍웨이는 말하고 있다. 왜 우리는 어차피 죽음에 이르는 유한한 삶을 살면서 닿을 수 없을 것 같이 요원한 희망을 좇는 것일까?

 

일상의 사사로운 사건들에 연연하다가 정작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갈 것인가? 중요한 것은 이번 생을 잘 사느냐 못 사느냐가 무엇에 달려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아내야 한다.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는 자만이 그 허무함을 극복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삶은 고통으로 적당히 거리를 두고 바라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우리 인생의 광경들은 가까이에서 보면 마치 아무런 인상도 주지 못하는 거친 모자이크 그림과 같으므로 그것들이 아름답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멀리 떨어져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들에만 매달리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꿈과 이상을 향해 더 높이 비행하며 살아가 자. 눈앞에 이익만 추구하며 아웅다웅 살지 말고, 가장 높은 경지로 날아가 고결한 존재가 되어 보자.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남들이 나의 결심을 비웃고 경멸할지라도, 꿋끗하게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겠다는 내면에서 나오는 의지에 있다. 그 런 의미에서 『노인과 바다」의 마지막 부분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기적

길을 잃고서야 자신을 발견한다

생텍쥐페리 「인간의 대지」

 

우리는 조각난 삶의 파편들 속에서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기적은 사랑이 이미 내 안에 현존하고 있음을 느낄 때 일어난다. 다시 말해 기적은 사랑을 표현할 때 일어나는 체험이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가까운 사람에게 어떤 사랑의 기쁨을 줄 것인지 상상하라. 그러면 기적으로 가는 길이 열리게 된다. 그래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에서 니체는 하루 하루를 잘 시작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은 눈을 뜨면서 그날 적어도 한 사람에게 어떤 한가지 즐거움을 줄 수 있을지에 대하여 생각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우리 외부에 있는 공동의 목적에 의해서 형제들과 이어질 때, 오직 그때에만 우리는 숨을 쉴 수 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함께 바라보는 것임을. 동료란 도달해야 할 같은 정상을 향하여 한 줄로 묶여 있을 때에만 동료이다.***

 

생텍쥐페리는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가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함께 바라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같은 방향을 함께 바라보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삶이란 앞을 향해 함께 걷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 얼굴만 마주 보고 있다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우리가 마주해야 하는 것은 상대방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자신이 안고 있는 문제점이다.

 

선택

“인생은 B D 사이의 C이다"

장 폴 사르트르 「구토!

 

『구토」의 주인공 양투안 로킹링은 연금생활자로 특별한 직업도 없이 여러 지역을 여행한 후 3년 전부터 역사 속 인물에 관한 전기를 쓰는 작업을 위해 부빌이라는 도시에 정착해 살고 있었다. 그는 아내도, 자식도 없었다. 도서관과 카페만 오가는 고독하고 단조로운 시간을 보내지만, 이따금 구토증에 시달렸다.

문손잡이를 잡으며, 타인의 얼굴을 보면서, 바닷가에서 주운 돌멩이에서, 자주 가는 카페에서 맥주잔을 쥐면서. 아돌프의 연보라색 멜빵을 보면서, 땅에 떨어진 종이쪽지를 집으려고 하면서 주위의 곳곳에서 구토를 느낀다. 구토감에서 유일 하게 해방되는 순간은 바로 카페에서 낡은 축음기로 들어주는 <섬 오브 디즈 데이스(Some of these days> 라는 노래를 들을 때다.

 

사르트르는 "인생은 B D 사이의 C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다시 말해 인간은 태어난 날birth부터 죽는 날death까지 좋든 싫든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선택choice해야만 한다. 우리는 매 순간 홀로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 수많은 가능성과 선택사항을 눈앞에 두고 고민에 휩싸여 이리저리 떠밀려 다닌다. ***

사실 어떤 선택을 하든지 간에 만족할 수는 없다. 우리 자신으로 눈을 돌려, 지난날에 자신이 했던 일들을 살펴보면, 사 람들 대부분은 두 가지를 후회한다. 하나는 자신이 했던 어떤 일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이 하지 않았던 어떤 일이다. 우 리는 여러 선택사항 가운데 한 가지를 꼭 선택해야 하고, 선택하지 않은 것들에 가끔 아쉬워한다.

어느 날 선택하지 않았던 것들이 불쑥 머릿속에서 떠올라 잠 못 이루던 날도 많았다. 하지만 흘러가 버린 시간은 되감을 수 없는 것인데, 선택한 것들과 선택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후회로 자신을 괴롭히고 고통스러워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 가?

우리는 삶이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며 하나의 형벌이라고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삶을 포기할 수는 없다. '나는 왜 이렇게 삶을 계속 이어가고 있는지, 나는 왜 삶을 중단하지 않는지' 그 이유는 모른다. 다만, 흘러가는 시간에 몸을 맡긴 채 삶이 주는 풍족함과 공허함, 기쁨, 슬픔을 느낄 뿐이다.

 

페르난도 페소아는 「불안의 책」에서 우리의 인생은 누군가가 헝클어놓은 실타래라고 말한다. 잘 감겨 있거나 풀린 채 놓여 있다면 그 안에 의미가 있을 것이지만 이렇게 헝클어진 상태라면 형체가 없어 어디로 실을 감아야 할지 모르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은연중에 나라는 존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 자기 자신이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거대한 우주 안에서 인간만이 유일하게 '자유의지'를 소유하고 있다. 나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거나, 그대로 놔둘 수 있는 주체적이며 자유로운 존재이다. 세상에서 무엇을 선택할지는 나에게 달려 있다.

 

진리

아낌없이 남김없이 이 삶을 사랑하라

톨스토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나님은 천사인 미하일에게 한 여인의 영혼을 거두어오라는 명령을 한다. 그러나 미하일은 그 여인의 영혼을 거둘 수 가 없었다. 여인의 남편은 며칠 전 나무에 깔려 죽었고, 이제 막 쌍등이를 출산했다. 그녀가 제발 자신의 손으로 쌍둥이를 먹이고 키울 수 있도록 자신의 영혼을 거두어가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기 때문이다. 그녀를 측은하게 여긴 미하일은 하나님 앞으로 가서 "그 어머니의 영혼을 거두어 올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하나님은 자신의 명령을 거역한 벌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알아 오라고 했다.

 

"어서 가서 그 여인의 영혼을 거두어와라. 그러면 세 가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사람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 세 가지 진리를 깨달은 뒤에야 하늘나라로 돌아올 수 있다."

