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이기적 유전자
• 저자: 리처드 도킨스
• 출판: 을유 문화사
오늘의 책은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입니다. 저자는 리처드 도킨스님 입니다.
이기적 유전자
Why are people?
사람은 왜 존재하는가?
진화 - 가장 근본적 질문에 대한 대답
어떤 행성에서 지적 생물이 성숙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생물이 자기의 존재 이유를 처음으로 알아냈을 때다. 만약 우주의 다른 곳에서 지적으로 뛰어난 생물이 지구를 방문했을 때, 그들이 우리의 문명 수준을 파악하기 위해 맨 처음 던지는 질문은 당신들은 진화를 알아냈는가?”일 것이다. 지구의 생물체는 자신들 중의 하나가 진실을 밝혀내기 전까지 30억 년 동안 자기가 왜 존재하는지 모르고 살았다. 진실을 밝힌 그의 이름은 찰스 다윈이었다. 공정하게 말하면 몇몇 다른 사람들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우리가 왜 존재하는지에 대하여 일관성 있고 조리 있게 설명을 종합한 사람은 다윈이 처음이었다. 다윈은 이 장의 표제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호기심 많은 어린아이에게 우리가 이치에 맞는 답을 가르쳐 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생명에는 의미가 있는가? 우리는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등과 같은 심오한 질문에 마주쳤을 때 우리는 더 이상 미신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 저명한 동물학자 심슨은 이 세 가지 중에서 마지막 질문을 제기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1859년 이전에 이 문제에 답하고자 했던 시도들은 모두 가치 없는 것이며, 오히려 그것들을 완전히 무시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는 점이다.”*
오늘날 진화론은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돌고 있다는 사실과 같이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다윈 혁명의 함의는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대학에서 동물학은 아직도 소수의 연구 분야이며, 동물학을 연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조차 그 깊은 철학적 의미를 인식하지 못한 채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철학과 인문학 분야에서는 아직도 다윈이 존재한 적조차 없었던 것처럼 가르친다. 이런 상황은 틀림없이 언젠가 달라질 것이다. 어쨌든 이 책은 다원주의를 지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특정 논점에 대하여 진화론이 초래하는 결과를 두루 살펴보기 위해 쓰였다. 나의 목적은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생물학을 탐구하는 것이다.
이기주의와 이타주의
학문상의 흥미는 차치하고라도 이 주제가 인간에게 중요함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 주제는 우리 사회생활의 모든 면, 즉 사랑과 미움, 싸움과 협력, 주는 것과 훔치는 것, 탐욕과 관대함 등에 모두 관련된다. 콘라트 로렌츠의 공격성에 관하여, 로버트 아드리의 [사회 계약 The Social contract] 그리고 아이블 아이베스펠트의 [사랑과 미움]도 이와 같은 문제를 다뤘다고 할 수 있으나 이 책들의 문제점은 그 저자들이 전적으로, 완전히 틀렸다는 데 있다. 이들이 틀린 이유는 진화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진화에서 중요한 것은 개체(또는 유전자)의 이익이 아닌 종(또는 집단)의 이익이라는 잘못된 가정을 하고 있다. 애슐리 몬터규가 로렌츠를 ‘이빨도 발톱도 피범벅이 된 자연'을 상상한 19세기 사상가들의 직계 자손이다” 라고 비판한 것은 역설적이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진화에 관한 로렌츠의 견해는 테니슨 Tennyson의 이 유명한 어구가 의미하는 것을 배척한다는 점에서 몬터규와 같다. 몬터규나 로렌츠와는 달리, 나는 '이빨도 발톱도 피범벅이 된 자연'이라는 표현이 자연선택의 현대적 의미를 아주 잘 요약했다고 본다.
