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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요약

[곁에 두고 읽는 니체 ]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니체의 말_사이토 다카시_홍익출판_Summary요약_리북

by 림을위하여 2022.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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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곁에 두고 읽는 니체

 

        부제: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니체의 말

        저자: 사이토 다카시

        출판: 홍익출판

 

 

오늘 제가 소개 시켜드릴 책은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니체의 말이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는 곁에 두고 읽는 니체라는 책입니다. 저자는 사이토 다카시 입니다.

니체가 저술한 책들을 인용하여 니체의 사상을 알 수 있게 해 주었고 저자의 경험담을 결합하여 더 쉽게 이해하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목과 같이 삶을 살아가면서 꼭 머리맡에 함께 두고 살아가야 할 삶의 지침서 같습니다. 죽기전에 꼭 읽어봐야 할 인생 명언이며 삶의 나침반이 될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읽어본 책 중 가장 인상이 깊은 아포리즘이 될 것 같습니다.

 

 

저자는 1960년 시즈오카 현 출생. 1985년 도쿄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뒤 동대학원에서 교육학 박사 과정을 밟으며 교육학, 신체론, 커뮤니케이션론을 공부했다. 『신체감각을 되찾다』로 산체학예상을 수상했으며, 250만 부 이상 판매된 『소리 내어 읽고 싶은 일본어』로 마이니치 출판문화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어휘력이 교양이다』, 『어른의 어휘력 노트』 등 지식과 실용을 결합한 스타일의 베스트셀러를 다수 집필해 일본 현지 발행 부수만 1,000만 부를 넘는다. 현재 메이지대학 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NHK E텔레비전 〈일본어로 놀자〉 종합 지도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 『혼자 있는 시간의 힘』, 『잡담이 능력이다』,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 『내가 공부하는 이유』 외 다수가 있다. 수백만 독자에게 사랑받고 있는 사이토 다카시는 50대를 보다 당당하게, 의미 있게 살아갈 방법에 대해 성찰해왔으며, 현재 그 스스로 오로지 자신에게 집중하며 평안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현대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는 1844년 당신 프로이센이었던 작센 주뢰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전통적인 서구 종교와 윤리 도덕, 그리고 근대 철학 사상의 바탕에 있는 개념들을 새롭게 규명하고

정립하는 데 온 생애를 바친 인물로, 그가 살았던 시대는 물론이고 오늘날까지도 신학, 철학, 심리학, 문학 등 수많은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웅변은 20세기 이후 지식인들의 중요한 구호가 될 만큼 현대 철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인문적 입장에서 삶의 철학을 설명하려고 노력한 사상가였다.

 니체는 명석한 두뇌와 탁월한 통찰력을 지닌 철학자였음에도 살아 있는 동안 일반 대중은 물론이고 학계로부터 도 철저히 외면당했다 또 종교계와 윤지주의자들로부터 사회를 타락시킨다는 악의적인 비난에 시달리며 평생 외롭고 고단한 삶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는 사후 유럽 철학과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오늘날에는 19세기를 살았던 철학자 중 가장 위대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20세기 이후 지식인들은 니체가 프로이트나 마르크스와 함께 근대 철학을 뛰어넘은 위대한 사상가라는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가 진정 앞장서서 비판한 것은 19세기까지 서구사회를 지배하던 기독교적 도덕률과 그것을 바탕으로 사회를 압도하는 내세를 향한 절대 가치였다. 그러한 것들이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라 허상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에 니체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며 기회 있을 때마다 독하게 비판했던 것이다.

 니체의 대표적 저작물들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 비극 시대의 철학 (1870), 비극의 탄 (1872), 반시대적 고찰  (1873),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878),방랑자와 그 그림자  (1880), 아침놀  (1881), 즐거운 학문 (1882),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883~1885), 바그너의 경우 (1888), 도덕의 계보 (1887), 선악의 저편 (1886), 우상의 황혼 (1888), 이 사람을 보라 (1888),

 

 

생명은 타오르는 불꽃이다.

 니체의 철학은 단순히 ', 옛날에 배운 적이 있어. 괜찮았어!'라고 말하고 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가령 '옛날에는 목욕을 하면 기분이 아주 좋아 자주 했는데, 요즘은 웬만해선 목욕을 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나 비위생적이라며 멀리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목욕을 하듯 니체의 사상도 일상 속에서 습관처럼 몸에 배도록 해야 한다.

 

니체만큼 보통 사람들의 생활에 날마다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철학을 말한 사람도 없다. 헤겔의 철학 이론은 학문적인 지식과 사상을 통합하는 것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 다소 어렵게 다가온다. 칸트는 인간 이상의 구조를 알아내기 위한 치밀한 통찰에 집중했기 때문에 실생활에서 순발력 있게 활용하기엔 너무 장엄하다.

 기독교나 불교가 가르치는 진리는 마음에 새겨 평생에 좌표를 삼기에는 좋지만 일상생활에서 행동에 지침으로 삼기에는 다소 어려운 거대 담론이다. 이 종교들은 자기 반성적인 가르침에 기초를 두고 있어 세상을 살아가는 실제적인 가치와는 조금 거리가 있다.

 현대인들은 누구나 정신없이 바쁜 생활을 반복하고 있다. 곳곳에서 높다란 장병과 난관을 만나고 시시때때로 온갖 형태의 어려움에 봉착 하면서 세월의 무게에 대책없이 휘둘리기도 한다. 바로 그럴 때 니체를 만나기 바란다.

 

 니체를 알기 위해 그가 펼쳤던 철학 이론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 전체적인 이미지가 그려지지 않아도 무방하다. 그저 몇 개의 아포리즘을 좌우명으로 삼아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이 말은 내게 보약과도 같다'고 생각되는 말을 그냥 외워 두자.

 니체는 사람들이 상식이나 관습을 아무 의심도 하지 않고 무조건 당연하다고 여기며 생각을 멈춰버리는 태도에 항상 의문을 제기 했다.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다르게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궁리하며 계속 기존의 것들과는 다른 답을 찾았는데, 이런 그는 '반역의 사고를 하는 제안자'라고 할 수 있다.

 

 

Part1 한 발의 화살이 되어라.

Chapter01  내일을 향한 화살

누구나 자기 미래의 꿈에 계속 또 다른 꿈을 더해나가는 적극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현재의 작은 성취에 만족하거나 소소한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다음에 이어질지 모를 장벽을 거정하며 미래를 향한 발걸음을 멈춰서는 안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내일을 향해 날아가는 한 발의 화살

 확고한 비전을 세워야 마음속에 잠들어 있는 의욕을 일깨울 수 있다. 흐리멍텅한 비전으로는 타인을 감동시키기는커녕 자기 자신조차 움직일 수 없다. 목표한 바를 이뤄내기 위해서는 집요하고 뜨거운 열정이 뒤따라야 하고, 이를 지탱하는 치열한 긴장감을 유지해야 한다.

 현재보다 퇴보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성장하고 발전하면서 지금보다 더 나은 나를 만드는 것이 모든 이의 꿈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자기 자신에게 확실한 임무(Mission)를 부여하고 뜨거운 열정(Passion)으로 가슴속 욕망을 일깨우며, 그로 인해 항상 팽팽한 긴장감(High tension)을 느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 모든 문장을 하나의 단어로 압축한다면 향상심(向上心)’이다. 향상심을 가진 이가 바로 니체가 말하는 초인을 닮은 사람이고, 세상이라는 들판에서 자기만의 깃발을 드높이는 사람이다.

 

삶에 온 힘을 쏟는다는 것

 아무리 탁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향상심을 갖고 돌진하는 것을 멈춰버리는 순간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만큼 초인이 되는 것에는 거리가 멀어진다.

 니체는 흐지부지하게 살아가는 인생을 제일 싫어했다. '자기 인생에 온 힘을 쏟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것'이 최고의 삶이라고 말했다. 한 발의 화살이라도 전심전력 최선을 다해서 쏘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니체는 동경하는 것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은 끊임없이 또 다른 동경을 끌어당긴다고 말했는데, 동경은 자기 자신과 별개의 것이 아니다.

 

Chapter02 자화 자찬의 힘

 

자기 자신을 칭찬한다는 것

 니체는 1888년에 쓴 저서 <이 사람을 보라>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책으로 인류에게 최대의 선물을 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책'은 니체의 역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다.

이 멘트만 보아도 얼마나 대단한 자신감인지, 오만하리 만치 자화자찬을 하는 니체의 자신감 있는 태도가 느껴진다.

 보통 사람이 이런 식으로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랑이라고 받아들이며 눈살을 찌푸린다. 아무리 유명 작가라도 자신의 작품을 '졸저'라고 낮추며 머리를 조아리는 이유는 겸손이 미덕이라는 통념 때문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 공들여 쓴 자기 작품을 '변변치 않다'며 겸양을 떠는 모습이 때로는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변명으로 들릴 때가 있다. 타인에게 공격받기 싫어서, 혹은 나중에 있을지 모르는 주변의 실망에 대비하기 위해 스스로 한 발짝 물러나 자신을 실제보다 한참 낮춰버리는 것이다. 나는 그런 태도가 공정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회피하려는 자기방어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니체에게 '나는 이 책으로 인류에게 최대의 선물을 했다'는 자화자찬은 결코 근거나 없는, 안일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렇게 썼다.

 

 먼저 대담하게 자신을 믿는 것이 좋다. 그대들 자신과 마음을 믿는 것이 좋다. 자신을 믿지 않는 자의 말은 언제나 거짓이 된다.

 

 니체는 그만큼 자신의 능력을 신뢰했고, 언젠가는 사람들이 자신의 철학을 이해해줄 것으로 믿었다. 비록 당대는 아니더라도

그가 죽고 나서 곧바로 시작된 20세기 이후 그가 믿었던 것들이 세상에서 실현되었으니 그의 말이 허무맹랑한 것은 아니었다.