 

톨스토이는 「인생이란 무엇인가」에서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위해 즉, 자신의 행복만을 바라며 살아간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신의 행복을 손에 넣으려고 노력하는 그 과정에 행복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좌우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 른 사람들도 모두 똑같이 자신의 삶과 행복만을 중요시하고 진실한 삶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 다른 사람의 삶은 자신의 행복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을 손에 넣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다른 사람의 행복 속에 자신의 행복이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람은 자신의 행복을 구 하는 일을 그만두고, 오로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려고 노력할 때 진정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닌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살고, 자신보다 남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될 때 우리가 바라는 행복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말한다.

자신도 가난으로 추운 겨울에 모피 외투 하나 살 돈도 없고, 어떻게 처자식을 먹어 살려야 할지 걱정하던 구두장이 세몬 이 추위와 배고픔으로 죽기 직전인 천사 마하일을 도와준 것은 바로 사람의 마음에는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미하일이 깨달은 첫 번째 진리이다.

 

톨스토이는 「고백록」에서 인간의 '무지'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동양의 옛 우화를 들려주었다.

들판에서 사나운 명수의 습격을 받은 나그네가 물이 말라 버린 우물 속으로 뛰어들였다. 그 우물 바다에는 그를 단숨에 삼키려고 입을 커다랗게 벌린 용 한 마리가 있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우물 중간의 틈새에 자라난 나뭇가지에 대롱대를 매달렸다. 그때 깊은 주와 흰 쥐가 나타나서. 그가 매달려 있던 나뭇가지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나뭇가지는 똑 끊어질 것이고. 그는 몸의 입안으로 떨어질 것이 틀림없었다. 나그네는 그런 와중에서도 나뭇가지에 달린 잎사귀에 꿈이 및 방을 문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허를 내밀어 꿈을 할기 시작했다.

우리 삶의 모습도 이 나그네와 같지 않을까. 우리를 삼키려고 입을 벌리고 있는 죽음이라는 용과 밤낮없이 우리 삶을 갉 아 먹고 있는 두 마리의 쥐를 보지 못한 채, 눈앞의 달콤한 꿀만 핥으며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삶에 대한 무지란 바로 삶의 무의미함과 부조리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깨닫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우리 삶은 앞날을 알 수 없어서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만약 우리에게 미래를 알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어쩌면 더 불행해 지지않을까? 자신의 미래를 내다보는 순간, 그 미래는 확정되고 우리에게 선택할 자유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그저 정해진 대로 흘러갈 뿐이다. 그래서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존재를 바꾸는 것이다. 내면에 진정 한 존재를 향해 귀 기울일 때, 자신의 운명을 발견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위한 염려가 아니라 사랑으로 사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어머니에게는 아이들이 살아가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알 수 있는 능력이 없었고, 그 부자 역시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날이 저물었을 때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할지, 산 자가 신을 장화가 필요할지 죽은 자가 신을 슬리퍼가 필요할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가 사람이 되어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제 힘으로 스스로를 보살필 수 있어서가 아니라 지나가던 사람과 그의 아내가 사랑과 온정을 베풀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5

내 삶의 의미를 묻다

 

고독

고독의 무게를 재어 보라

프란츠 카프카 「변신,

 

 카프카의 『변신」은 제목 그대로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어느날 잠에서 깨어났을 때, 한 마리 벌레로 변신'한 이야기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한 마리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 잠자에 대한 이야기로 꺼림칙하고 소름 끼치며 슬프고 구역질 나기도 한다.

『변신」은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를 통해 현대 문명에서 서로 간의 소통과 이해가 단절된 소외된 인간의 고독과 실존의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인간은 누구나 고독하다. 하지만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일에 지치고, 행복감이 시들어갈 때, '고독'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지 깨닫게 된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행복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변신」의 주인공처럼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자기 자신조차도 추스르지 못하게 될 때 결국 그 관계에서 소외당하고 외로움을 느낀다.

라르스 스벤젠 Lars Svendsen은 「외로움의 철학에서 사랑에는 늘 치러야 할 대가가 있는 법인데, 외로움은 그 대가의 일부라고 말한다. , 타인에게 마음을 쓰거나 애정을 쏟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타인이 물리적으로든 감정적으로든 떠나버리고 없을 때 외로움을 느낀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를 찾을 것인가? 어떻게 지독한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을까?

 

첫째, 먹고, 만나고, 사랑하라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고 우정을 나눌 때 우리는 외로움을 덜 느낀다.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 누고, 공통 관심사에 관해 이야기하는 순간 우리는 잠시나마 외로움이라는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 라르스 스벤젠은 '외로움을 느낄 수 있는 자만이 사랑할 수 있거나 누군가의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 인생에서 외로움은 사랑과 우 정을 가능하게 하는 이유이다.

 

둘째, 이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외롭다

나만 외로운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 때 외로움을 견딜 수 있다. 자기 안에 외로움을 떨쳐내고 자연과 함께 고요함 속에 머무는 법을 배움으로써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다.

 

셋째, 외로움과 고독의 차이점을 이해하라

외로움은 슬픈 감정으로 다가오지만, 고독은 그러한 부정적 감정에서 벗어나 있다. 다시 말해 외로움에는 고통과 괴로 움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있지만, 고독은 다양한 감정에 열려 있는 상태다. 따라서 고독 속에서 자유를 발견할 수 있다.

영국 최고의 지성이자 정신분석의인 앤서니 스토는 「고독의 위로」에서 '인간의 대부분의 불행은 고독할 줄 모르는 데서 온다'고 말한다.

사람은 한평생을 살면서 전혀 다른 두 가지 충동을 느낀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과 사귀고 사랑을 나누는 등 어떤 방식으로든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고 싶다는 충동과, 독립적이고 개별적이며 독자적인 삶을 살고 싶다는 또 다른 충동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공감)

그렇다면 둘 중 어떤 삶이 더 행복한 삶일까? 인간은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하지만, 바로 이러한 본성 탓에 인간관계에서 든 혼자만의 고독한 시간에서든 완전한 행복을 얻는 것이 어렵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다.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인간다움을 형성한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들 속에 서든, 집에서든, 직장에서든 외로울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가끔 외롭고, 또 어떤 사람은 날마다 외롭다. 라르스 스벤젠은 아무리 우리가 외로움을 극복하려고 발버둥치며 노력한다 해도 외로움은 시시때때로 우리를 후려칠 것이라고 말한다. 외로움도 나 자신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정하면 마음이 더 편안해질 것이다.

 

시련

시련은 삶의 의미를 찾게 한다

빅터 프랭클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유대인이었던 프랭클 박사가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겪었던 자전적 체험에 관한 수기다. 그는 이러한 수용소 체험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정신분석 방법인 로고테라피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가 끌려갔던 강제수용소의 삶은 파멸 그 자체였다. 인간의 존엄성이 무참히 짓밟히고,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보아야만 했고, 가진 모든 것을 박탈당했으며, 기나긴 죄수 생활로 남은 것은 자신의 벌거벗은 실존뿐이었다.