논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선 이 논의가 어떤 종류인지, 그리고 어떤 종류가 아닌지 간단히 설명하겠다. 만약 어떤 남자가 시카고 갱단에서 오랫동안 별 탈 없이 살아왔다고 할 때, 우리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그가 굉장히 빠 른 총잡이이고 의리 있는 친구를 여러 명 거느린 능력 좋은 사나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물론 이 추론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그가 생존해 온 조건, 성공해 온 조건에 관해서 무엇인가를 알게 되면 그 사람의 성격에 관해서 어느 정도 추론이 가능하다. 이 책 이 주장하는 바는 사람을 비롯한 모든 동물이 유전자가 만들어 낸 기계라는 것이다. 성공한 시카고의 갱단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유 전자는 치열한 세상에서 때로는 수백만 년 동안이나 생존해 왔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우리의 유전자에 어떤 성질이 있음을 기대 할 수 있다. 이제부터 논의하려는 것은, 성공한 유전자에 대해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성질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비정한 이기주의'라는 것이다. 이러한 유전자의 이기주의는 보통 개체 행동에서도 이기성이 나타나는 원인이 된다. 그러나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개체 수준에 한정된 이타주의를 보임으로써 자신의 이기적 목표를 가장 잘 달성하는 특별한 유전자들도 있다. 이 문장에서 '한정된'과 '특별한'이라는 용어는 아주 중요하다. 우리가 아무리 그 반대라고 믿고 싶어도, 보편적 사랑이나 종 전체의 번영과 같은 것은 진화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우선, 이 책에서 다루지 않을 첫 번째 사항을 말하고자 한다. 나는 진화에 근거하여 도덕성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사물이 어떻게 진화되어 왔는가를 말할 따름이다. 우리 인간이 도덕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어떠해야 한다는 주장'과 '어떻게 된 일인지에 대한 진술'을 구별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오해받을 소지가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비정한 이기주의라는 유전자의 보편적 법칙에만 기초를 둔 인간 사회는 매우 험악한 사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개탄스러운 일이라 해도 그것이 사실임에는 변함없다. 이 책은 독자가 흥미롭게 읽도록 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도덕을 이끌어 내고 싶다면 이 책의 내용을 하나의 경고로 받아들이기 바란다. 만약 당신이 나처럼 개개인 이 공동의 이익을 위해 관대하게 이타적으로 협력하는 사회를 만들기를 원한다면 생물학적 본성으로부터 기대할 것은 거의 없다는 것을 경고로 받아들이기 바란다. 우리는 이기적으로 태어났다. 그러므로 관대함과 이타주의를 가르쳐 보자. 우리 자신의 이기적 유전자가 무엇을 하려는 녀석인지 이해해 보자. 그러면 우리는 적어도 유전자의 의도를 뒤집을 기회를, 다른 종이 결코 생각해 보 지도 못했던 기회를 잠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관대함과 이타주의를 가르치는 것에 덧붙여 말하자면, 유전되는 형질이 고정된 것이어서 변경이 불가능하다고 가정하는 것은 오류다(이 오류는 아주 흔한 것이다). 우리의 유전자는 우리에게 이기적 행동을 하도록 지시할지 모르나, 우리가 전 생애 동안 반드시 그 유전자에 복종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유전적으로 이타적 행동을 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는 경우보다 이타주의를 학습하는 것이 더 어려울 뿐이다. 동물 중에서 인간만이 학습되고 전승되어 온 문화에 지배된다. 어떤 사람은 문화만큼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에 이기적이든 아니든 간에 유전자는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데 하등 도움이 안 된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지 않다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모두 인간의 속성을 결정하는 요인이 '천성이냐 교육이냐' 하는 논쟁에서 어느편을 드느냐에 달려 있다. 여기서 나는 이 책에서 다루지 않을 두 번째 사항을 말해야겠다. 이 책은 '천성이냐 교육이냐'라는 논쟁에서 어떤 한쪽을 두둔하려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에 대한 나 나름의 의견이 있으나 그것을 표명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이 책의 11장에서 문화에 대한 내 견해가 은연중에 드러날지도 모른다. 만약 유전자가 현대인의 행동 결정에 전적으로 무관하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가 동물계에서 유일한 존재임을 알았다고 할지라도 최근에야 비로소 인간이 예외가 된 그 규칙에 대해 아는 것은 여전히 흥미로운 일이다. 또한 우리 종이 우리가 생각하고 싶은 만큼 그렇게 예외가 아니라면 우리는 더더욱 그 규칙을 배워야 한다.
이 책에서 다루지 않을 세 번째 사항은 인간 또는 기타 동물의 상세한 행동에 관한 서술이다. 이는 상세한 설명이 필요할 때 예로 서만 사용할 것이다. 나는 "개코원숭이의 행동을 보면 그 행동이 이기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의 행동도 이기적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던 '시카고 갱단'의 논리는 전혀 다르다. 인간도 개코 원숭이도 자연선택을 거쳐 진화해 왔다. 자연선택의 과정을 보면 자연선택을 거쳐 진화해 온 것은 무엇이든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개코 원숭이, 인간, 그리고 기타 모든 생물의 행동을 보면 그 행동이 무엇이든 이기적일 것이라고 예상해야 한다. 만약 이 예상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즉 인간의 행동이 진정으로 이타적이라고 관찰될 경우, 우리는 난처한 설명을 필요로 하는 사태에 직면할 것이다.
논의를 진전시키기에 앞서 용어의 정의가 필요하다. 어떤 생물체(예를 들어 개코 원숭이 한 마리)가 자기를 희생하여 다른 생물 체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행동을 했다면 그 생물체의 행동은 이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기적 행동은 이것과 정반대다. '행복'은
'생존의 기회'로 정의된다. 비록 생사의 갈림길에 미치는 영향이 극히 적고 무시해도 될 것처럼 보이더라도 말이다. 다윈 이론을 현대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얻어지는 가장 놀라운 결과 가운데 하나는 생존 가능성에 미치는 아주 사소한 영향이 진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러한 영향이 드러나기까지 필요한 시간이 충분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처럼 이타주의와 이기주의의 정의가 주관이 아닌 행동에 근거한 것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나는 행동의 심리적 동기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나는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정말로' 숨겨진 혹은 무의식적인 이기적 동기에 따라 그러한 행동을 하는지 아닌지 논의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아니면 우리는 영영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라도 이 책에서 논의할 사항은 아니다. 다만 이 행위가 이타 행위자의 생존 가능성과 이타 행동의 수혜자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효과를 내는지 아니면 낮추는 효과를 내는지만 중요할 뿐이다.