 

 니체는 자기 자신을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부터 세상의 난관을 돌파하는 힘이 나온다고 말했다 자신을 왜곡해서 보지 않고 조금 멀리 떨어져서 바라봤을 때 단순히 '자랑'이 아닌 자기에 대한 적극적인 사랑이 있을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이 사람을 보라>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기 자신을 하찮은 사람으로 깎아내리지 마라. 그런 태도는 자신의 행동과 사고를 꽁꽁 옭아매게 한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라. 지금까지 살면서 아직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을지라도 자신을 항상 존귀한 인간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 결코 악행을 저지르지 않고 누구로부터 지탄받을 일도 저지르지 않는다. 그런 태도가 미래를 꿈꾸는 데 있어 가장 강력한 힘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마라..

 

 실력도 안되는데 무턱대고 스스로에게 높은 점수를 주라는 말이 아니다. 당당하게 높은 점수를 줄 만큼 자기 자신을 더 채우고, 더 넓히라는 충고다. 그렇게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밤낮으로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자기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이다.

 

Chapter03  분노의 불꽃으로부터 도망쳐라

 나를 풍요롭게 해줄 대상을 찾지 말고, 나 스스로가 풍요로운 사람이 되려고 항상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자기의 능력을 높이는 최선의 방법이자 풍요로운 인생을 만드는 지름길이다.  <즐거운 학문>

 

삶을 지탱하는 에너지를 얻는 법

 

 삶을 지탱하는 에너지는 자기 자신 안에서 찾아야한다. 그렇기에 니체는 지금의 자기가 싫기 때문에 전혀 다른 인간이 되고 싶다면서 현재의 자신을 경멸하거나 스스로에게 반발하는 태도를 가장 경계했다. 니체가 자신의 숱한 저서들 중에서 가장 개인적인 책이라고 말하는 <즐거운 학문>에 이런 말이 있다.

 

똑같은 것을 대해도 어떤 사람은 거기서 많은 것을 깨닫고 얻어내지만, 어떤 사람은 한두 가지밖에 얻지 못한다. 사람들은 이를 능력 차이라고 말하는데, 사실 우리는 어떤 대상으로부터 무엇을 얻어내는 게 아니라 그것에 의해 촉발된 자기 안의 무엇인가를 뽑아내는 것이다. 그러니 나를 풍요롭게 해줄 대상을 찾지 말고, 나 스스로가 풍요로운 사람이 되려고 항상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자기의 능력을 높이는 최선의 방법이자 풍요로운 인생을 만드는 지름길이다.

 

 지금은 스스로의 생각에 자신이 보잘것없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해도 쓸데없는 곳에 신경 쓰며 맹목적으로 돌진하지 말고, 부질없는 분노나 질투에 휘둘리 지도 말고, 있는 그 자리에서 더 나은 나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산골짜기를 헤매는 맹수가 되지 않는 길임을 잊지 말라는 충고다.

 

Chapter04 자기 삶에 박수를 쳐라

 

자기 자신을 정확히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라.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사랑을 사랑으로 느낄 수 없다. 사랑하기 위해, 사랑받기 위해, 스스로를 정확히 아는 것부터 시작하라. 자신조차 모르면서 상대를 알기 란 불가능한 일이다. <아침놀>

 

Chapter05 들판의 무소처럼 혼자 살아라

 

함께 침묵하는 것은 멋진 일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멋진 일은 함께 웃는 것이다. 두 사람 이상이 함께 똑같은 일을 경험하고, 감동하며, 울고 웃으면서 같은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너무도 멋진 일이다.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진정한 친구의 조건

 니체는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더 높은 곳으로 향하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만이 진정한 친구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할 만큼

인간관계에 까다로운 기준을 갖고 있었다. 친구 란 서로 믿는 두 사람이 초인을 목표로 하는 한 발의 화살이 되었을 때 비로소 성립하는 관계라는 게 니체의 생각이었다. 간단히 말하면 '나의 향상심을 높여주지 못하는 인간과는 사귈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우리는 친구를 얻는 행복을 칭송한다. 사람들은 자신보다 우수한, 혹은 동등한 친구와 가깝게 지내야 한다고 말한다. 붓다도 이런 말에 동의했지만, 만약 그런 친구를 얻을 수 없다면 무소의 뿔처럼 혼자 살라고 말했다." <붓다의 가르침과 팔정도>

 '무소의 뿔'은 최초로 성립된 불경인 <수타니파타>에 나오는 말로, 무소는 코뿔소를 뜻한다. 코뿔소는 원래 무리를 짓지 않고 홀로 살아가는 습성이 있다. 고대의 수도승들도 걸식을 하며 홀로 수행하여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했다. 이처럼 깨달음의 길은 혼자서 가는 길이기에 무소의 뿔이 한곳을 향하듯이 혼자 살라는 충고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 살라는 말은 독립된 이간이 되라는 뜻인데, 이는 스스로 판단하고 자신의 행동에 끝까지 책임지는 인간이 되라고 했던 니체의 말과 동어반복처럼 들린다.

 

Chapter06 더 크게 기뻐하라

 작은 일에도 최대한 기뻐하라.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덩달아 기뻐할 정도로 즐겁게 살아라. 기뻐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몸의 면역력도 강화된다. 기뻐하면 마음을 어지럽히는 잡념을 잊을 수 있고, 타인에 대한 혐오감이나 증오심도 옅어 진다.

부끄러워하거나 참지 말고 마음이 이끄는 대로 마치 어린아이들처럼 싱글벙글 웃어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지금보다 더 즐겁게 살아갈 방법을 알게 된다면, 타인에게 고통을 주면서 기뻐하는 기분 따위는 자기 자신 안에서 깔끔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타인에게 고통이 되는 것을 생각해내는 일도 아예 사라질 것이다.

 

Chapter07 향상심이 없으면 죽은 인간이다.

 

나는 그대가 희망과 사랑을 결코 버리지 않는 사람이기를, 그대의 영혼 속에 깃들어 잇는 영웅을 절대 버리지 않기를,

그대가 희망하는 사람의 최고봉을 계속 성스러운 곳으로 여기며 똑바로 응시하기를 바란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Chapter08 그대의 고독 속으로 도피하라

 

사람들은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 누군가를 간절히 원한다. 자기를 상대해줄 친구를 찾고, 막연한 안도감을 느끼기 위해 누군가에게 의지한다. 고독하기 때문이다. 왜 고독할까? 자신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순간적인 기쁨을 나누는 친구가 아무리 많아도 고독으로 인한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인가에 온 힘을 쏟아야 한다. 자신의 다리로 높은 곳을 향해 걸으면 고통이 따르지만, 그것은 마음의 근육을 튼튼하게 만드는 고통이다.. <차라투스트라는 말했다>

 

니체는 고독의 힘을 믿었다.

 

살면서 때로는 멀리 보는 눈이 필요할 때가 있다. 친한 친구들과 멀리 떨어져서 그들을 생각하면 함께 있을 때보다 훨씬 더 그립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이처럼 어떤 대상과 얼마쯤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많은 것들이 생가보다 훨씬 더 소중하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침놀>

 

 마음의 근육이 단단한 사람은 작은 인간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혼자 있어도 외로움에 떠 밀려다니지 않는다. 그러니 삶이 고달프다면 마음껏 고독의 심연으로 도피하라.        

 

 

Part2 이것이 삶이던가, 그렇다면 다시 한번

 

Chapter01 지금 이야말로 분발할 때다

 

모든 일의 시작은 위험한 법이지만, 무슨 일을 막론하고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지금 이 순간 이야말로 그대의 승부처다.

 

Chapter02 자기 자신을 깨뜨려라

 

뱀이 허물을 벗지 못하면 끝내 죽고 말듯이 인간도 낡은 사고의 허물에 갇히면 성장은커녕 안으로부터 썩기 시작해서 마침내 죽고만다. 따라서 인간은 항상 새롭게 살아기기 위해 사고의 신진대사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아침놀>

 

진정한 창조, 발견의 기쁨

 창조성이란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자신의 눈으로 거기서 나름의 의미를 발견하는 일이다.

 

작은 행복에 안주하는 삶       

 자신을 깨뜨리려고 덤비는 것들과 당당히 맞서서 피를 흘리고, 강한 상대들을 피하지 않고 차례차례 만나 그 타격을 온몸에 받으며 깨달아가는 것이 진정한 성장의 의미일 것이다.             

 

Chapter03 인생의 목적은 끊임없는 전진이다          

 용기는 죽음을 죽인다. 그때 용기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삶이던가,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         

니체의 영겁회귀 사상에는 현재의 삶에 실수가 있어도, 실패를 해도 여전히 주어진 운명에 당당히 맞서라는 격려가 녹아들어 있다. 어떠한 곤경에도 자신의 삶을 열심히, 기어이 살아내는 불굴의 의지는 인간이 신에게 내놓을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다. 그렇게 시시포스는 자신의 운명을 묵묵히 짊어짐으로써 결과의 무의미함을 절차의 충실함으로 전환시켰던 것이다.

 

 이 세상에 행복한 운명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살아가는 인간은 없다. 따라서 마냥 푸념을 늘어놓거나 타인을 비방하거나 상처 주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찾으려 한다면, 그것은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함정에 빠지는 것과 같다.

 

인생의 목적은 끊임없는 전진이다. 먼 곳으로 항해하는 배가 풍파 없이 조용히 갈 수만은 없다. 풍파는 늘 전진하는 사람의 벗이다.

 하지만 아무리 이렇게 되뇌며 몇 번이나 자신을 다잡아도 시시포스의 신화에서처럼 어떤 일을 영원히 반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대개의 사람들은 이쯤에서 포기하고 다시는 같은 일에 도전하고 싶어 지지 않기 마련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시시포스처럼 똑같은 일이 무한 반복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설사 똑같은 패턴이 반복된다고 해도 조금씩 다르게 보이는 것이 우리 삶이다. 그렇기에 '다른 결과가 나올지 모르니 다시 한번 해보자!'고 결심하고 행동한다면 다른 미래가 찾아올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재에 몰입해야 할 이유다.