 

프랭클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어떻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 알게 된다, 프랭클의 로코테라피에 따르면 다 음과 같은 세 가지 방법 즉, 창조적 가치, 경험적 가치, 태도직 가치로 삶의 의미를 되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창조적 가치'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만들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창의성이라는 견지에서 예술 활동. 교육 학문, 봉사활동 등 주어진 일을 통해서 의미를 찾는다. 프랭클은 수용소에서 빼앗긴 원고를 되살리는 작업을 했다. 만약 그에게 이러한 창조적 정신이 없었다면 수용소의 많은 이들처럼 무감각 증세와 정신착란과 같은 증세에 지배당했을지도 모른다

프랭클은 인간은 모든 것을 빼앗기더라도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길 수 없다고 말한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혹은 어떤 일을 '경험' 함으로써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경험적 가치란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세상으로부터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사랑을 통해서 기쁨을 느끼거나, 아름다운 자연 풍경이나 예술 작품을 보고, 예전에는 전혀 느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체험을 하는 경우다. 프랭클이 강제수용소에서 매일매일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도 모든 것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경험 적 가치인 '사랑' 덕분이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생각하며 버텨낼 수 있었다. 이 세상에 남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 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면 여전히 더할 나위 없이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사랑은 다른 사람의 인간성 가장 깊은 곳까지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랑하는 사람을 잘 알게 된다. 그 사람의 본질적 특성과 개성 그리고 아직 발현되지 않은 잠재력을 볼 수 있다. 이 것이 경험적 가치로서 사랑이 특별한 이유다. 사랑의 힘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자신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 지를 깨닫게 함으로써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피할 수 없는 운명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태도적 가치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끔찍한 운명에 마주치게 되었을 때, 그 시련을 대하는 어떤 태도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인간이 기꺼이 그 시련을 올바른 방법으로 견뎌낼 때 삶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 시련이 고통스럽고 괴롭다고 피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곤경에 처한 삶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

프랭클은 아무리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운명과 마주쳤을 때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유일한 인간의 잠재력이 최고조에 달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 라는 것이다.

그는 강제수용소에서 자신에게 닥친 절박한 시련 속에서 무언가를 찾고자 했다. 그에게 시련은 운명과 죽음처럼 삶의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었으며, 시련과 죽음 없이 인간의 삶이 완성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산다는 것은 곧 시련을 감내하는 것이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시련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삶에 어떤 목적이 있다면, 시련과 죽음에도 반드시 목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그 목적이 무엇인지 말해 줄 수는 없다.

프랭클은 각자가 스스로 알아서 이것을 찾아야 하며, 그 해답이 요구하는 책임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으며, 그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짊으로써'만 삶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오로지 책임감만이 삶에 응답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인생에는 나름의 의미가 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습니다."

 

프랭클은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 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삶의 의미는 사람에 따라, 시기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의 인생에는 의미가 있다. 프랭클은 포괄적인 삶의 의미보다는 주어진 상황에서 개인이 처한 삶의 의미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생명이 있는 모든 사람에겐 충족시켜야 할 의미, 구체적으로 수행할 특정한 일과 사명이 반드시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소명'이라고 부른다.

소명이란 개인적•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발견하는 일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삶의 의미는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존재하며 손상되지 않는다.

 

그는 끔찍한 현실에 처한 사람의 정신력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는 데 성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의식을 발견하고,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되어보자

 

절망

절망 속에도 희망은 있다

안네 프랑크 「안네의 일기」

 

페터, 그런 행복을 느낄 수 있는 한, 자연과 건강과 그 외의 모든 것들에 대해 기쁨을 느낄 수 있는 한, 그런 것들을 놓치지 않는 한, 사람은 언젠가 행복을 잡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 부는 언젠가 잃어버릴 수 있지만, 마음의 행복은 한때 숨어 버리는 일은 있 어도 언젠가는 꼭 되살아나. 살아 있는 한은 반드시."

 

 

희망

희망이 가진 두 얼굴

오 헨리 「마지막 잎새,

 

희망에는 의심이라는 그림자가 따라다닌다

오 헨리. Henry의 마지막 잎새는 존시에게 잃어버린 희망을 되찾아 준 베어먼 노인의 따뜻한 마음을 그린 감동적인 소 설이다. 누군가가 더 이상 삶에 희망이 없다면, 아마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희망을 되찾게 도와주는 일이다. 희망이란 어 떤 일을 이루거나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또 희망은 잘되리라는 어떤 가능성을 의미한다.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희망에 대해 이렇게 정의한다.

 

희망이란 불안정한 기쁨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 결과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의심하고 있는 미래나 과거의 사물에 대한 관념에서 생겨난다.

 

희망은 가능성과 불가능성이라는 두 얼굴을 지닌다. 하나는 긍정적인 측면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기쁨이라는 감정이다. 반면에 또 다른 하나는 부정적인 측면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불안정성으로 인한 의심이라는 감정이다.

 

우리의 마음에는 항상 그 안에 서로 반대되는 것들이 있다. 무엇을 얻고자 하면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내포한다. 만 약 우리 스스로 가능성보다는 불가능성 쪽으로 무게를 둔다면 바라는 일은 나타나지 않는다. 바로 우리 자신이 하나의 장 애물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희망의 문이 닫혀 있는 이유는 자신의 마음이 많고 많은 의심으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의심을 없애는 방법

우리에게 이토록 친밀한 의심이라는 배신자를 어떻게 없앨 수 있을까? 의심의 사전적 의미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없어서 믿지 못하는 마음'을 뜻한다. , 의심이란 믿음이 없는 상태다. 따라서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강력한 믿음이다. 자기 자신을 걱정으로 채운 마음에 긍정적인 믿음의 불꽃이 타오르게 해야 한다. 믿음은 바라고 원하는 것을 보증 해 주고,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에 대한 확신을 준다.