장기적인 생존 가능성에 행동이 미치는 효과를 증명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우리가 실제 행동에 우리의 정의를 적용할 때에는 '겉보기에' 어떤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겉보기에 이타적 행위는, 표면적으로 이타주의자의 죽을 가능성을 (조금이나마) 높이고, 동시에 수혜자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것처럼 보이는 행위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겉보기에 이타적인 행위는 실제로는 이기주의가 둔갑한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하지만, 이는 기저에 깔린 동기가 이기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생존 가능성에 미치는 실제 영향이 우리가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반대라는 뜻이다.
이기적인 행동의 예
겉보기에 이기적인 행동과 이타적인 행동의 예를 몇 가지 들어 보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취급할 때는 주관적으로 생각하는 경 향이 있으므로 다른 종의 동물을 예로 들겠다. 우선 개체의 이기적인 행동의 예를 몇 가지 살펴보자.
검은머리 갈매기는 커다란 군락을 지어 둥지를 짓는데, 둥지와 둥지 사이는 불과 수 미터밖에 안 된다. 갓 부화한 새끼는 무방비 상태이기 때문에 포식자에게 먹히기 쉽다. 이웃이 먹이를 찾으러 집을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둥지를 습격하여 어린 새끼를 삼 켜 버리는 갈매기를 흔히 볼 수 있다. 그 갈매기는 먹이를 잡으러 나가는 수고를 할 필요도 없이 자기 둥지를 지키는 동시에 풍부한 영양을 섭취할 수 있는 것이다.
더 잘 알려진 예로, 암사마귀는 동족을 잡아먹는 무시무시한 습성이 있다. 사마귀는 몸집이 큰 육식성 곤충으로 보통 파리와 같은 작은 곤충을 먹지만 움직이는 것은 무엇이든 공격한다. 짝짓기를 할 때 수컷은 조심스럽게 암컷에게 접근하여 암컷 위에 올라타고 교미를 한다. 암컷은 기회가 되면 수컷을 잡아먹는다. 수컷이 접근할 때나 자신의 몸에 올라탄 직후, 혹은 떨어진 후에 머리부터 잘라먹는다. 암컷 입장에서는 교미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수컷을 잡아먹는 것이 가장 유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머리가 없다는 것이 수컷의 남은 몸통 부분의 성행위를 멈추게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실제로 곤충의 머리에는 억제 중추가 있기 때문에 암컷은 수컷의 머리를 먹는 것으로 수컷의 성행위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 *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암컷에게는 추가적인 이득이 되는 셈이 다. 물론 주된 이득은 암컷이 좋은 먹이를 얻는 것이다.
"이기적'이라는 말은 동족끼리 잡아먹는 것과 같은 극단적인 경우에 대해서는 상당히 절제된 표현일지 모르겠으나, 다음의 예는 이기성의 정의에 잘 부합한다. 남극의 황제펭귄에서 보고된 비겁한 행동을 살펴보면 아마도 누구나 쉽게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황제펭귄은 바다표범에게 잡아 먹힐 위험이 있기 때문에 물가에 서서 물에 뛰어들기를 주저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그중 한 마리가 뛰어들면 나머지 펭귄은 바다표범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다. 당연히 어느 펭귄도 자기가 희생물이 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황제펭귄들은 그저 누군가 뛰어들기만 기다린다. 무리 중의 하나를 떠밀어 버리려고 까지 한다.
이타적인 행동의 예
일벌이 침을 쏘는 행동은 꿀 도둑에 대한 아주 효과적인 방어 수단이다. 그러나 침을 쏘는 벌은 가미가제 특공대다. 침을 쏘는 것 과 동시에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내장이 보통 침과 함께 빠져 버리기 때문에 그 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죽게 된다. 벌의 자살 행위가 집단의 생존에 필요한 먹이 저장고를 지켜 냈을지 몰라도 일벌 자신은 그 이익을 누리지 못한다. 우리의 정의에 따르면 이것은 이타적인 행동이다. 우리는 여기서 의식적인 동기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 경우에도, 또 이기적인 행동의 경우에도 의식적인 동기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동기는 우리가 내린 정의와 전혀 무관하다.
친구를 위해서 생명을 버리는 것은 명백히 이타적인 행동이며, 위험을 감수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작은 새는 매와 같은 포식자가 날아가는 것을 보면 독특한 ‘경계음’을 내는데, 이 소리를 듣고 무리 전체가 위험을 피하게 된다. 경계음을 내는 새는 포식자의 주의를 자신에게 쏠리게 하므로 특히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간접적인 증거도 있다. 아주 약간의 위험을 더 무릅쓰는 것뿐이지만 이 또한 우리의 이타적 행위의 정의에 포함되는 것처럼 보인다.