 별다른 생각 없이 멍하니 보내 버린 시간은 그저 바람이 스쳐가듯 막연히 지나가 버린다. 반면 어떤 일에 철저히 몰두한 적이 있는 사람은, 그 순간의 시간 감각을 기억한다. 온 마음을 집중해서 '이것밖에 없다'며 반복 작업에 쏟아 부은 시간은 내면에 깊이 파고든 감각으로 남기 때문이다.

 이것이 '침잠 감각'이다. 이런 감각을 가지고 일에 깊이 빠져들면 외견만 보는 사람들한테는 절대 보이지 않는 세세한 것들이 눈에 들어오게 도니다. 몰입의 기쁨은 혼자 힘으로 지금 자기 앞에 놓인 현재라는 시간에 모든 것을 거는 사람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즐거움임을 잊지 마라.

 

지금의 삶을 다시 한 번 완전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아라.

 

당신은 지금 그렇게 살고 있는가?

 

Chapter04 나의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나 자신에게 던지는 '?'라는 물음에 분명하게 답을 내놓을 수 있다면 그 다음은 아주 간단해 진다. 어떻게 해야 할지 금세 알 수 있기 때문에 타인을 흉내 내면서 헛되이 세월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 이미 나의 길이 명료하게 보이기에 이제 남은 일은 그 길을 걸어가는 것뿐이다. <우상의 황혼>

 

처음부터 뛰어오를 생각은 버려라.

 니체는 최종적으로는 더 나은 정신으로 나아가야 하지만 처음부터 새처럼 날아오르라고 하지 않는다. 우선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를 묵묵히 감당하면서 낙타처럼 사막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렇게 걷고 또 걷는 단계를 거쳐야만 비로소 새처럼 비상할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스스로 '?'라는 질문에 분명하게 답을 제시할 수 있는가? 자신이 지금 왜 이곳에 있고, 내일은 왜 그곳으로 가려고 하는지 분명히 아는 사람만이 성장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앞길을 가로막는 악조건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가타 농법'이라는 작물 재배법이 있다. 이를테면 토마토를 기르면서 일부러 물을 주지 않는 재배 방식을 말한다. 토마토에게 물이 없는 환경은 가혹하지만, 그런 환경에서 자란 토마토는 놀랄 만큼 달고 풍부한 맛이 된다. 일부러 최악의 환경을 만들어놓고, 작물로 하여금 거기에 적응하도록 만들면 의외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역발상의 산물인 셈이다.

 니체는 우리에게 척박한 토양을 이겨내는 토마토가 되라고 말한다. 어떤 일을 시작했으나 중도에 이런저런 문제에 부딪쳐 더 이상 해나갈 용기가 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수록 '밑바닥까지 떨어져보라'는 게 니체의 메시지다. 누구든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힘차게 뛰어오를 때 더 큰 성취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몇 번이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용기

프랑스 화가 모리스 위트릴로, 청소년 시절부터 이미 알코올 의존증이 심해서 정신병원을 숱하게 들락거린 그는 치료의 일환으로 그림을 배웠지만,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20대 후반까지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지독한 알코올 중독자로 살았던 그는 30대로 접어든 뒤 비로소 화가로서 전성기를 맞이한다. 예술계에서 고립된 채 오직 화가였던 어머니에게만 그림을 배워 이뤄낸 성공이었다.

결코 행복하지 않았던 유년기부터 서른을 넘길 때까지의 뼛속 깊이 파고드는 고독함이 없었다면 그에게 걸작은커녕 화가로서의 성공도 없었을 것이다. 부정적인 성장 과정이나 청춘 시절을 긍정적 창조 행위로 치환한 것은 스스로 어두운 과거를 밝은 세상으로 끌어낸 위대한 반전이라 할 수 있다.

 

하늘에 닿을 듯이 키가 큰 나무들에게 거친 바람과 악천후가 없었다면 그런 성장이 가능했을까? 인생에는 거친 폭우와 강렬한 햇살, 태풍과 천둥 같은 온갖 악과 독이 존재한다. 그런 것들이 가급적이면 없는 게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 탐욕, 폭력, 증오, 질투, 아집, 불신, 냉담, 그 밖에 모든 악조건과 장애물들….  이러한 악과 독이 존재하기에 우리는 그것들을 극복할 기회와 힘을 얻고, 용기를 내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만큼 강하게 단련되는 것이다. <즐거운 학문>

 

흑이 백이 되고 어둠이 빛이 되는 위대한 전환의 열쇠는 자기 앞에 놓인 세상을, 시간을, 사람을 긍정의 눈으로 바라보는 데에서 나온다는 니체의 말은 오늘의 내 삶을 에워싼 모든 것을 긍정의 눈으로 보는 습관을 만들어 주었다.

 

 

Part3 몸의 소리를 들어라.

 

Chapter01 아이처럼 춤을 추어라

 

한 번도 춤추지 않았던 날은 잃어버린 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하나의 큰 웃음도 불러오지 못하는 진리는 모두 가짜라고 불러도 좋다. <차라 ~ 말했다.>

 

 니체의 철학 세계는 동양의 정신과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 니체가 말하는 '춤을 추는 몸'은 역동적인 명상을 통해 삶의 즐거움을 느끼는 동양적 사유 방법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니체는 에너지가 가득찬 상태를 '춤을 춘다'고 표현했다.

 

 

Chapter02 건강한 몸의 소리를 들어라.

 

그대의 사상과 감수성 뒤에는 강력한 지배자가 있다. 그대가 모르는 그 현자의 이름은 '본래의 나'. 그대의 육체 안에 그가 살고 있다. 그대의 육체가 바로 그 사람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몸은 인간 그 자체다

 장수하는 사람에게 건강의 비결이 무엇인지 물으면, 십중팔구는 이렇게 대답한다.

"좋아하는 것을 맘껏 먹고, 자고 싶을 때는 실컷 잔다."

이 말은 달리 말하면 '본래의 나'로부터 나오는 목소리를 열심히 듣는다는 것이다.

 동물은 항상 자기 몸의 소리에 따른다. 니체는 인간도 이성보다는 신체가 더 자신을 잘 이해한다고 보았고, 인간도 이성보다는 신체가 더 자신을 잘 이해한다고 보았고, 그렇기에 육체의 지혜를 더 믿고 따르라고 말했다.

 

몸의 소리를 듣다

19세기 후반의 유럽인들은 그리스도교의 배경 아래 '정신이야말로 인간 그 자체다. 따라서 육체는 최대한 멀리해야 하고, 육체의 욕구는 가능한 한 억제해야만 하는 것이다.' 라고 배웠다.

 그런 시대에 육체야말로 본래의 나이며, 정신은 그 부속물에 니나지 않는다는 니체의 논리는 급진적이다 못해 교리를 뒤집을 만큼 위한 문제 제기였다. 육체의 순결한 힘을 부정하는 그리스도교의 사고방식에 반기를 들었다는 부분에서 니체는 이단자 이상의 취급을 받았다.

육체는 하나의 거대한 이성이고, 하나의 의미로 받아들여진 다양성이다. 육체는 또한 평화이며 가축의 무리이자 양치기와 같다. 형제여, 그대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그대의 작은 이성은 몸의 도구이며 그대의 커라단 이성의 작은 도구이자 장난감이다. 이제 세계는 거대한 이성으로서의 육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의 복권을 받아들여야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Chapter03 세상을 큰 강처럼 품어라

 

그대는 원기둥의 모습이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원기둥은 높으면 높을수록 가늘어지고 아름다워지지만, 그 내부는 더욱 굳세어져서 무엇이라도 짊어질 수 있게 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좀스럽게 굴지 마라.

'좀스럽다'는 말은 사물이나 현상의 전체적인 그림을 보지 않고 오밀조밀한 것만 세세히 따지는 소심한 행위를 가르킨다. 누군가에게 '저 사람은 좀스럽다'고 할 경우, 그가 잘고 옹졸하다는 뜻이니 결코 듣기 좋은 말은 아니다.                                 

 

 니체는 우리가 이상적으로 삼아야 할 모습을 선연한 이미지로 제시한다. 일상 속에서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신호를 기다릴 때도 '원기둥처럼 선다'라는 이미지를 그려가며 서 있어 보자. 목표로 하는 이미지를 그리며 트레이닝을 하는 것 자체로 힘이 솟는 감각이 생겨나 더욱더 강한 사람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것이다.

 이런 이미지 트레이닝에 익숙한 사람은 살면서 부딪치는 난관을 타개해 나갈 힘을 지니고 있다.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는 긍정 이미지에 의해 항상 살아 있다는 감각이 솟구치고, 언제 어디서든 아이디어가 샘솟기 때문이다.

 특히 강물의 이미지를 품고서 일하는 사람은 기분을 전환하는 데도 능숙해서 웬만한 일에는 끄떡 도 하지 않는다. 아무리 자기와 성격이 맞지 않는 사람이 주위에 많이 있어도 늘 의연하다.

 

 

Chapter04 욕망의 우물에 덮개를 덮지 마라

욕망이 삶의 기쁨을 구가하는 일임에도 그것을 부정하는 그리스도교는 오히려 인간성을 파괴하는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욕망해야 삶의 감옥으로부터 해방된다.

중세 가톨릭은 신도들의 금기 사항으로 일곱 가지 죄의 근원을 꼽았다. 여기엔 교만, 인색, 질투, 분노, 음욕, 탐욕, 나태가 포함되는데 이런 행위들이 또 다른 죄를 불러일으켜 인간을 지옥으로 이끈다고 보았다. 니체가 반기를 든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그는 욕망 이야말로 삶이라는 감옥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가장 원초적 요소라고 보았기 때문에, 가톨릭의 금기사항을 인간성을 말살하는 억압이라고 주장했다.

 제대로 제어하기만 한다면 성을 포함해서 욕망하는 일 자체가 생명력의 원천이 된다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었다. '춤추는 몸'처럼 생명을 마음껏 연소시키는 일이 행복과 이어진다면, 중세 가톨릭이 고집하는 도덕률은 생명력의 바탕을 굳게 닫아버리는 것이 된다고 니체는 비판했다.