 

절망을 이겨내고 나아가야 하는 것이 인생***

 

두려움이 없는 삶은 없다. 모든 인간은 항상 고통과 절망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다. 그렇다고 고통과 절망 앞에서 늘 좌절해야 할까? 절망적인 순간을 우리는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먼저 우리는 희망이 없이도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말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고통과 실패에서도 배워야 한다는 말 과 같다. 우리는 고통과 절망 속에서 부정적인 사람이 될 수도 있고, 긍정적인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긍정적인 사람은 내 삶을 헝클어뜨린 고통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한다. 어쩌면 긴 인생의 끝자락에서 살아온 자신의 삶을 바라볼 때, 고통을 겪으며 좌절하지 않고 딛고 일어섰던 그때가 가장 소중한 순간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진정 한 삶은 자신에게 흔적을 남겼던 시련을 극복할 때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운명을 미래의 막연한 희망에 맡기지 말고, 현재의 삶을 느껴야 한다. 기쁠 때는 마음껏 기뻐하고, 슬플 때는 마음껏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행복한 사람이다. 또한 시련에 부딪혔다면 견딜 수 있어야 한다. 앞으로 다가올 것들에 또다시 희망이라는 단어를 품고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 절망이 다시 희망으로 바뀌는 삶의 변화를 위해 절망을 뚫고 나아가 보자. ***

 

죽음

메멘토 모리,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삶이 공허한 이유는 우리의 삶이 사소한 걱정과 끊이지 않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단 한 번뿐인 인생을 잘살고 있는가?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삶과 죽음의 의미에 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단편 소설이다. 40대 중반의 이반 일리 치는 법원 판사로서 출세와 명에 같은 사회적 성공과 물질적 안락만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왔다. 어릴 적 집안에서 수재라 고 불릴 만큼 영리하고 사교성이 있는 예의 바른 인물이었다. 그는 법률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며, 세상에서 최 고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마음이 끌리는 경향이 강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지닌 삶의 태도와 방식을 배우며 그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자 애썼다.

그가 사고 단체에서 만난 아내는 훌륭한 귀족의 핏줄을 이어받았고, 인물도 나쁘지 않았으며 재산도 있었다. 그가 그녀 와 결혼을 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였다. 그는 그의 바람대로 조촐한 만찬회를 베풀어 사회적으로 중 요한 지위에 있는 신사나 숙녀를 초대하고,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즐겁고 평탄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에게 중대한 일이 일어난다. 사닥다리에서 실수로 발을 헛디뎌 떨어지면서 옆구리를 창문 손잡이에 부딪힌 이 후로 불치의 병에 걸리고 말았다. 병에 걸려 죽음의 구렁텅이로 떨어진 그는 예전에는 즐겁게 생각되던 모든 일이 아주 보잘것없고 추하며 무의미하다는 생각으로 괴로웠다. 그는 원인을 모르는 병으로 죽어가면서 지금까지 쌓아 왔던 삶이 한순간에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는 듯한 고통을 겪었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메멘토 모리라는 라틴어 격언이 있다. 사실 20, 30대 청춘에게 '네가 반드시 죽는 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말하면 마음에 전혀 와닿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청춘에게 죽음이란 먼 훗날에 발생할 불확실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나 불치의 병에 걸리거나, 갑작스러운 가족의 죽음을 맞거나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접하고 나면 한 번쯤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

죽음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죽음을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는 없다. 따라서 죽음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다.

단지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사실만 알뿐이다. , 인간이라면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우리 마음대로 죽는 시기를 늦 출 수도 없다. 또한 타인에게 대신 죽어 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다. 죽음을 앞둔 사람은 홀로 그 두려움을 맞이해야 한다.

고대 로마인들은 왜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라고 말한 것일까? 먼저 삶과 죽음이 어떠한 관계인가를 살펴봐야 한다. 고독과 방랑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말테의 수기」에서 삶과 죽음의 관계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아무도 살지 않는 고향집을 생각하면, 그전에는 죽음이 달랐을 거라고 여겨진다. 옛날에 사람들은 과일에 씨가 들어 있듯 이, 사람도 내부에 죽음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아니면 그저 예감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작은 죽음을, 어른들은 큰 죽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그것을 자궁 안에, 남자들은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어쨌든 독특한 위엄과 말없는 자부심을 주는 죽음을 가지고 있었다.

 

죽음을 통해 삶을 보라

릴케는 모든 인간은 삶과 죽음을 함께 간직하고 태어난다고 말한다. 인간이 죽음의 씨앗을 품고 태어난다는 릴케의 표현을 떠올리면 섬뜩한 느낌마저 든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삶과 죽음의 시간이 시작된다. , 삶의 시간이 늘어날수록 죽음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이다. 동전의 양면과 같은 삶과 죽음의 관계 때문에, 우리는 삶을 생각할 때 죽음을 떠올려야 하고, 죽음을 생각할 때 삶을 떠올려야 한다.

 

고대 후기 스토아학파 철학자인 에픽테토스는 「케리디온」에서 무엇보다 죽음을 날마다 자신의 눈앞에 놔두라고 충고한다. 죽음에 관해 늘 생각한다면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고, 지나치게 어떤 것을 욕망하지도 않게 된다는 것이다. , 자신이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사회적 성공, 지위, 명예, 돈 등에 대한 욕망만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반 일리치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병에 걸리기 전까지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인생의 입구에서는 한 줄기 빛이 있었으나, 이제 끝을 향해 달리고 있는 자신의 삶에 남은 것은 오로지 죽음의 공포로 인 한 두려움 뿐이었다. 무엇 때문에 자신이 죽음이라는 비참한 형벌을 받아야 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이반 일 리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친한 동료들조차도 자신의 승진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을 뿐이었다. 단지 '죽은 것이 내가 아니고 그 사람이어서 다행이구나!'라는 안도의 마음을 가질 뿐. 그의 아내 역시 남편이 죽음을 앞둔 이때 정부 로부터 연금을 받으려면 어떻게 하면 좋으냐 하는, 유가족 보조금에 대한 관심이 먼저였다. 그는 죽음 앞에서 철저히 혼자였다.

 

죽음을 기억한다는 것은 현실의 삶에 충실하라는 말이다.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스토아 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 리우스는 『명상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장이라도 세상을 떠날 수 있는 사람처럼 모든 것을 행하고, 말하고, 생각하라. ***

(.....)

네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며, 네가 마음의 평정을 얻는 데 쓰지 않으면, 네 시간도, 너도 사라질 것이고, 두 번 다시 그런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이제야말로 알아야 할 때다.

 

삶의 끝자락에서 인생을 잘못 살았다고 후회해 봤자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 비록 죽을 운명이라는 짐을 짊어진 채 하루 하루 살아가고 있지만, 그 하루하루가 마치 자신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삶에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현재에 충실하고, 따 뜻한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죽음을 통해 단 한번뿐인 이 삶을 사랑하라!"

 

 

6

행복해지고 싶을 땐

 

지혜

오로지 내가 내 삶을 한층 한층 쌓아 갈 뿐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Hermann Hess)의 「싯다르타」는 싯다르타와 그의 친구 고빈다가 속된 현실의 세계를 떠나서 자기 발견을 위한 구도자의 길을 떠나는 정신적 여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소년 싯다르타, 장년 싯다르타, 노년 싯다르타,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싯다르타는 고타마의 가르침 그 자체로부터 해탈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그는 그곳을 떠나 다시 걷기 시 작했다. 더 나은 가르침을 찾기 위해서 떠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해탈을 얻을 수 있는 구도자의 길을 찾아 나선 것이다.