동물의 이타적 행동 중에서 가장 흔하면서도 뚜렷한 것이 새끼에 대한 어미의 행동이다. 어미는 둥지에서나 체내에서 알을 품고, 엄청난 비용을 감수하면서도 새끼에게 먹이를 주며, 목숨을 걸고 포식자로부터 새끼를 지킨다. 일례로 지상에 둥지를 트는 새 대부분은 여우와 같은 포식자가 접근할 때 이른바 '주의 전환 과시 행동'을 한다. 어미새는 한쪽 날개가 꺾인 양 몸짓을 하며 여우를 둥지로부터 먼 곳으로 유인한다. 포식자는 쉽게 잡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먹이를 따라 새끼가 있는 둥지에서 멀어진다. 마침내 어미새는 이 몸짓을 멈추고 공중으로 날아올라 여우의 습격을 피한다. 이 어미새는 자기 새끼의 생명은 구했으나 자기 자신을 위험한 상태에 노출시킨다.
여러 가지 이야기로 논지를 입증하려는 것은 아니다. 사례를 아무리 늘어놓는다고 해도 그것을 일반론의 정당한 증거로 삼기는 어렵다. 위에서 언급한 이야기들은 단지 개체 수준의 이타적 행동과 이기적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예로 들었을 뿐이다. 이 책에서 나는 유전자의 이기성이라는 기본 법칙으로 개체의 이기주의와 이타주의 모두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지 보이 고자 한다. 그러나 이에 앞서 이타주의에 관한 잘못된 설명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설명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고, 학교에서도 이를 널리 가르쳐 왔기 때문이다.
집단선택설
그 잘못된 설명은 앞서 언급한 오해, 즉 "생물은 '종의 이익을 위하여' 또는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행동하도록 진화한다"는 오 해에 근거한다. 이런 사고방식이 생물학에 어떻게 자리 잡게 됐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동물의 생활은 대부분 번식에 대한 활동이 며, 자연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이타적 자기희생은 어미가 새끼에게 하는 것이다. '종의 영속'은 흔히 번식에 대한 완곡한 표현으로 쓰인다. 그리고 그것이 번식의 결과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논리를 조금만 비약시키면 번식의 '기능'이 좋을 영속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추론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로부터 동물이 일반적으로 중의 영속에 유리한 방향으로 행동한다고 결론짓는 것은 잘못이다. 동료에 대한 이타주의는 그 결과로 얻어지는 듯하다.
이 사고방식은 다윈의 용어를 이용하여 표현할 수 있다. 진화는 자연선택을 거쳐 진행되고 자연선택은 '최적자'의 차등적 생존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 최적자'란 최적인 개체일까, 최적인 종족일까, 최적인 종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일까?
어떤 맥락에서는 이것이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지만 이타주의에 대해서 말할 때는 확실히 중대한 문제다. 다윈이 이른바 생존 경쟁이라고 말한 데서 경쟁하고 있는 단위가 종이라고 한다면 개체는 장기판의 졸로 볼 수 있다. 졸은 종 전체의 더 큰 이 익을 위해 필요하다면 희생될 수도 있는 것이다. 좀 더 고상하게 말하면, 자기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희생할 수 있는 개체들로 구성된 종 내지는 종 내 개체군과 같은 집단은, 각 개체가 자기 자신의 이기적 이익을 우선으로 추구하는 다른 경쟁자 집단보다 절멸의 위험이 적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세상은 자기희생을 치르는 개체로 이루어진 집단으로 가득 찬다. 이것이 '집단선택설' 이다. 이 학설은 윈-에드워즈'. 의 유명한 저서를 통해 소개되었고, 아드리의 『사회 계약』이 이라는 책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이는 진화론의 상세한 내용을 모르는 생물학자들에게 오랫동안 진실이라고 생각되어 온 학설이다. 이와 반대로 정통 학설은 '개체선택설'이라고 불린다. 나는 개인적으로 ‘유전자선택설' 이라 부르는 것을 더 선호한다.
위의 논의에 대한 '개체선택론자'의 답은 간단히 말해서 다음과 같다. 이타주의자의 집단 내에 희생을 눈곱만치도 하지 않으려는 소수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다른 이타주의자를 이용하려는 이런 이기적인 반역자가 한 개체라도 있으면, 정의에 따르자면 그 개체는 아마도 다른 개체보다 더 잘 살아남고 자손도 더 많이 낳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손은 그의 이기적인 특성을 이어받을 것이다. 여러 세대의 자연선택을 거치고 나면, 이 '이타적 집단'에는 이기적인 개체가 만연해 이기적 집단이나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처음부터 반역자가 전혀 없는 순수한 이타적 집단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웃의 이기적 집단에서 이기 적인 개체가 이주해 와서 교배를 하여 이타적 집단의 순수 혈통을 오염시키는 것을 막기란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다.
개체선택론자는 집단도 사멸한다는 것과, 집단이 실제로 절멸하는지의 여부가 그 집단에 속한 개체의 행동 여하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또한 어떤 집단의 개체들이 선견지명이 있기만 하다면, 이기적 욕망을 억제하고 집단 전체의 붕괴를 막는 것이 종국에는 자기들의 최대 이익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는 점까지도 인정할 것이다. 이 점을 몇 번이나 더 반복해서 이야기해 야 하는가? 그러나 집단의 절멸은 개체 간에 치고받는 경쟁에 비해 느린 과정이다. 집단이 느리게 그리고 확실히 쇠퇴해 가는 중에 도 이기적인 개체는 이타주의자의 희생을 발판 삼아 짧은 시간 안에 그 수가 불어난다. 세상 사람들이 선견지명을 가졌는지 안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진화는 미래를 보지 못한다.