 창조도 성욕도 모두 적극적인 의욕이다.두 가지 모두 인간 삶의 근원이 되는 활력의 우물에서 길어내는 것이다. 그러니 욕망의 우물에 덮개를 덮지 말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Chapter05 대지와 호흡하라

천상의 것들은 신의 영역에 속하지만, 대지의 것들은 인간이 적극적으로 품어야 할 대상이다.

천상의 것들은 인간의 외부에 있지만 대지의 것들은 인간의 내부에 있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대지로부터 힘을 얻는다는 것

 

니체는 정신의 발전 단계를 낙타, 사자, 어린아이의 시기로 구분했다. 낙타의 시기는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수행하는 단계이고, 사자의 시기는 그 의무를 부정해도 되는, 그리하여 새로운 창조를 목표로 진정한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하는 시기이다.

 그런데 사자 역시 긴장된 상황 속에서 공격적으로 살아간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니체는 천진난만하게 놀고 망각하고 창조하는 어린아이의 시기가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최상의 시기라고 여긴다. 여기서 말하는 어린아이는 낙타와 사자의 단계를 확실하게 밟은 뒤에 창조성이 넘치는 정신의 단계를 지향하는 존재임과 동시에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천진한 어린아이의 이미지도 포함되어 있다.

 어린아이들은 어디를 가든 흙을 만지거나 맨땅을 기어 다니면서 온갖 종류의 곤충과 식물을 관찰하며 논다. 아이들은 대지에 생명의 고향이 있음을 교육받지 않고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대표작 <죄와벌>에서 , 라스코리니코프가 창녀 소냐의 자기희생적 정신에 충격을 받고, 자신이 고리대금업자 노파와 그 동생을 죽였음을 고백하자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사거리에 나가서 무릎을 꿇고, 당신이 상처를 준 대지에 입을 맞추세요. 그러고 나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향해, 사방에 대고 절을 하며 큰 소리로 '내가 죽였습니다.!'라고 말하세요."

 살인이 대지를 더럽히는 일이라는 소냐의 말에서,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온갖 허물을 보듬어주고 껴안아주는 대지의 위대함을 다시금 느낀다.

 불교의 순례 예법에 '오체투지'라는 게 있다. 신체의 다섯 부분인 양손과 양 무릎, 그리고 머리가 땅에 닿게 하는 절을 의미하는데, 먼저 양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땅을 짚어 전신을 던지듯 땅에 엎드린다. 그러고는 머리마저 지면에 닿도록 절을 한 뒤 다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승려나 순례자들은 성지로 향할 때 자벌레처럼 대지에 엎드린 후 다시 일어나는 이 동작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반복한다. 이렇게 대지에 닿는 행위를 통해 절대자와 말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은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가장 지극한 기도의 형태로 볼 수 있다.

 

대지는 어머니 같은 존재다.

니체는 향상심을 가지고 높은 곳을 향해 날아가는 한발의 화살이 되라고 말했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든 팔랑거리는 가벼움으로 무작정 비상하기만으 꿈꾸라고 권한 건 아니었다.

 대지와 사이좋게 지내기 위해서는 신체가 긴장하고 있으면 안 된다. 완전히 이완된 상태에서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힘이 모아지면, 대지가 전해주는 것을 자연스럽게 느껴라.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대지와 호흡하는 방법이었다.

 

 

Part4 꿀벌처럼 나누는 삶

 

 Chapter01 인생의 진짜 기쁨이 있는 곳

나는 너무나 많은 꿀을 모아버려서 이제 감당하기 힘들 정도다. 그러니 그대들 이여, 나의 꿀을 전부 가져가라. < ~ .>

 

교사의 진정한 역할

 프로이트는 원초적 충동에서 촉발되는 본능적 에너지와 욕망을 뜻하는 '리비도'가 사람을 자극하고 움직이게 한다면서 에너지 순환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이는 축적된 지혜도 에너지의 한 일종이기에 남아돌게 되면 반드시 방출해야 한다는 원리와 맞닿았다.

차라투스트라도 예외일 수 없었다. 그는 자기 머릿속에 축적된 지혜를 나눠주기 위해 많은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인터넷이 보급되기 전에는 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전문가들이 책을 출간함으로써 그 역할을 해냈지만, 이제는 일반인도 인터넷을 이용해서 얼마든지 자기를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물론 환영 받을 만하지만 과연 이러한 소통에 차라투스트라가 10년간 쌓은 깊이가 있을까?

 사람들은 일상의 생각을, 그게 무엇이든 사이트에 적어 넣는다. 거기엔 한순간의 침묵조차 없다. 단순한 '정보 교환'에는 니체가 말한 '축제로서의 배움'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Chapter02 행동하는 자만이

사람은 항상 껍질을 벗고 새로워져야 하고 항상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한층 새로운 자기를 만들기 위한 탈바꿈을 평생 동안 멈추지 마라 <즐거운 학문>

 

배움이라는 축제를 즐겨라

 예전에는 존경받는 사상가의 새 책이 출간되면 서점에 줄을 서면서까지 구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만큼 지식에 굶주리고, 정신을 기름지게 하는 자극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뜻이다.

 청소년기를 그런 갈망으로 보낸 청년들 중에는 나중에 학자가 아니라 경영자가 된 사람들도 많은데, 신기하게도 그들 중엔 누구보다 뛰어난 경영 능력을 발휘하여 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경우가 흔하다. 철학이나 사상 같은 인문 교양을 공부했기에 경영에 남다른 신념과 철학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런 일은 옛날 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 이제는 배우는 일이 즐겁다며 밥값을 아껴서라도 책을 사 보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런 현상은 이 시대의 교사들이 꿀벌처럼 풍부한 지식의 꿀을 학생들에게 전해주지 못하는 현실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받아들이는 쪽의 문제도 있다. 자기의 뇌에는 교양의 꿀 한 방울도 매우 큰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며 목말라 해야 하는데 요즘엔 그런 학생을 찾아보기 힘들다. 배우는 쪽에서 심드렁하면 아무리 열심히 가르치려 해도 열의가 사그라지기 때문이다.

 TV에서 예술이나 역사, 자연같이 깊이 있는 주제를 특집으로 방송하는 일이 잇다. TV라는 매체의 특징을 살려 양질의 지식을 압축하여 전해주지만, 정작 이를 봐주어야 할 시청자들은 별로 관심이 없다는 사실은 시청률로 드러난다.

 니체는 1880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배움을 통한 발견과 탐색의 기쁨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썼다.

 

배우고, 지식을 쌓고, 그것을 교양이나 지혜로 확장해 나가는 사람은 삶이 지겨울 틈이 없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전보다 한층 흥미로워지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것을 보고 들어도 사소한 데서 교훈을 찾아내고, 사고의 빈자리를 채울 정보를 얻어낸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의 삶은 더 많은 지식과 의미 있는 충만함으로 가득해진다.

 

공부할 수 있는 삶은 감사한 일이다.

중국의 농촌 마을의 가난한 아이들에 관한 비디오를 본적이 있습니다. 주인공 부진이라는 여자아이는 너무 가난해서 초등학교조차 갈 수가 없습니다. 아이도 어른처럼 일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는 현실이라서 부진은 매일 감자를 심고 키우는 일 뿐인 일상을 이어 갑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예전에 학교에서 받은 교과서조차 읽을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오지 마을에 처박혀 살아야 하는 문맹이 되었지만, 그래도 부진은 교과서를 버릴 수 없다고 하고 어른이 되면 반드시 학교 선생님이 될거라며 눈물과 웃음을 섞어가며 희망을 말합니다. 옆에 있는 부모는 학교에 보낼수 없다고 핀잔을 합니다.

 현실적으로 부진이 학교로 돌아갈 가망은 거의 없고 그러니 이 아이의 열망인 선생님이 되기도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무엇이 소녀로 하여금 그토록 공부를 갈망하게 했을까? 그것은 그 아이의 결핍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 참고서와 문제집이 넘쳐나고 TV나 인터넷이 나눠주는 정보도 봇물처럼 넘치는데, 또한 그 모든 것이 전부 공짜입니다. 이런 판국이니 아무리 고급한 지식이나 정보라도 고맙게 생각하며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전엔 이 어린 소녀처럼 학문에 목마른 사람들이 많았는데 지식 과잉의 시대가 되자 지식이 선물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태양빛처럼 아주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너무 쉽게 얻을 수 있게 되어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중국 소녀는 결핍 때문에 갖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과잉 때문에 오히려 멀리하는 현실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나는 지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내는 고귀한 선물로 생각하는 게 옳다고 본다. 이런 마음으로 공부를 하면 학문을 탐구하는 일은 기분좋은 축제가 된다..

 니체는 행동하는 자만이 배울 수 있다고 강조하며 자기 자신을 새롭게 하기 위해 행동하라며<즐거운 학문>에 이렇게 썼다.

 

사람은 항상 껍질을 벗고 새로워져야 하고 항상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한층 새로운 자기를 만들기 위한 탈바꿈을 평생 동안 멈추지 마라 <즐거운 학문>

 

 

 Chapter03 삶을 축제로 만드는 기술 

우리는 익숙한 것들을 너무 소홀히 여긴다. 어떤 사람들은 살기 위해 먹고, 정욕 때문에 아이를 낳는다고 말할 정도다.

그들은 현재보다 더 나은 멋진 삶은 여기가 아닌 어느 먼 세상에 있는 것처럼 말한다.

우리는 이제 현재의 삶을 확고히 지탱하고 있는 모든 것들에 흔들림 없는 믿음의 시선을 보내야 한다.

이런 태도만이 우리를 제대로 살게 만들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축제다.

어린아이들을 보라. 나이가 어릴수록 일상의 모든 일이 축제다. 아이들의 호기심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아이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나 귀에 들리는 것은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아무 제한 없이 관심을 쏟는다.

"이건 뭐야? 왜 이렇지? 누가 그랬지?"