진정한 깨달음은 누구에게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우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는 지식은 전달할 수 있지만, 지혜는 아무리 현인이라 해도 남에게 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깨우친 것이다. 그는 지식이나 자기 초월 명상법 같은 것을 배우면서 위안을 받을 수 있었지만,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을 찾아 떠난 것이다.

 

삶의 지혜를 깨닫고 해탈의 경지에 들어선 노년 싯다르타

 

"남의 말을 귀담아듣는 것을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은 강이었어요. 당신도 강으로부터 그것을 배우게 될 거예요. 그 강은 모든 것을 알고 있어서, 우리는 강으로부터 모든 것을 배울 수 있지요. 보세요, 당신도 이미 강물로부터, 아래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 가라앉는 것, 깊이를 추구하는 것이 좋은 일이라는 것을 배웠어요. 부유하고 고귀한 신분의 싯다르타가 노 젓는 천한 사람이 되리라, 학식 높은 바라문인 싯다르타가 뱃사공이 되리라, 이러한 것도 강이 당신에게 들려준 말이지요. 당신은 다른 것도 강으로부터 배우게 될 거예요."

 

노자의 「도덕경」 제8장 첫머리에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뜻' '상선약수라는 말이 나온다. 노자는 ''를 물에 비유하면서 우리에게 물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물은 언제나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을 향하여 흐른다. 삶이 물처럼 그 자체로 흘러가게 내버려 둬야 한다. 그저 강물의 흐름에 자신을 내맡긴 채 흘러가면 된다. 그 흘러감 자체에서 우 리는 궁극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싯다르타도 이제 자신의 인생이 한 줄기 강물과 같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인생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소년 싯다르타는 장년 싯다르타와 노년 싯다르타로부터 단지 그림자에 의하여 분리되어 있을 뿐, 진짜 현실에 의하여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다시 만난 카말라가 독사에 물려 죽고, 도망간 아들로 인해 오랫동안 괴로워했지만. 그는 이제 완성된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우리의 인생은 언제나 현재진행형

우리는 누구든 삶의 주인공처럼 살아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도대체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도대체 무엇 때문에 계속 길을 가야 하며, 도대체 어디를 향해 가야 하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이러한 부조리로 인해 우리는 삶의 주인공은커녕 방관자처럼 살아간다.

 

아직 우리의 인생이 미완성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전체를 볼 수도 없고, 전체를 행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만약 과거나 현재의 마음속 혼란과 불행한 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더는 이루어야 할 꿈을 가질 수 없 다. 중요한 것은 현재 우리가 어디에 있느냐가 아니라,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느냐 이다. 지금 잠깐 불행하고 절망스러운 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해서 망쳐 버린 인생이라고 말할 수 없다. 삶은 먼 훗날 인생이라는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에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기다림이다

사뮈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뭔가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복합적인 기분에 휩싸인다. 권태, 분노, 슬픔, 공포가 스멀거리며 올라온다. 특히 권태로움에 빠져 더 강한 욕망에 사로잡힌다. 권태로움에 허기진 마음은 더 많은 자극을 불러들이지만. 허기는 쉽게 가시지 않는다.

하지만 권태로운 기분이 들 때, 이것이 나의 진정한 모습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사위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의 제1막은 돌 위에 앉아서 구두를 벗으려고 공공거리는 '에스트라공'과 그의 동행자 '블라디미르' '고도Godot'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으로 막을 연다.

 

블라디미르는 에스트라공에게 혼돈 그 자체인 삶에서도 단 하나 확실한 게 있다고 말한다. 고도가 어떤 존재인지, 언제, 어디로 올지는 모르지만, 다행히도 우리는 고도가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 확실 한 것은 오랜 기다림 속에 온갖 짓거리를 다 해가며 시간을 메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긴 시간 동안 지독하게 지루하기 때문이다.

 

내면의 공허함을 이겨내는 방법***

매일 똑같은 생활을 반복하며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을 때 우리는 권태로움을 느낀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행복의 정복」에서 권태가 생겨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어쩔 수 없이 상상하게 되는 지금보다 바람직한 상황과 현재 상황의 대조'에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필요가 없을 때'에도 권태에 빠진다고 한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의 삶이 권태로운 것은 그들의 삶을 구원해 줄 고도라는 인물의 등장이라는 바람직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현재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불확실한 미래에 삶의 전부를 걸었다.

그들처럼 우리도 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라는 욕망 속에 살고 있고, 가진 자는 더 많이 갖고자 탐욕을 부린다. 그래 서 버트런드 러셀은 '권태의 반대는 즐거움이 아니라 자극'이라고 말한다. 권태로움을 없애기 위해서는 자극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공허한 마음은 권태로움을 불러일으키고 다시 그 권태로움은 더 강한 자극을 갈망하며, 그 열망이 성취되는 순간 또 다른 내면의 공허함이 발생하게 된다. 길지 않은 삶 동안 마르지 않는 욕망, 지독한 권태로움, 내면의 공허함 순으로 끊임없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어떻게 이러한 악순환의 연결고리를 끊을 수 있을까? 독일의 철학자인 쇼펜하우어는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에서 이런 방법을 제안한다. 바로 내면의 공허함을 외적 자극이 아닌 정신적인 것들로 채워 넣는 것이다. 그는 온갖 종류의 사교와 오락, 여흥과 사치를 병적으로 추구하는 까닭이 주로 이러한 내면의 공허 때문에 발생한다고 본다. 이런 사람들은 쾌락에 탐닉하며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결국 비참한 상태에 빠진다. 쇼펜하우어는 이런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게 지켜 주는 것이 '정신의 풍요'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정신이 풍요로워질수록 내면의 공허가 들어찰 공간이 줄어든다.

한편으로 무료함 즉, 권태가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어느 정도의 권태가 있기에 새로운 삶을 추구할 수 있다. 권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도 삶을 풍요롭게 하는 측면이 있다.

 

기다림으로 점철된 우리네 삶

과연 고도는 누구일까? 아마도 신, 구세주, 구원자, 자유, 행복, , 희망 아니면 죽음일지도 모른다. 사뮈엘 베케트조차도 고도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작품 속에 썼을 것이라고 말했으니 그것은 각자가 생각할 몫이다. 어쩌면 막연한 기다림 은 인간의 삶 그 자체이며 존재의 조건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수많은 기다림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간다. 기다림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하지 만 기다리는 동안 의지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기다림은 기다리는 존재를 무시하고 파괴할 수도 있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 게 할 수도 있다.