집단선택설은 이제는 진화를 이해하는 전문적인 생물학자들 사이에서 별로 지지를 받지 못하지만, 이 학설은 직관에 호소하는 면이 있다. 동물학을 전공하는 학생은 이것이 정통적인 견해가 아님을 알고 놀란다. 그렇다고 그들을 책망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영국의 고등학교 생물학 교사를 위한 『너필드 생물학 지도서』 에도 다음과 같이 적혀 있기 때문이다.
"고등 동물에서는 개체가 종의 생존을 위해 자살이라는 행동 형태를 취하기도 한다."
이 지도서의 익명의 저자는 자기가 논쟁거리가 될 만한 말을 썼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듯하다. 이런 점에서 그는 노벨상 수상자 감이다. 로렌츠는 공격성에 관하여! 라는 책에서 공격 행동의 '종 보존' 기능에 관해 말하면서, 그 기능 중 하나는 최적 개체만이 번식하도록 보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순환 논리 같지만,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너필드 생물학 지도서! 의 저자와 마 찬가지로 로렌츠도 분명히 자기의 주장이 정통 다원주의에 반대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만큼 집단선택설이 뿌리 깊다는 것이다.
최근에 나는 오스트레일리아산 거미에 관한 BBC TV 프로그램에서 이와 비슷한 예를 봤다. 그 프로그램에 출연한 '전문가'는 대부분의 거미 새끼가 다른 종의 먹이가 되는 것을 관찰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마도 이것이 그들의 진정한 존재 이유일 것이다. 종의 유지를 위해서는 극소수가 살아남더라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사회 계약』에서 아드리는 일반적인 사회 질서 전반을 설명하는 데 집단선택설을 이용했다. 명백히 그는 인간을 동물의 정도에서 벗어난 종이라고 본다. 아드리는 적어도 숙제를 한 셈이다. 정통적인 개체선택설에 이의를 제기하려는 그의 결의는 분명히
의식적인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점에서 평가받을 만하다.
아마도 집단선택설이 큰 매력을 갖는 이유는 그것이 대부분 우리가 갖고 있는 도덕적 이상이나 정치적 이상과 조화를 이루기 때 문일 것이다. 개인으로서 우리는 종종 이기적으로 행동하지만 이상적으로는 타인의 이익을 우선하는 사람을 존경하고 칭찬한다. 그러나 우리가 '타인'이라는 말을 어느 범위까지 설정해야 하는가에 관해서는 다소 혼란이 있다. 집단 내 이타주의는 집단 간의 이기주의를 동반할 때가 많다. 이것이 노동조합의 기본 원리다. 또 다른 수준에서 보면 국가는 우리의 이타적 자기희생에서 이익을 얻는 집단이며, 젊은이들로 하여금 자국의 영광을 위해 목숨을 바치게 한다. 또한 그들은 타국인이라는 것 외에는 잘 알지도 못하는 타인을 살상하도록 훈련받는다. (이상하게도 개개인에게 생활 소비를 좀 줄여 달라는 평상시의 호소는 자신의 생명을 바치라는 전시의 호소만큼 효과적이지 않은 것 같다).
최근 인종 차별주의나 애국심에 반대하여 동지 의식의 대상을 인류라는 종 전체로 바꾸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처럼 이타주의의 대상을 확장하고자 하는 인도주의자들은 흥미로운 면모를 지니고 있는데, 진화에서 '종의 이익'이 중요하다는 사고방식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보통 종의 윤리를 가장 확신하는 이 정치적 자유주의자들은 이타주의의 대상을 조금 더 확장하여 다른 종까지 포함시키려는 사람을 매우 경멸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만약 내가 사람들의 주거 문제를 개선하는 것보다 대형 고래의 도살을 막는 것에 더 관심이 있다고 말한다면 몇몇 친구들은 충격을 받을 것이다.