 

 세상에서 가장 맑은 눈으로 주변 사물을 대하면서 천진난만하게 의문을 품는 아이들의 태도를 니체는 춤을 추는 것과 같다고 말했고, 이것이 바로 자기가 꿈꾸는 이상 그 자체라고 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어른이 되어감에 따라 이런 감각은 점차 옅어진다. 웬만해서는 감동도 없고 관심마저 없다. 어른들에게 삶을 축제로 만드는 기술을 되찾게 하려면 따로 재훈련이 필요할 정도로 신체 감각이 무뎌 지고 탁해졌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우리는 어린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많은 행동을 절제하고 금지한다. 함부로 말하고 행동했다 가는 자칫 이상한 사람 취급받기 십상이고 직장인이라면 '아직 어린애 티를 못 벗었다!'라며 괴짜 소리를 듣는다.

 어른스럽다는 말을 들으려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을 무심히 대해야 하고, 소소한 일상에서 기쁨을 찾는 일 역시 잊어야 한다. 하지만 니체는 이런 삶을 최악이라고 생각했다.

 축제라 해서 온통 시끌벅적하기만 할 필요는 없다. 시를 읊거나 오페라 아리아를 부르거나 하는 예술적 이벤트 역시 하나의 축제로,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고 행복하게 하나로 묶을 수 있다면 모든 것이 축제다.

 산다는 것 자체를 하나의 축제로 여기면, 우리의 삶은 목표가 아니라 과정이 더 중요해진다. 공부도, 사업도, 연애도, 과정을 즐기고 지금 이 시간의 기쁨을 최고 가치로 만든다면 원하는 결과는 당연히 따라온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이와는 반대로 생각한다.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에 현재가 지루하고 재미없다. 현재가 지겨운 사람에게 원하는 미래가 오지 않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바로 이것이 니체가 현재를 사랑하라고 말한 이유다.

니체는 <방랑자와 그 그림자>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익숙한 것들을 너무 소홀히 여긴다. 어떤 사람들은 살기 위해 먹고, 정욕 때문에 아이를 낳는다고 말할 정도다.

그들은 현재보다 더 나은 멋진 삶은 여기가 아닌 어느 먼 세상에 있는 것처럼 말한다.

우리는 이제 현재의 삶을 확고히 지탱하고 있는 모든 것들에 흔들림 없는 믿음의 시선을 보내야 한다.

이런 태도만이 우리를 제대로 살게 만들기 때문이다.

 

넘쳐흐르는 지혜는 선물이 된다.

 

일본 체조의 간판스타이자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도미타 히로유카 선수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는데, 그의 말에서도 축제 감각을 느낄수 있었다. 그가 언론으로부터 받는 질문은 몇 년이 지나도 항상 똑같았다고 한다.

"다음 올림픽도 금메달이 목표입니까?"

그러면 도미타 선수 역시 항상 똑같은 대답을 했다.

"일단 대표 선수가 되는 게 목표입니다. 올림픽 전에 세계 선수권대회가 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올림픽은 너무 먼 일이라 염두에 두지 않고, 현재에 충실할 뿐입니다."

그러면서 도미타 선수는 체조 기술 하나씩 익혀 나가는 훈련 과정이 올림픽에 나가서 메달을 따는 것보다 훨씬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처럼 단계별로 철저하게 습관화하여 연마하는 기술은 축제가 될 수 있다. 기술은 단순히 몸에 익힌 그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전수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기술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한 적은 없지만, 기술을 연마하는 것은 지혜가 과잉되었을 때 나눠야 한다는 니체의 생각과 맞닿아 있다. 가장 중요한 일은 전하지 않고 견딜 수 없다는 기분이다. 넘쳐 흐르는 지혜는 선물이 된다. 그것 이야말로 실로 인간다운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Chapter04 밝고 가벼운 기분으로 살아라

 

진부함이 먼지처럼 쌓이면

 나는 리더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참신함이라고 생각한다. 흔히 일을 할 때 중요한 것은 축적된 경험이나 능숙한 기술이라고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오래된 경험과 기술이 때로는 구태의연한 관습을 만들어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조직 전체를 한 발짝도 전진하지 못하게끔 발목을 잡을 때도 많다.

 

 니체는 사회인으로서 밝고 가벼운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필요성에 대해 <인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에서 이렇게 적었다.

 

창조적인 일을 하든 평범한 일을 하든, 항상 밝고 가벼운 기분으로 임해야 순조롭게 잘 풀린다. 그래야 사소한 제한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 자유로움이 생기기 때문이다. 평생 이런 마음을 지켜 나가면 그것 만으로도 많은 일을 이루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나 역시 신입 교사들처럼 항상 참신하고 경쾌한 마음으로 일하자고 다짐을 하곤 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돌아보니 마음에 굳은살이 생겨 단단히 응고되고 말았다. 이런 때 관계를 재조직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대표적으로 심리학에서 '역할 바꾸기'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교사가 학생이 되고 리더가 부하 직원이 되어보는 것이다.

참신한 아이디어를 구하기 위해 브레인스토밍을 사용할 수 있다.

 어떤 방식이 되었든, 시대를 앞서가는 리더가 되려면 끝없이 새로워지려는 마음가짐과 창의성을 위한 노력을 절대로 잃지 말아야 한다. 항상 경쾌한 마음을 지켜나가는 것만으로도 많은 일을 이루게 된다고 한 니체의 말은 새로운 길을 찾는 리더들을 위한 좋은 충고가 될 것이다.

 

매일매일의 삶이 곧 그대의 역사다

 우리는 역사를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거나 도서관의 낡은 서가에 꽂혀 있는 오래된 책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리들의 매일의 삶 자체가 곧 역사다. 지금 무엇을 위해 살고 어떻게 행동하는가? 그것이 바로 매일의 역사를 만든다. 두려워하거나 허둥대지 않고 오늘 하루를 마쳤는가, 게으르게 보냈는가, 용감하게 도전했는가, 어떤 일을 어제보다 더 나은 방법으로 행했는가, 이같은 태도들이 하나하나 쌓여 매일의 역사를 만드는 것이다.

 

 니체는 <아침놀>에서 우리의 삶 자체가 거대한 역사책이라고 말한다. 페이지마다의 내용은 남이 대신 채워주지 않는다. 그러니 사소한 생각과 행동에도 늘 신선한 감각을 유지하면서 페이지를 메워나가야 한다. 밝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부지런히 용감하게.

 이런 일에 거창한 목표를 세울 필요는 없다. 아주 작은 일부터 시작하자. 오늘은 항상 다니던 길이 아닌 새로운 길을 택해서 학교나 회사를 가보자. 눈앞에 지나치는 풍경이 이제까지와는 다른 것이기에 어제는 느낄 수 없었던 활기를 가져다줄 것이다.

또 하나 유용한 것이 앞에서도 말한 역할 바꾸기다. 역할을 바꾸면 이제껏 몰랐던 상대의 기분을 알게 됨으로써 그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해줘야 하는지 알게 되고, 이는 타인에 대한 헌신과 배려로 이어진다. 리더라면 더욱 역지사지에 능해야 한다. 멋진 리더가 되기를 원할수록 부하들로부터 받을 생각만 하지 말고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참신한 방법으로 접근하라.

 

 

 Chapter05 누가 훌륭한 교사인가

스승과 제자, 그리고 동반자

<논어> <위정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어느날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태산에 오른다. 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의 역대 황제들이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드렸고, 공자를 비로한 많은 위인들이 학문의 최고 경지를 이 산에 빗대어 말할 만큼 소중한 성지로 여겼다.

 당시 자신의 인생이 종착지에 이르고 있음을 느꼈던 공자는, 노구를 이끌고 이 높고 험한 산을 제자들과 함께 올랐고 마침내 정상에 섰다.

"오늘은 나의 일생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구나"

"나는 여 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지학), 서른살이 되어서는 학문의 기초를 확립했으며(이립), 마흔살이 되어서는 미혹됨이 없어 판단에 혼란을 일으키지 않았고(불혹), 쉰 살이 되어서는 하늘의 뜻을 알았으며(지천명), 예순 살이 되어서는 무엇이든 귀로 들으면 그 뜻을 알아차렸고(이순), 일흔 살이 되어서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해도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종심)"

"나는 하늘을 원망하려고도, 사람을 책망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다만 나 자신이 믿는 것을 따라, 마치 태산의 정상에 오르려고 낮은 곳에서부터 한 발 한 발 높은 곳으로 올라온 것처럼 그렇게 살아온 것이다. 이러한 나의 마음을 하늘이 알고 있다."

 태산을 내려온 공자는 제자들에게 뜻밖의 제안을 한다.

"이제부터 사제 관계는 그만두고, 우리 모두 친구가 되자. 스승으로서 나의 임무는 끝났다. 이제부터는 더 이상 스승이 아닌 친구로 지내자."

 이즈음 공자는 필생의 숙원 사업인 <춘추>의 저술을 막 끝낸 직후였다. 이 책은 공자가 노나라의 사관들이 쓴 역사서에 자신의 의견을 보태 편찬한 역사서로, 후에 이어지는 중국의 모든 왕조들한테 정치의 교과서로 읽혔다.

 공자가 말하는 친구라는 것이 이상 세계를 펼쳐 나감에 있어 학문의 동반자가 되어 달라는 당부였다.

 

엉터리 교사들이 가르치는 것들

 훌륭한 스승을 모시고 멋진 사제 관계를 이어가는 사람은 인생의 최고 보물 중 하나를 지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자가 스승의 학문적 깊이에 다다르고, 더 나아가 스승보다 깊이 들어가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는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스승에게 배운 제자의 학문이나 실력이 마침내 스승을 능가하는 경지에 이르렀음을 뜻하는 '청출어람'이라는 말이 있다. 전국 시대 제자백각의 한 사람이며 성악설을 주장한 현자로 유명한 순자가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은 끊임없이 발전과 향상을 위해 노력해야 하고 중도에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한 다음의 말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학문은 그쳐서는 안 될 일이다. 푸른색은 쪽(마디풀과의 한해살이풀로, 잎으로 남빛 물감을 만든다)에서 취했건만 쪽보다 더 푸르고 얼음은 물로 된 것이지만 물보다 더 차가우니."