 

프랑스 출신의 작가이자 사상가인 모리스 블랑쇼는 「기다림의 망각」 에서 "기다림은 위안을 주지 않아요. 기다리는 자들은 어떠한 것에서도 위안을 받을 일이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기다리는 동안 누구에게도 위로 받을 수 없다. 기다림은 고독과 한 몸이다. 물론 기다림은 꼭 만남을 전제로 하지 않아도 좋다. 단지 그 과정이 중요하니까.

기다림 속에서 살아가는 동안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을 아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중요한 한 가지는 자기 본연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다.

 

고도를 기다리며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한다. 권태로움 가운데에서의 기다림, 고도를 구원의 대상으로 여겨졌던 기다림, 그러다가 결국 인생 자체에 대한 염증으로 여겨졌던 기다림, 그런 기다림을 견뎌낼 수만 있다면, 약간은 권태롭더라도 버틸 수 있는 삶이다. 진정한 기쁨은 조금은 지루하더라도 이런 분위기 속에만 깃들기 때 문이다.

 

인생이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기 드 모파상 「여자의 일생」

 

잔느는 열일곱 살에 수도원을 나와 자유의 몸이 된 후 오래전부터 그토록 꿈꾸어 왔던 인생의 모든 행복을 갈망한다. 귀 족 가문의 유서 깊은 성. 피플 저택에서 사랑하는 부모님과 하녀인 로잘리 등과 함께 유쾌하고 자유로운 삶을 산다. 하지 만 젊은 자작 쥘리앵이 나타나면서 잔느의 삶은 자신이 꿈꾸어 왔던 것과 달리 실망과 고뇌의 연속이 시작된다.

쥘리앵은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후로 완전히 딴사람으로 변한다. 그의 바람기로 사랑은 흔적조차 남지 않고 사라져 버린 것이다. 쥘리앵은 이미 잔느와 연애할 때 하녀 로잘리와 관계를 맺고, 아이까지 낳는다. 또 잔느가 친구라고 믿고 지냈던 푸르빌 백작부인과도 관계를 맺다가 결국 아내의 불륜 사실을 알아차린 백작에게 비참하게 살해당한다.

 『여자의 일생」은 순진무구한 한 여자의 불행하고도 비극적인 인생을 담담하게 그린 작품이다. 잔느라는 한 여성의 삶을 통해 인생의 빛과 그림자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삶을 관통하는 허무와 고독

 

사랑은 변하는 걸까? 아니면 진정한 사랑이 아닌 것을 진정한 사랑으로 착각한 것일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며 행복 해질 수는 없는 것일까? 사랑은 그저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 싶은 강렬한 욕구에 불과한 것일까? 이러한 욕구가 강렬 하면 할수록 진정한 사랑인지 아닌지 판단이 흐려지게 마련이다.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결혼이라는 결과에서 행복이라는 결론이 맺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으므로 결혼 전에 서 로 사랑한다는 말은 모두 거짓'이 된다고 말한다. 냄비처럼 뜨겁게 달궈졌던 사랑이 그 열기가 식어버리기까지 채 몇 년도 걸리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혹한 운명 가운데 어디서 행복을 찾아야 할까?

흔히 우리는 운명의 여신이 갖고 놀고자 하는 사람들을 고른다고 이야기한다. 운명의 여신은 친근하게 다가와서 유혹하 고 나서는 그들이 안심하고 지내면서 자신들의 몰락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때, 갑자기 그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떠나 버림으로써 인간으로서 감내하기 힘든 고통을 안겨준다고 말한다. 고대 로마 제국 최후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였던 보에티우 스의 「철학의 위안」에서 이러한 운명의 여신을 찾을 수 있다.

「철학의 위안」은 보에티우스가 유배되어 감옥에 갇히게 된 처지를 한탄하고 있을 때, 철학의 여신이라는 영적인 존재가 찾아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 여인의 옷은 절대로 썩지 않는 아주 가는 실로 섬세하고 정교하게 짜여 있다. 옷의 아래 쪽에는 그리스어로 '실천'을 의미하는 '프락시스'의 머리글자인 '파이T', 옷의 위쪽에는 이론'을 의미하는 '테오리아'의 머리글자인 '세타, 그리고 그 중간에는 사다리꼴 모양의 계단들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아래쪽 글자에서 위쪽 글자로 올라가는 계단 같다.

그리고 그녀의 오른손에는 책들이, 왼손에는 권위를 상징하는 홀이 들려 있다. 그는 운명의 여신이란 제멋대로 왔다가 제멋대로 가버리는 존재라고 말한다. 변덕스러운 운명의 여신이 처음에는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거짓된 행복의 삶을 주다 가 그 행복의 탈을 벗겨 슬픔과 비탄의 시간에 빠지게 한다는 것이다. 특히 보에티우스는 우리가 큰 고통을 느끼는 이유는 이전에 자신이 행복했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참된 행복을 찾아야 할까? 어디에서 지금의 비참한 삶에 대한 위안을 얻어야 할까? 철학의 여신은 보에티우스에게 참된 행복이란 무엇인지를 알려 준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이 가장 바라는 것은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족들이 여전히 살아 있음은 복이고,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참된 행복은 운명의 여신이 좌지우지하는 물질적인 것, 권력, 명성 그리고 육신의 쾌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데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 언젠가는 죽게 될 인생들아, 행복은 너희 안에 있는데, 어찌하여 밖에서 찾는 것이냐. (••••) 이 세상에는 영원하고 변함없는 것은 하나도 없고, 오직 잠시 왔다가 가버리는 덧없는 것들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만일 행복이 이성으로 살 아가는 인간에게 가장 좋은 '최고선'이라면, 행복은 빼앗길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운명의 여신이 가져다 주는 행복은 언제 또 빼앗아 갈지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행복은 인간에게 최고의 행복이라고 말할 수 없다."

 

참된 행복은 부와 권력, 명예처럼 나타났다가 곧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상태에 있다.

후기 스토아학파의 철학자인 에픽테토스는 사람들을 심란하게 하는 것은 그 일 자체가 아니라. 그 일에 대한 그 들의 믿음' 이라고 말한다. 원래 세상에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다. 단지 우리의 믿음 즉. 생각이 그것을 결정할 뿐이다. 우리는 '만일 그때 그런 일을 겪지 않았더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을 수시로 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일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믿음이다. ***

 

 

우정

친구는 제2의 자아

헤르만 헤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공자는 좋은 사람과 함께 지내는 것은 마치 지초와 난초의 방에 들어간 것과 같아서 함께 오랜 시간 있다 보면 그 향기는 맡지 못하고 그 향기에 동화된다고 말한다. '지란지교'는 이러한 공자의 말에서 유래된 사자성어로, 지초와 난초 같이 향기롭고 맑은 친구 간의 우정을 뜻한다.*****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지초와 난초 같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라는 두 남자주인공의 우정에 관한 이 야기다. 소년 골드문트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수도원에 들어오면서, 수습 교사였던 젊은 나르치스와 만나게 된다. 나르치 스와 골드문트는 처음 만난 이후로 서로에게 이끌리어 우정의 싹을 틔운다.