동종의 일원이 다른 종의 일원에 비해 특별한 도의적 배려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것이다. 전쟁 이외의 상황에서 살인하는 것은 통상 범죄 중에서 가장 큰 죄로 생각되어 왔다. 우리 문화에서 살인보다 더 강하게 금지되는 유일한 것은 식인 행위다(비록 이미 죽은 자일지라도). 그러나 우리는 다른 종의 일원을 먹는 것을 즐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잔인 무도한 범인에 대해서조차 사형 집행을 꺼려하는데 반해, 많은 피해를 주지 않는 유해 동물에 대해서는 재판도 없이 쏴 죽이는 데 기꺼이 동의한다. 그 뿐인가! 우리는 수 많은 무해한 동물을 오락이나 유흥을 위해 죽인다. 아메바만큼이나 인간적 감정이 없는 인간의 태아는 어른 침팬지보다도 많은 공경과 법적 보호를 받는다. 그러나 최근의 실험적 증거에 따르면 침팬지는 감정이 있고 사고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언어를 배율 수도 있다. 태아는 우리 종에 속하므로 그것만으로 특혜와 특권이 부여되는 것이다. 리처드 라이더가 말하는 '종 차별주의'의 윤리가 '인종 차별주의'의 윤리보다 확실한 논리적 근거가 있는지 나는 모른다. 단지 내가 아는 것은 그러한 논리에는 진화생물학적으로 적절한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어느 수준의 이타주의가 바람직한가? 가족인가, 국가인가, 인종인가, 종인가, 아니면 전체 생물인가에 대한 인간 윤리의 혼란은 진화론의 입장에서 보면 어느 수준에서 이타주의를 기대할 수 있는가라는 생물학적인 문제와 혼란을 그대로 반영한다. 집단선택 혼자도 경쟁 집단의 구성원들이 서로 미워하고 옥신각신하는 것에 그리 놀라지는 않을 것이다. 경쟁 집단의 구성원은 노동조합원 이나 군인들처럼 한정된 자원을 둘러싼 싸움에서는 자기 집단의 편을 든다. 그러나 이 경우 집단선택론자가 어느 수준이 중요한지를 어떻게 정했는가 하는 것은 질문할 가치가 있다. 만약 선택이 같은 종 내의 집단 간이나 다른 종 간에서 일어난다면 왜 더 큰 집 단 간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좋은 속에 속하고 속은 목터에, 목은 강화에 속한다. 사자와 영양은 둘 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포유강의 일원이다. 그렇다면 '사자는 포유동물의 이익을 위해' 영양을 죽이지 않으리라고 예측할 수 없는 것인가? 분명히 포유동물의 절멸을 방지하기 위해서 사자는 영양 대신에 새나 파충류를 사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척추동물 문" 전체를 존속시키기 위 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귀류법으로 집단선택설의 난점을 지적하는 것에는 별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개체에 이타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설명해야 하는 일이 아직 남아 있다. 아드리는 “톰슨가젤이 겅중겅중 뛰는 도약 행동과 유사한 행동들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집단선택뿐이다" 라 고 했다. 포식자 앞에서 행해지는 이 박력 있고 눈에 잘 띄는 도약 행동은 새의 경계음과 비슷한 것이다. 위험에 처해 있는 동료들에게 경고하면서 한편으로는 도약 행동을 하는 자신에게 포식자의 주의를 돌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톰슨가젤의 도약 행동이나 이 와 유사한 현상 모두를 설명할 책임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살펴볼 것이다.
그에 앞서서, 진화를 바라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장 낮은 수준에서 일어나는 선택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라는 나의 신념을 주 장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신념은 윌리엄스G. C. 의 명저 적응과 자연선택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이 책에서 활용할 중심적인 아이디어는 금세기 초, 유전자가 밝혀지기 이전 시대에 바이스만 예시한 것이다. 그 의 ‘생식질의 연속성'이라는 학설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선택의 기본 단위, 즉 이기성의 기본 단위가 종도 집단도 개체도 아닌, 유전의 단위인 유전자라는 것을 주장할 것이다.* 이 말이 일부 생물학자에게는 극단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 다. 하지만 내가 어떤 의미로 그와 같은 논의를 하려는지 알게 된다면, 그들은 비록 그것이 낯선 방법으로 표현되어 있을지라도, 본 질적으로 그것이 정통 이론이라는 것에 동의해 주리라 희망한다. 이러한 논의 전개에는 시간이 걸리므로 우선 생명 그 자체의 기원 에서부터 시작한다.
The replicators
자기 복제자
안정을 향하여
태초에는 단순함만이 존재했다. 그 단순한 세계도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설명하기란 매우 어렵다. 하물며 복잡한 질서 - 생물 또는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존재 -가 돌연히 나타난 것을 설명하기는 더욱더 힘든 일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으리라 생각한다.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라는 다원의 학설이 납득할 만한 것인 이유는, 어떻게 단순한 것이 복잡한 것으로 변할 수 있는지, 어떻게 무 질서한 원자가 복잡한 패턴으로 모여 인간을 만들어 내기에 이를 수 있는지 보여 주기 때문이다. 다윈은 인간의 존재에 관한 심원 한 문제의 해답을 제공해 준다. 그것은 지금까지 제기된 해답 중에서 유일하게 그럴듯하다. 지금부터는 이 위대한 학설에 대해 종 래보다 더 일반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진화가 시작되기 이전의 시기부터 시작해 보자.