 순자와 마찬가지로 공자도 언젠가는 제가가 제자의 입장을 끝내고 서로 친구가 되는 대등한 관계로 발전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사제 관계라고 생각했다.

 흥미롭게도 니체 역시 완전히 같은 입장이었다. 스승, 신 등 그 무엇이라도 우상과도 같은 것에 종속되지 않고, 넘어서서 진정한 자신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로 이런 생각이 당시의 종교나 하계로부터 니체가 배척 받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그는 <우상의 황혼>에서 심지어 이렇게 쓰기도 했다

 

플라톤, 공자,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교사들…….  이들은 거짓말을 지껄이면서 그것이 자신의 권리라고 굳게 믿었다.

 

 니체는 이렇게 대중에게 군림하려는 종교와 학계 등 지식인 집단의 위선적인 태도를 비판했고, 그런 관계가 오랜 세월 꽁꽁 얽매인 채로 썩어가는 현실을 통탄했다.

 

 제자는 훌륭한 스승만큼의 품격과 실력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 니체는 <권력에의 의지>에서 형편없는 자질의 가짜 교사들을 이렇게 비판했다.

 

가짜 교사들이 가르치는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은 처세 적인 내용들 뿐이다. 이러면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 이런 판단은 손해를 부른다. 인간관계는 이렇게 하고 인맥은 이렇게 넓혀라……..  이렇게 그들이 가르치는 것은 하나같이 가치를 판단하는 기술적인 방법 뿐이다. 그들은 인간과 사물의 본질에 대해서는 절대 말하지 않는다.

 

 삶의 본질을 이해하는 법을 외면한 채 그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적인 방법만 배우는 것은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기계 부품의 작동 원리나 명칭조차 모른채 무조건 전진과 후진만 알면 된다는 운전사와 같다..

 

사제 관계가 친구 관계로 발전하기는커녕 언제까지라도 스승의 자리에서 내려오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많은 걸 보면 이 점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사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많은 시간을 들여 어떤 기술을 습득할 때, 스승이 제자가 자립해 나가는 걸 환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제자가 자신을 뛰어넘어서 새로운 가치나 성과를 내놓는 것이 스승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세상은 그렇게 이어지고 발전하는 것임을 잘 알았던 니체의 말과 공자의 목소리가 하나의 말로 겹쳐 들리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Chapter06 독서하는 게으름뱅이

외우는 것이 진짜 독서다

 

나는 단지 피를 쏟아서 쓴 것만 사랑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피를 쏟아서 쓴 것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는 정신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냥 정신만으로는 부족하다. 땀과 눈물이 합쳐진, 온몸으로 쓴 생명의 산물이어야 한다. 니체는 전통적인 서구 종교와 도덕 철학에 깔려 있는 근본 동기를 밝히기 위해 그렇게 피를 쏟아서 쓰고 또 썼다.

 독자가 니체의 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책을 읽고 거기서 무엇인가를 인용해보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단 몇 줄도 제대로 외우지 못한다.

 니체는 이것을 독서하는 게으름뱅이들의 전형적인 행태로 여겼고 외우는 것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면 크게 화를 냈다.

"굳이 암송할 때까지 읽고 또 읽을 필요가 있을까요? 그렇게 하지 않아도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차이가 없지 않나요?"

 자칫하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차이는 실로 대단하다. 진정한 가르침은 자신의 내면에 깊이 확실하게 넣어두는 보물과 같은 것으로 생각할 때 더 빛난다. 진정한 보물은 자유자재로 꺼내 쓸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반복해서 외우고 또 외워서 확실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기억력은 나이와 관계없다.

 

진짜 교양은 책을 얼마나 많이 읽었는가에 달려 있지 않다. 책의 내용을 생활 속에서 얼마나 적용할 수 있는가, 책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얼마나 많이 그리고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가, 나는 바로 여기에 교양인이냐 아니냐가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시인 두보는, 남자는 모름지기 다섯수레 분량의 책을 읽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렇게 엄청난 분량의 책을 읽고서도 자기 삶에 제대로 적요할 수 없는 사람은 에너지를 쓸데없이 낭비한 것뿐이다.

 머리에만 담으려 하지 말고 모의 일부가 되게 하라는 뜻의 암송은 사실 서구 사회에서는 문화 교양의 기본적인 기술로 여겨왔다. 지금도 프랑스에서는 초등학교 때부터 시나 산문에 익숙해지도록 수업 시간에 암송을 많이 시킨다. 영국에서는 초등학교 때 세익스피어를 외운다. 단순히 아이들의 수업만이 아니다. 케임브리지나 옥스포드 대학교에서는 암송을 주제로 하는 강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암송을 유치원 아이들에게나 필요한 일이라고 여기는 풍조가 퍼져 있는것 같다.

 뇌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70~80대가 되어도 기억력은 기본적으로 연령의 영향을 별로 받지 않는다고 한다. 문제는 집중력의 차이라는 것이다. 원주율을 암송하는 세계 대회에서 1위를 차지한 사람은 학생이 아니라 40대 중년이었다. 이는 기억력과 나이는 그다지 관계가 없고, 누구나 집중만 하면 연령과 관계없이 기억을 잘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니체는 단지 책을 읽는 것만으로는 현명해질수 없다며, 생활에서 책을 통한 지식을 직접 체험해보는게 중요하다고 <방랑자와 그 그림자>에서 강조했다.

 

다방면에서의 다양한 체험이 사람을 한층 현명하게 만든다. 따라서 살면서 체험하는 모든 일들이 유익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더라도 무엇인가 체험하고 있을 때는 완전히 몰두해야 한다. 중도에 체험하는 일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 그러면 전체를 마음껏 차분하게 집중할 수 없다. 반성이나 관찰은 그 뒤에 오는 것으로, 이때 비로소 새로운 지혜가 생산되는 것이다.

 

 니체는 자신의 저서를 촌철살인의 짧은 글로 구성하는 걸 좋아했는데, 이는 진리의 핵심을 꿰뚫는 짧은 글이 한 권의 책과 대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포리즘이나 금언, 속담 같은 말들은 인간의 지혜를 짧게 엮어 외우기 쉽게 만듦으로써 사람들의 삶에 도움이 된다. 니체는 어쩌면 자신의 아포리즘들이 후세 사람들에 의해 인생의 난관을 헤쳐나가는 도구로 사용되기를 원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차라투스트라 ~ 말했다>가 단순히 그냥 한 번 읽혀지고 마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이 책을 쓸 때 피를 쏟아서 썼기에, 니체 역시 이를 받아들이는 우리가 그 내용 하나하나를 완전히 체화하여 삶의 영양분으로 삼기를 바랄 것이다.

 

 

 

Part5 창조적인 삶은 어디서 오는가

 Chapter01 힘은 아름다움에서 나온다.

 

, 그리고 아름답다는 것

힘은 니체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개념이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힘은 타인을 지재하고 싶어 하는 권력욕이나 눈에 보이는 것을 모조리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탐욕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것이 원래부터 지닌 살아내려는 집념이나 의욕을 가리킨다.

 콘크리트 바닥의 작은 틈새로부터 빛을 찾아 기어 나오는 들풀의 집념을 보라. 그렇게도 작고 하찮은 식물조차 무시무시한 생명력을 갖고 있음에 놀라게 된다. 하지만 인간인 우리는 언젠가부터 그런 생명 원리를 잊은 채 살아가고 있다.

니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품어야 하는 꿈과 이상을 잃은 채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기 바쁜 사람들에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렇게 충고한다.

 

자기의 영혼 속에 존재하는 영웅을 외면하지 마라. 더 높은 곳을 향한 꿈과 이상을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다며 그리운 듯이 말하지 마라. 살면서 어느 사이에 꿈과 이상을 버리게 되면, 그것을 말하는 사람을 비웃게 되고 시샘으로 인해 마음이 어지러워진다. 그러면 발전하겠다는 의지나 자기 자신을 극복하겠다는 강고한 마음 또한 버려지게 된다.

 

 니체는 또 우리 마음속으로부터 끓어오르는 생존본능은 사실 아름다움이라는 자극에 의해 북돋아진다고 설명한다. 한마디로,

미적 감각을 유지하는 것이 생존 본능을 일으켜 세우는 강력한 원천이라는 것이다.

 니체는 '진정한 숭고함은 휴식이나 웃음, 또는 아름다움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라고 했다. 아름다움을 대함으로써 얻게 되는 감동을 삶의 에너지로 전환시키는 회로를 갖는 것이 살아가는 데 중요한 힘이 된다는 뜻이다.

 

미적 생활에 가까이 가고 미술이든, 음악이든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들(클래식 연주회, 미술 전시회)과 관계하면서 살아가야겠다.

 

체험으로서의 아름다움이 중요하다

현대인들은 미적 감각으로 자신의 생명력이 활성화된다는 생각이 익숙하지 않다. 간혹 미술 작품이나 오페라 한 편을 보더라도 그것을 통해 삶의 활력을 얻는 다기보다는 교양적 측면에 대해 이야기한다. 심지어 미술 작품을 보며, 이 그림은 얼마 짜리라는 동미 적인 가치 이외의 것에 더 관심을 갖는 경우도 많다.

 니체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교양보다는 체험으로서의 아름다움을 중요시했다. 그는 아름다움, 숭고함이 사람에게 직접적인 일상의 활력으로 작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루벤스의 작품 앞에서 쓸쓸히 죽어간 네로와 파트라슈의 모습, 이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아름다움을 향한 비상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작가의 메시지.  <플란더스의 개>

 

 니체는 언제나 아름다운 것을 가까이하고, 그것을 향해 끊임없이 동경의 화살을 쏘는 사람이 되라고 했다. 그것 만으로도 마음속에 아름다움이 축적되어 삶에 긍정의 불빛을 흩뿌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높은 곳을 지향하는 향상심으로 살아야 한다.