 

진정한 우정이란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교에서 우정을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유익을 이 유로 한 우정과 즐거움을 이유로 한 우정, 그리고 탁월성에 근거한 우정이다. 유익이나 즐거움의 우정은 상대로부터 어떤 좋음이나 쾌락이 생겨나는가? 라는 조건 안에서 우정을 나눈다. 따라서 만약 더 이상 상대방이 원하는 이익이나 쾌락을 주 지 못한다면 그들의 우정도 끝나게 된다. 반면, 탁월한 우정 즉, 진정한 우정은 이해관계를 떠나 신뢰감을 바탕으로 맺어 졌기 때문에 오랜 세월 유지된다. 철학자 키케로는 「우정에 관하여」에서 이렇게 고한다.

 

"가이유스 판니우스와 퀸투스 무키우스여, 내 거듭 말하노니, 우정을 맺어 주는 것도 미덕이고 우정을 지켜주는 것도 미덕이라 네. 조화와 안정과 신뢰는 모두 거기에서 비롯된다네. 그리고 미덕이 고개를 들어 제빛을 드러내며 남에게서 똑같은 빛을 보고 그 것을 알아보게 되면 그쪽으로 움직이면서 남이 가진 것을 서로 받아들인 다네. 그 결과 사랑amor 또는 우정amicitia 타오르기 시작 하지. 이 두 단어는 '사랑하다amare' 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기에 하는 말일세. '사랑한다' 함은 다름 아니라 사랑의 대상을 필요나 이익을 떠나 자진하여 좋아하는 것을 말한다네. 그렇지만 자네가 특별히 이익을 추구하지 않더라도 우정에서는 이익이 많이 생기 게 마련이네."

 

진정한 우정을 찾아라

학창 시절에 만났던 친구들과는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도 변치 않는 우정으로 남는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서 직장, 동호 회, SNS 등에서 만난 사람들과 진정한 우정을 맺기는 쉽지가 않다. 그 이유는 우리가 지나치게 바쁘고, 복잡하고, 산만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은 진정한 친구를 사귈 만큼의 여유가 없다. 하지만 세상을 살다 보면 나를 나보다 더 잘 아는, 혼자보다는 함께하는 것이 훨씬 나은 그런 친구가 필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친구를 '2의 자아'라고 말한다. 아무리 행복하더라도 그것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친구가 없다면 외로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내 삶이 외로울 때 외면하지 않고 지해 주는 사람, 내가 더 이상 꿈을 믿지 않을 때 그 꿈의 문을 닫지 말라고 말해 주는 사람, 아무것도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마음을 편히 가지라고 말해 주는 사람, 그가 바로 우리의 진정한 친구다.

 

관계

관계를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들

레이먼드 카버 「대성당」

 

 

화자인 ''는 아내의 오랜 친구인 앞을 볼 수 없는 맹인 로버트가 하룻밤을 묵기 위해 찾아온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10 년 전 아내는 로버트에게 사례연구, 보고서 같은 것들을 읽어 주는 일을 했었다. 아내는 그 일을 그만둔 이후로도 지금까지 로버트와 서로 말을 녹음한 테이프를 우편으로 주고받으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로버트는 아내의 후임 이었던 뷰라라는 이름의 여성과 결혼했지만, 뷰라가 암으로 사망하고 로버트는 혼자 살고 있었다.

 

서로의 벽을 허무는 공감의 힘

먼저 타자와 생각이 교차하는 지점을 경험할 수 없다면 진정한 대화와 소통은 이루어질 수 없다. 다시 말해 공감하려면 먼저 소통하려는 의지가 있고, 그 의지를 상대방에게 인식시켜야 한다.

우리는 타인을 만날 때, 스스로가 만든 틀에 따라 상대방을 이해한다. 다시 말하면 내가 생각하는 상대방과 상대방이 생각하는 내가 만나는 것이다. 서로 친밀해지려면 생각이나 감정에서 상대방과의 교차점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 교차 점이 바로 '공감'이다. 공감은 만남의 온도를 높이는 방법이다. 공감은 상대방의 생각과 경험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며, 상대방과 하나가 되었다고 느끼는 감정이다.

 

공감이란 상상력을 통해 타인의 몸속으로 들어가 타인이 처한 상황과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공감은 상상력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상상력에 힘입어 타인의 입장을 공감할 때, 그 둘의 관계는 더욱 두터워진다.

공감은 감정이나 낭만에 흔들리지 않는다. 공감은 타인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이라는 경계를 벗어나 친밀한 관계로 이 끄는 힘이다. 누군가에게 공감한다는 것은 지금 눈앞에 있는 결함 투성이의 한 인간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공감은 진 실한 마음으로 그렇게 할 때, 변화의 힘이 생긴다. 나와 타자 사이에 기쁨이나 친밀감이 오가는 마법 같은 관계가 바로 공감이다.

 

사실 우리는 타자와 인생이라는 배를 타고 함께 여행 중이다. 공감은 함께 여행하는 타자의 지독한 외로움을 덜어줄 수 있다. 인생이 필연적으로 타인과 상호 의존적 관계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면, 공감은 나와 타자 사이의 문덕을 넘어서 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다. 타자가 무엇을 생각하든, 무엇을 느끼든, 함께 나눌 수 있는 방식이므로 공감의 힘은 강력하 다. 다만 천천히 그리고 스미듯이 다가가는 태도가 필요하다.

 

공감은 타자의 마음을 모방하는 것

처음 만나 어색한 사이일 때 공유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솔직하게 대화하고 공감한다면, 나와 타자 둘 모두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다시 말해 공감은 타자의 진정한 모습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이다. 또한 타자와 공감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내면도 깊이 바라보게 된다. 타자에게 공감하다가 억압되고 박탈당했던 자신의 상처와 마주하게 된다.

 

따라서 공감은 '미러링 효과'의 또 다른 측면으로 작용한다. 미러링 효과란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호감을 느끼는 사람의 언어나 동작을 거울 속에 비친 것처럼 똑같이 따라 하는 행위를 말한다.