안정한 것
다윈의 '최적자 생존suruival of the fitest'은 실제로 안정자 생존survival of the stableo)라는 보다 더 일반적인 법칙의 특수한 예다. 세 상은 안정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안정한 것이란 이름을 붙일 수 있을 만큼 지속적으로 존재하거나, 흔하게 존재하는 원자의 집단 이다. 그것은 가령 알프스의 마터호른 Matterhorn 봉우리처럼 이름을 붙이기에 충분할 만큼 오래도록 지속되는 고유한 원자 집단일 수도 있다. 또는 빗방울처럼 그 하나하나는 금세 사라질지라도 집합적인 이름을 붙일 수 있을 만큼 많이 존재하는 어떤 집단일 수 도 있다.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것과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 - 바위나 은하나 바다의 파도 등 -은 다소간 안정한 원자의 패턴이다. 비누 거품은 구형이 되는 성질이 있는데, 이것은 기체가 차 있는 얇은 막의 안정한 형태가 구형이기 때문이다. 우주 선 내에서는 물의 안정한 형태도 구형이지만 지구에서는 중력이 작용하기 때문에 고여 있는 물의 안정한 표면은 편평한 형태다. 소 금의 결정은 입방체다. 왜냐하면 나트륨 이온과 염소 이온이 함께 담겨 있으려면 입방체가 안정하기 때문이다. 태양에서는 모든 원 자 중에서 가장 단순한 수소 원자가 융합하여 헬륨 원자를 만든다. 왜냐하면 태양의 환경에서는 헬륨의 상태가 더 안정하기 때문이 다. 보다 더 복잡한 원자들도, 널리 인정되어 온 학설에 따르면 '대폭발'이 우주를 만들어 낸 직후부터 우주의 여러 별에서 만들어 지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있는 원소의 유래다. 때때로 원자들이 서로 만나면서 화학 반응을 일으키고 결합하여 다소간 안정한 분자를 형성하기도 한다. 이러한 분자는 매우 클 수 있다. 다이아몬드와 같은 결정은 단일 분자로서 안정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 내부의 원자 구조가 무한히 반복되기 때문에 아주 단순한 분자이기도 하다. 오늘날 생물들은 매우 복잡한 큰 분자들 로 구성되며 그 복잡성에는 몇 개의 단계가 있다. 우리 혈액 중의 헤모글로빈은 전형적인 단백질 분자다. 그것은 아미노산이라는 더 작은 분자의 사슬로 되어 있으며, 각 아미노산에는 정해진 패턴으로 배열된 수십 개의 원자가 담겨 있다. 헤모글로빈 한 분자에 는 574개의 아미노산 분자가 있다. 이들 아미노산은 4개의 사슬을 만들며, 이 사슬들이 서로 맞물려 매우 복잡한 구형의 3차원 구 조를 만들어 낸다. 헤모글로빈 분자의 모형은 마치 빽빽한 가시나무 덤불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진짜 가시나무 덤불과 달리, 헤모 글로빈 분자는 불규칙하고 어설픈 패턴이 아니라 삐져나오는 잔가지가 하나도 없는 일정하고 변함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인체 내 에서는 헤모글로빈 분자가 평균 6X 1021개나 존재한다. 아미노산 서열이 같은 두 개의 단백질 사슬을 떼어 내면 마치 두 개의 용 수철처럼 완전히 똑같은 3차원 구조로 돌아간다. 헤모글로빈과 같은 단백질 분자의 가시덤불 형태가 안정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 체내에서 헤모글로빈의 가시덤불은 매초 4X 1014개가 '선호되는' 형태로 만들어지고, 다른 헤모글로빈 분 자는 같은 속도로 파괴되고 있다.
헤모글로빈은 오늘날 볼 수 있는 분자이고, 나는 이를 이용하여 원자가 안정한 패턴으로 되려는 경향이 있다는 원칙을 설명했 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구상에 생물이 생기기이전에 일반적인 물리화학적 과정을 통해 분자의 초보적인 진화가 일어났을 수 있 다는 점이다. 디자인을 누가 했다거나 목적이 있다거나 방향성이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할 필요는 없다. 에너지를 가진 한 무리의 원자가 안정한 패턴을 갖게 되면, 그 원자들은 그대로 머물러 있으려고 할 것이다. 최초의 자연선택은 단순히 안정한 것을 선택하고 불안정한 것을 배제하는 것이었다. 이에 관해서는 전혀 신비로울 것이 없다. 그것은 말 그대로 당연히 그렇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과 같이 복잡한 존재를 완전히 같은 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알맞은 수의 원자를 취하고 약간의 외부 에너지를 더해 그것들이 바른 패턴이 될 때까지 흔든다고 아담이 뿅 하고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수십 개의 원자로 구성된 분자라면 이와 같은 방법으로 만들어질 수 있을지 몰라도 인간은 1027개 이상의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을 만들려면 우주의 전 역사가 마치 한 순간처럼 생각될 정도로 긴 시간 동안 생화학적인 칵테일 셰이커를 흔들어야 하지만, 그러더라도 성공하 지 못할 것이다. 바로 이 시점에서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다윈의 이론이 우리를 구조한다. 분자 형성의 느린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끝날 무렵부터 다윈의 이론이 접수한다.