 

 

Chapter02 쾌락과 고통은 마주보고 있다

음악과 니체가 만났을 때

만약 니체에게 오늘날과 같은 형식의 명함이 있었다면 대학교수, 철학자, 문헌학자라는 직업 옆에 피아니스트, 작곡가라는 타이틀을 새겨 넣었을 것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언어와 음악에서 특출한 재능을 보여 청소년기까지 시를 쓰거나 음악을 작곡하고 피아노를 연주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리스 신화에서 아폴론은 태양과 이성의 신이며 디오니소스는 술과 축제, 음악의 신이다. 그러므로 아포론적인 것은 질서 잡힌 형식적 아름다움과 인간의 인식으로 구성되는 이성적인 측면을,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자연스럽고 원시적인 에너지로 구성되는 감성적인 측면을 이른다 할 수 있다.

 니체는 고대 그리스에 융성했던 비극이 디오니소스적인 요소가 제거되며 균형을 일고 점차 쇠퇴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비극의 정신을 살리기 위해서는 디오니소스적 요소가 살아나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 예로 바그너의 악극을 들며 그를 극찬했다.

 니체는 왜 그렇게 음악에 매료되었을까? 누군가 무엇을 호소하면, ㄱ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목소리의 음파가 상대의 몸에 닿아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는 데 일조한다. 음성으로 전달되는 내용뿐만 아니라 몸에 와 닿는 소리의 파동이 상대방을 반응하게 만드는 것이다.

 누군가 음악을 듣거나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면, 그 사람은 음악을 통한 감각을 에너지로 전환하여 삶을 위한 동력으로 사용하려는 본능적인 욕구가 강하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니체는 <권력에의 의지>에서 사람은 자기 몸의 감각을 사랑해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몸의 감각이나 관능을 저질스럽거나 부도덕한 것, 또는 우리의 의식이 개입되지 않는 단순한 뇌의 화학적 반응 이라고 생각하며 의식적으로 멀리하지 마라. 자기의 감각을 마음껏 사랑해야 한다. 인간은 신체의 감각과 관능을 예술로 승화시켜 문화라는 것을 만들어왔다.

 

쾌락과 고통은 마주보고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는 근대 이후부터 생성된 사회적 감시 시스템이 권력에 순종하는 개인들을 만들어냈다고 말한다. 이런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어딘가에 있을 감시의 눈을 항상 의식한다. 실제로 감시되는지 아닌지는 알수 없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항상 '나는 감시당하고 있다'는 피해 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면 감시 당하는 사람의 의식 안에 또 다른 감시자가 생겨나 내면으로부터 끓어오르는 감정이나 충동을 스스로 억제하고, 이러한 '자기 감시 시스템'은 급기야 생명의 불꽃마저 약해지게 만든다.

 니체는 모든 인간이 불꽃처럼 타오르는 삶을 살기를 소망했는데, 우리의 현실은 푸코가 진단하듯이 참담하기만 하다. 현대인들은 보이지 않는 감시 시스템에 최대한 순응하기 위해 불쾌하고 불안한 것은 기피하고 기분 좋은 것만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다.

 편안한 것들에 둘러싸여 살면 그런대로 안락한 일상을 이어갈 수 있겠지만, 우리를 한 차원 더 높은 세계로 안내해줄 아름다움이나 가치관은 만나기가 어렵다.

 세상을 압도하는 각종 기계적 시스템에 길들어서, 적당히 맛있는 먹이를 먹으며 그럭저럭 안락하게 살아가는 가운데 서서히 삶이 끝나버리는 사람들은 초원의 동물들과 다를 게 없을지도 모른다. (저자가 주는 통찰)

 

 니체는 최고 효율의 쾌적한 삶이 가져다 주는 방식의 맞은편에 있는 것들을 주목하라고 말한다. 효율성과 동떨어져 있는 것일수록 우리 인생을 다채롭게 해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내면에서 샘솟는 자유를 향한 충동을 마음껏 발산하고, 삶이라는 감옥으로부터 해방되어 감각과 본능을 최대한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 니체는 항상 그런 존재가 되기를 갈망한 진정한 자유인이다.

 

Chapter03 내 삶에 던지는 의문부호

평가는 창조다

제대로 된 평가 기준이 마련되어 있을 때 사람은 자신의 에너지를 어디에 얼마나 쏟아 부어야 할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최근에는 평가 기준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일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안목이 없으면, 뛰어난 평가의 대상은 절대로 태어나지 않는다. 이 말은 평가를 하지 않거나 잘못된 평가를 한다는 것은 새롭게 생겨나야 했을 가치의 싹을 밟아버리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그만큼 평가라는 것은 큰 책임을 동반하기에 신중해야 하고 객관적이어야 한다.

 

 기업에서도 '이것은 된다, 안된다'의 평가 기준을 직원들에게 확실히 알려줘야 질서가 생기고 회사의 목표도 명확하게 잡힌다. 기준도 없이 사원들에게 각자 알아서 최선을 다하라는 식으로 말하는 경영자가 있다면, 회사는 갈 곳을 잃고 표류하게 될 것이다.

이는 스포츠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강한 팀을 만들기 위해서는 감독이 선수들 개개인을 냉정하게 평가하는 기준을 가져야 하고 이를 선수 당사자들과 공유해야 한다.

냉철하게 평가하고 결정을 내리는 일은 더 나은 창조로 이어지는 가능성을 만들어준다.

 

자기 앞의 생을 다시 평가하라.

 

그리스도교 적인 규범의 범주에서 생활하는 것이 일상으로 여겨지던 니체 이전의 시대에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일은 개인의 역할이 아니었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신의 대변자인 교회의 몫이었고, 여기에 종교에 복종하는 귀족들이 강제하는 도덕률도 한몫을 했다.

 하지만 사상이나 사물의 가치는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니체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새로운 가치 기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설령 그것을 찾는 과정에서 엄청난 벽에 부딪친다 해도 평생을 바쳐 도전해볼 만한 일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니체는 어려 서부터 항상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이는 새로운 가치 기준을 찾기 위한 그 나름의 몸부림이었다. 사망하기 2년 전에 펴낸 그의 저서<우상의 황혼>에 죽을 때까지 '?'라는 물음에 집착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썼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삶의 방법론을 담은 책은 많지만, 내게 맞는 것을 찾기는 어렵다. 타인의 방식이 내게 맞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전혀 이상할 게 없다. 문제는 내가 던지는 '?'라는 물음의 내용을 나 스스로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데 있다. 왜 그 일을 하고 싶은가? 왜 그렇게 되려고 하는가? 왜 그 일을 하고 싶은가? 왜 그렇게 되려고 하는가? 왜 그 길로 가려고 하는가? 내면으로부터의 이런 물음에 분명한 평가 기준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답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라는 의무부호에 스스로 답을 제시 할 수 있어야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게 됨으로써, 이제 그 길을 가는 일만 남게 되는 것이다.

 

니체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에서 가장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아이들의 순수한 호기심이다.

 자기 앞에 펼쳐지는 삶에 올바른 가치 기준으로 냉철한 평가를 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의미의 자기 혁명을 이룰 수 있는 전사다. 니체는 지금 당신에게 묻고 있다.

 "당신은 지금의 삶에 대해, 그리고 세상에 대해 얼마나 많은 의문부호를 던지고 있는가?"

 

 

 

Chapter04 스스로의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처럼

 

힘차게 돌아가는 바퀴 같은 사람

 

어떤 사업을 일으키려고 할 때 창업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스스로 돌아가는 바퀴가 되어 주위 사람들을 휘몰아치듯 이끌고 가는 통솔력이다.

 니체는 우리에게 타력에 의해 억지로 돌아가는 피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힘차게 돌아가는 바퀴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그대는 새로운 힘인가. 새로운 권리인가. 시초의 운동인가. 자신의 힘으로 도는 바퀴인가. 그대는 별들에도 지배의 힘을 미쳐 그대 주위를 돌게 할 수 있는가.

 

 현대인들은 고민이나 불안에 발이 묶여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현실의 장애에 너무도 깊이 빠져서 발걸음을 옮기는 일조차 힘겨워하는 이들에게, 혼다 회장처럼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이들이 던지는 메시지는 이런저런 구실이나 변명을 대지 말고, 어쨌든 해보면 반드시 현실은 움직인다는 것이다.

 변명하며 꾸물대는 인생에 미래는 없다. 인생의 성공이란 어쨌든 목표를 향해 두려움 없이 도전하는 사람들의 것이고, 이런 사람들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차라투스트라다.

 

초인처럼 맹렬한 개척자 정신으로

 

일본의 물류 운송업체인 야마토 운수의 창업자인 오구라 마사오 회장은, 택배라는 개념을 생활 속에 정착시켰고, 국민들의 생활이 엄청나게 달라지게 되었다. 단지 돈을 버는게 목적이었다면 새로운 개념의 사업을 일으키기보다 기업을 인수 합병하거나 주식 투자를 하는 쪽이 훨씬 쉬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꿈은 전혀 새로운 분야에 자신을 던져서 피땀 흘리는 모험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런 태도야말로 니체의 초인 정신으로, 대부분 성공한 사람들의 삶에서 뚜렷이 찾아볼 수 있는 자세다.

 

 

 

Chapter05 인생으로부터의 최후통첩

 

항상 도전하는 사람 곁에 있는 니체

나는 타고난 재능보다는 운명에 도전하려는 의욕이 살아가면서 더 큰 힘을 발휘한다고 믿는다. 센스와 능력을 타고난 사람이라도 의욕이 없다면 시작조차 할 수 없다. 이와 반대로 의욕은 하늘을 찌르는데 재능이 따르지 않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재능이란 열의에 따라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는 것이므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예를 들어 스포츠계에서는 후천적인 노력으로 천재적인 선수들을 능가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것은 바로 '투쟁 의지'. 의지가 있기에 발전이 따르고, '무엇을 하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이 있기에 어떻게든 정상으로 가는 길을 찾아가는 것이다.