공감은 타자의 마음을 모방하는 것이다. 상대의 말투, 표정, 몸짓이나 손짓을 따라 하면서 공감을 형성하는 것이다. 특별히 우리는 사랑에 빠져 있을 때나 누군가를 좋아할 때 서로 많이 닮아간다. 공감은 나와 타자의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로, 서로 마음이 통한다고 느끼게 한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이끌어가고 싶어 한다. 다시 말해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로 살고자 한다. 하지 만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으며 혼자일 수도 없다. 어떤 방식으로든 타인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특히 ''라는 존재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그 의미가 있을 뿐이다. 우리가 타인과 맺는 관계는 내가 타인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타인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달려 있다. 누군가와 진정한 만남을 이야기할 때 '공감'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

 

 

무엇이 우리에게 행복을 안겨 주는가

 

’인간은 세상의 슬픔 바로 옆에서 그리고 흔히 자신의 화산 지대 위에 행복이라는 작은 정원들을 건설해 왔다. 현존에 대한 인식만을 원하는 시선으로 삶을 관찰하거나 또는 굴복하고 체념한 사람의 시선으로 보거나, 극복된 어려움을 기뻐 하는 시선으로 보거나 간에 그는 도처에서 모든 행복이 재앙 곁에서 싹텄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남긴 말이다. 니체는 인간의 모든 행복은 세상의 슬픔과 화산처럼 분출하는 온갖 재앙과 함께 존재한다고 말한다.

니체의 말처럼 우리의 인생은 양면성을 갖는다.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 기쁨과 슬픔, 사랑과 증오, 희망과 절 망, 성공과 실패 등 바람직한 모습과 그렇지 않은 모습으로 이루어져 있다. 삶 뒤에 언제나 죽음이 오고, 만남 후 에는 이별이 찾아오며, 기쁨과 슬픔 또는 희망과 절망이라는 감정들이 밀물과 썰물처럼 일어난다. 그래서 이러한 변화의 시기들이 우리 인생에 주는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모든 사람이 원하는 진정한 행복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삶이 늘 아름답지만은 않을지라도, 행복이라는 자신만의 작은 정원을 만든다면 살 만한 가치가 있 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여 어떻게 해야 내면적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그 답은 바로 '고전 문학'에 있다. 나는 고전 문학에서 우리가 처한 삶의 모습들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했다.

왜 고전 문학을 읽어야 하는가.

 

 

 

인간에게 사과나무나 떡갈나무처럼 빨리 성숙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봄을 서둘러 여름으로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가 재능을 발휘할 여건이 성숙하지 않았다면

그것을 대체할 현실은 무언인가?

자포자기하고 보잘것없는 현실에 매달려서는 안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Book report after reading]

이 책은 짧은 시간을 투자해서 28가지의 고전문학에 대한 깊은 향은 아니더라도 옅은 향기를 맡을 수 있다는 이점이 있는 것 같다. 그 각각의 고전속에 담긴 아포리즘은 우리 삶을 살아 가는데 큰 힘과 해결책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책 제목과 같이 나는 어떻게 행복 할 수 있는가?’를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책을 읽었습니다. 작가는 "행복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것', '우리가 생각하는 태도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그게 바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해답입니다."

참된 행복은 부와 권력, 명예처럼 나타났다가 곧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상태에 있다.” 라고 말합니다.

 

후기 스토아학파의 철학자인 에픽테토스는 사람들을 심란하게 하는 것은 그 일 자체가 아니라. 그 일에 대한 그들의 믿음' 이라고 말한다. 원래 세상에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다. 단지 우리의 믿음 즉. 생각이 그것을 결정할 뿐이다. 우리는 '만일 그때 그런 일을 겪지 않았더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을 수시로 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일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믿음이다.

 

원효대사의 일체유심소조(一切唯心所造)가 저절로 떠올랐습니다. 책속에서 말하는게 이것과 일맥상통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결국 세상의 모든 것은 나의 마음 상태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야 할 것 같습니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자신이 몰입할 수 있는 것을 찾아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전 생애를 간절함으로 가득 채워서 살아간다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난 어떨까? 지금의 나는 참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믿기 때문에 행복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24월부터 새벽 05시경 기상을 해서 책을 읽거나 영어 공부를 하고 있는데 회사에서 받았던 스트레스를 책과 공부를 통해서 해소시킨다는 생각이 듭니다. 책에서 말하는 짧은 시간 몰입의 과정이 제게 마음의 평화를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 자신이 원해서 하는 일련의 행위들이 카르페 디엠을 실천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현재의 삶에 집중하고 그 현재를 즐기고 그 순간에 충실한 지금의 제 삶이 행복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방해받지 않는 자유에서 온다고 했는데 기존에 돈을 탐하고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진정한 자유인이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책에서 말하는 내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하는 것을 어느정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행복 다음으로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사랑의 정의 사랑은 감정이 아닌 기술이라는 말에 100% 공감이 갑니다.

 

1. '어떻게 하면 상대방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소극적 사랑을 중요시하지 말고 자신이 적극적인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 - 사랑할 줄 아는 능력

2. 사랑의 문제는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능력'의 문제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3. 사랑을 '하게 되는' 최초의 경험과 사랑하고 '있는' 지속적 상태, 혹은 좀 더 분명하게 말한다면 사랑에 '머물러' 있는 상태를 혼동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상대방은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항상 내게 줄 수 있는 의무가 있다고 한결같이 생각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말 것

 

사랑이 힘든 이유는? 사랑은 내가 필요로 한 것을 상대방이 기꺼이 내어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함. 이런 사랑은 자신을 괴롭힐 수 있고, 불행에 빠뜨릴 수도 있다. 베르테르처럼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받지 못하는 맹목적인 사랑이 위험한 까닭이다.

                                                                                        

헤르만 헤세는 사랑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사랑은 우리가 고통과 인내하는 과정 속에서 얼마나 강할 수 있는가를 우리에게 보여 주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랑이란 꽃과 흙의 관계처럼 묵묵히 모든 것을 받아 준다. 흙은 꽃을 피우지만, 흙은 꽃에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다.

그저 꽃이 아름답게 피고 자라는 데만 묵묵히 밑거름이 되어 줄 뿐이다. 또 꽃잎이 떨어지면 흙은 말없이 받아 준다. 서로 에게 맞는 대상이 되기 위해 꽃은 흙의 성질을 받아 주고 흙 또한 꽃이 피는 과정을 지켜보며 양분을 제공한다. 길들이고 받아 주고 또 길들여진다. 그리하여 '사랑'이라는 결실을 맺는다.'

몇번을 읽어도 이 글이 너무나 좋네요. 바라기 보다는 내가 먼저 베풀수 있는게 사랑인 것 같아요. 선불의 법칙! 바라지 말고 먼저 주어라..

 

책을 통해서 행복과 사랑에 대한 깊은 고찰을 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 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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