 니체는 인간 의지의 중요성을 강조한 철학자로, 그 자신이 세상이 쏟아내는 거센 비판과 냉대를 홀로 감당해야 했지만 그럼에도 자기 말과 행동을 확실히 지배하는 주인으로 살았다. 니체는 분명 천재적인 기질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그러나 천재보다는 자기 삶에 전력을 다하는 사람이 더 위대하다고 말하며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다. 심지어 니체는 <아침놀>에 이렇게도 썼다.

 

천부적인 능력이 없다고 비관하지 마라. 재능이 없다면, 그것을 습득하면 된다.

 

 하지만 그냥 습득을 원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더 간절히 원하고, 더 강한 의지를 가지고 도전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니체는 도전하는 약자들의 편에서 평생 응원의 박수를 보내준 사람이기도 했다.

 

운명을 향해 돌진하겠다는 각오

의욕이란, 말하자면 '운명을 욕심 내는가?'라는 질문과 같다. 그것은 또한 '당신은 당신의 운명을 찾아갈 준비가 되었는가?'라는, 운명을 향해 돌진하겠다는 각오를 요구하는 인생으로부터의 최후통첩 같은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내 직업은 창조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는 단순한 일이다', '정년이 되어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등등 자신이 놓인 상황에 따라 좀처럼 의욕이 끓어오르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잘못됐다. 나이가 몇 살인지, 무엇을 하고 잇는지에 상관없이 줄기차게 의욕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인생의 의미가 바뀐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온몸을 다해 입증하고 있다. 니체는 이런 사람들의 변화를 '무엇인가에 도전하는 행위 자체가 스스로를 춤추게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최근에 나에게 의욕을 가져다주는 원천은 무엇일까?

 

책읽기, 걷기, 운동, 턱걸이, 외국어 공부와 같은 것들은 흥미가 있고 내가 움직일 수 있는 동력이 되는 것 같다.ㅋㅋ

 

Chapter06 아모르 파티,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

 

하늘의 연처럼 바람에 맞서라.

니체가 운명에 대해 말할 때마다 사용했던 '아모르 파티'라는 말이 있다. '운명애'라고 번역되는 이 말에 대해 니체는 이렇게 설명한다.

 운명은 모든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다가오지만, 여기에 묵묵히 순종하는 삶에서는 창조성을 찾아볼 수 없다. 운명의 필연성은 긍정하되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할 때 자기만의 새로운 삶을 이루게 되고, 바로 여기서 창조성이 큰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바람에 맞서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연과 같은 존재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항상 따뜻한 봄날만 계속되지는 않는다. 거친 바람과 폭우가 몰아치는 날도 있기 마련이다. 하늘 높이 날기 위해서는 바람이라는 난관을 사랑하고 받아들여서 내편으로 만드는 지혜와 노력이 필요하다. 아모르 파티! 필연적인 운명을 긍정하고 감수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사랑할 때 진정으로 완성된 인생을 살 수 있다.

 

강한 바람에 펄럭거리는 돛처럼

일반적으로 '지혜' 라고 하면 나이 든 현자가 가지고 있을 법한, 조용하고 중후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니체는 플라톤이나 공자같이 인류의 스승으로 추앙 받는 현자들을 거부했고, 한 발 더 나아가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그리스도교와 불교, 여기에 소크라테스까지 포함시켜 퇴폐 또는 타락이라는 의미의 '데카당'이라고 부르며 비판했다.

 특히 니체는 그리스도교에 치를 떨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혼자 힘으로도 더 고귀하고 깊은 삶을 사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한데 왜 굳이 신을 믿어야 하고, 왜 신이 정한 도덕에 맞춰 살아야 하며, 왜 누구도 가보지 못한 내세의 세상을 꿈꾸어야 하는가, 그것이 니체의 생각이었다.

 니체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의 삶과 그것을 만들어가는 나 자신의 힘이었다. 그랬기에 니체는 온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바다를 건너는 강인함 이야말로 진정한 현자의 모습이라고 믿었다.

 

그대들은 아직 본 적이 없는가. 돛이 둥글게 부풀어 거센 바람에 펄럭거리면서 바다를 건너는 것을. 그 돛처럼 정신의 거센 바람에 펄럭이면서, 나의 지혜는 바다를 건너간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Chapter07 세상의 변방을 지키는 사람들

 

어느 노벨상 수상자의 싸움

세상에 새로운 가치관이나 도덕률을 제안하는 사람은 고독할 수밖에 없다. 기존의 상식이나 전통이 틀렸다고 생각되면 거침없이 부정하고 파괴하려 들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매일같이 완강하게 버티는 세상과 힘들게 맞서야 한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사회 통념에 순순히 무릎 꿇거나 기존 가치관에 그대로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두려운 존재다. 예를 들어 회사에 뛰어난 재능과 남다른 가치관을 가진 신입 사원이 새로 들어오면 보통 선배 사원들은 그를 부담스러워 한다.

 그들이 안주하고 있는 세계가 그 사람으로 인해 금이 가는게 두렵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번 금이 가버린 평화는 다시 복원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것이 19세기 유럽 사회가 니체 같은 이단자를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사회도, 회사도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려는 사람의 정신이나 의지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으면 세상의 변방에서 세계를 바꾸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이 점차 사라져버리게 된다. 예를 들어 2014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나카무라 슈지가 그렇다.

 1993년 화학 회사에서 근무하던 그가 세계 최초로 고휘도 청색 LED를 개발하여 회사가 연간 10억 달러가 넘는 매출을 올리는 데 기여했다. 이 발명품은 학계에서 금세기 도저히 개발이 불가능하다며 포기하고 있던 것으로 그만큼 과학의 진보에 큰 기여를 했다. 하지만 이런 공로에도 불구하고 그가 받은 대우는 기껏 2만엔 정도의 포상금과 1계급 승진으로 과장이 된 것이 전부였다. 1999년에 퇴사하여 캘리포니아 주립 대학 교수로 자리를 옮기고 2년 뒤 그 회사에 특허권의 일부를 자신에게 양도하거나 발명의 대가로 200억엔을 지급할 것을 요구하는 소송을 했다. 이 재판은 2005년에 84천만 엔을 지급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단독자, 자기 삶을 당당히 걸어가는 사람

 

그대가 서 있는 곳을 깊이 파고 들어라.

니체가 그리스도교에 맞섰던 이유 중 하나는 창조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리스도교는 신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러면 인간은 신이 정한 가치관에 따르면 될 뿐 뭔가를 새로 만드는 행위에 참여할 필요가 없게 된다. 이 말은 우리 창조의 자유에 한계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면서 가장 흥분되는 시간은 창조할 때다.  무엇을 창조한다는 것은 세상의 변방을 힘들게 달리는 일과 같다.

 창조에는 그만큼 위험이 따르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위험을 무릎 쓰고 창조의 기쁨을 맛보려고 도전하는 이유는 그것이 변화나 진보로 이어져서 나만의 새로운 세계를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것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한 음성으로 말해준다.

 

그대가 서 있는 곳을 깊이 파고들어라. 샘은 바로 거기에 있다. 자기에게 딱 맞는 무엇이 이곳이 아닌 아주 먼 곳에, 가령 아직 가보지 못한 타국 땅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결코 그렇지 않다. 지금까지 한 번도 시선을 두지 않았던 발아래에 그대가 추구하는 것, 그대에게 주어진 많은 보물들이 잠들어 있다.

 

 이런 니체의 말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의 창조가 무엇인지, 그것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는 진심 어린 충고다.

 

 

에필로그

온몸을 던지며 살아라.

 

 니체는 세상 사람들의 소심함이나 겁 많은 나약함을 스스로의 생명과 정신을 걸고 말끔히 청소해주려고 했다.

 우리가 살면서 반드시 청소해야 할 정신의 찌꺼기에는 크게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세상을 '이런 것이다.'하고 단정하며 체념해버리는 태도다.

 어른이 되어갈수록 사람들은 점점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사라져서 무엇이든 그냥 어림짐작으로 넘기곤 한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진지한 호기심 그 자체였던 어린 시절이라면 반드시 물음표를 던지며 덤볐을 그 문제들을 지금은 그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흘려버린다.

 두 번째는 두려움이다. 위험을 받아들일 결심 없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살아가면, 작은 도랑조차 뛰어넘지 못하게 된다. 니체는 그런 나약한 태도를 가장 경멸했다.

 분명히 남다른 능력이 있음에도 그것을 최고의 삶을 만들어가는 데 쓰지 않고 그저 적당히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니체는 그런 사람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그런 인생으로는 안 된다'며 정신을 차리고 힘을 내도록 북돋워주었다.

 니체를 접하면 마음에 쌓아왔던 답답함이 금세 사라진다. 그리고 단단히 굳었던 마음을 털고 일어나, 날아가는 화살처럼 경쾌하게 살고 싶어진다. 니체는 체계적으로 연구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니체도 자신의 사랑이 연구의 대상으로 여겨 지나보다 ' 이 가르침이 나의 오늘과 내일을 밝게 비춰준다'고 생각하는 걸 분명 더 기뻐할 것이다.

 반대로 독자가 '당신의 책을 열심히 공부해서 지식을 충분히 쌓았습니다. 그것은 대개 이런 뜻입니다.'라며 니체의 사상을 숙제하듯이 몇 문장으로 요약하려 하거나, 고등학교 윤리 교과서처럼 한두 번 훑어본 지식을 기억하는 정도로 만족한다면 니체는 실망할 것이다. 온몸을 던져서 읽어라. 온몸을 던지며 살아라. 이것이 이 책의 미션이다.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니체의 말

뱀이 허물을 벗지 못하면 끝내 죽고 말듯이 인간도 낡은 사고의 허물에 갇히면 성장은커녕 안으로부터 썩기 시작해서 마침내 죽고 만다. 따라서 인간은 항상 새롭게 살아가기 위해 사고의 신진대사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아침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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