생명의 기원과 자기 복제자
이제부터 이야기할 쌩명의 기원에 대한 설명은 아무래도 추측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그 기원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 다. 대립되는 이론은 많이 있으나 이들은 모두 어떤 공통된 특징이 있다. 이제부터 시작할 단순화된 설명은 아마도 진실과 그리 동 떨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생명 탄생 이전의 지구에는 어떤 화학 원료가 풍부했을까? 확실하지는 않지만 타당성 있는 것들로는 물, 이산화탄소, 메탄, 암모니아 등 태양계 내 적어도 몇 개의 행성에 있다고 알려진 단순한 화합물이 있다. 화학자들은 초기 지구의 화학적 상태를 재현하려 는 많은 시도를 했다. 가능성 있는 이들 단순한 물질을 플라스크에 넣고 자외선이나 전기 방전(원시 시대의 번개를 인공적으로 모 방한 것) 등의 에너지원을 가한 뒤 2~3주 지나면 대개 플라스크 속에서 흥미로운 것이 나타났다. 처음에 넣었던 분자보다 복잡한 분자가 다량 포함된 연갈색 액체가 생긴 것이다. 특히 그 액체에서 아미노산이 발견됐는데, 이것은 생물체를 구성하는 대표 물질 두 가지 중 하나인 단백질을 구성하는 요소다. 이와 같은 실험이 수행되기 전까지는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아미노산이 생명체가 존 재한다는 증거라고 생각되어 왔다. 가령 화성에서 아미노산이 발견되면 거기에 틀림없이 생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미노산의 존재가 증명된다고 해도 공기 중에 단순한 기체가 있다는 것과 화산이나 햇빛, 번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따름이다. 더 최근에는 생명 탄생 이전 지구의 화학적 상태를 본뜬 실내 실험에서 퓨린과 피리미틴라는 유기물이 생성됐다. 이들은 유전 물질인 DNA의 구성 요소다.
이와 비슷한 과정을 통해, 생물학자나 화학자가 30~40억 년 전에 해양을 구성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원시 수프'가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다. 이 유기물은 아마도 해안 부근의 말라붙은 물거품이나 작게 떠 있는 물방울 속에 국지적으로 농축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다시 태양으로부터 자외선과 같은 에너지의 영향을 받아 결합하여 더 큰 분자가 되었다. 오늘날에는 거대 유기물 분자가 만들어지자마자 박테리아나 기타 생물에 흡수되어 분해되기 때문에 눈에 띌 정도로 오랫동안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박테리아나 그 밖의 여러 생물이 아직 생겨나지도 않았다. 거대 유기물 분자는 점점 더 진해지는 수프 속을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표류했을 것이다.
자기 복제자
어느 시점에 특히 주목할 만한 분자가 우연히 생겨났다. 이들을 자기 복제자라고 부르기로 하자. 자기 복제자는 가장 크지도, 가장 복잡하지도 않았을 수 있으나 스스로의 복제물을 만든다는 놀라운 특성을 지녔다. 그 탄생은 전혀 우연히 발생할 수 없는 것처 럼 보일 수도 있다. 확실히 그랬다. 그것은 매우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떤 사람의 일생에서 그처럼 일어났을 성싶지 않은 일은 실제 로 불가능한 것으로 취급된다. 당신이 축구 경기 내기에서 재미를 못 보는 이유도 이것이다. 그러나 일어날 성싶은 일과 일어날 성싶지 않은 것을 판단할 때 수억 년이라는 세월은 우리에게 낯선 시간이다. 만약 1억 년 동안 매주 축구 경기 내기를 하면 분명히 여 러 차례 횡재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스스로 복제하는 분자는 처음 생각했던 것만큼 상상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또한 그것은 단 한 번만 생기면 충분하다.
자기 복제자를 주형이라고 생각해 보자. 여러 가지 종류의 구성 요소 분자들이 복잡하게 연결된 하나의 거대 분자라고 하자. 이 자기 복제자가 담긴 수프에는 이러한 구성 요소들이 많이 떠다닌다. 이제 각 구성 요소가 자기와 같은 종류에 대하여 친화성이 있 다고 생각해 보자. 그렇게 되면 수프 속의 어떤 구성 요소가 자기 복제자에서 자기와 친화성을 갖고 있는 부분과 만날 때마다 자기 복제자에게 들러붙으려고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들러붙은 구성 요소는 자동적으로 자기 복제자 내 구성 요소의 서열과 같은 식으로 배열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구성 요소들이 최초의 자기 복제자가 만들어졌을 때처럼 안정한 사슬을 만들 것이라 상상하기는 쉽다. 이 과정이 순서에 따라 계속 반복되어 그 산물이 층층이 쌓인다. 이것이 결정체가 만들어지는 방법이다. 한편 두 가닥의 사슬이 세로로 쪼개질 수도 있는데, 그러면 2개의 자기 복제자가 되어 그 각각이 다시 복제를 계속할 수 있다.
더 복잡하게는 각 구성 요소가 동종이 아닌 특정한 다른 종류와 상호 친화성을 갖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 경우 자기 복제자는 동일한 사본을 만들어 내는 주형이 아닌, 일종의 '음각'의 주형이 될 것이다. 그리고 다음에는 '음각'이 본래 '양각'의 사본을 만
드는 것이다. 최초 자기 복제자의 현대판인 DNA 분자가 양 음형의 복제를 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지만, 최초의 복제 과정이 양 양형이었는지 양 음형이었는지는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안정성'이 갑자기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어떠한 총류의 복잡한 분자도 수프 속에 많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분자는 구성 요소들이 운 좋게도 특유의 안정한 형태로 되어야만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자기 복제자가 생겨나자마자 그 사본들은 틀림없이 바닷속에 빠른 속 도로 퍼졌을 것이다. 그러다가 소형의 구성 요소 분자들이 부족해지고 다른 대형 분자의 형성도 드문 일이 되었을 것이다.
복제의 오류
이렇게 하여 똑같은 사본이 많이 만들어진 시점까지 왔다. 그러나 여기서 어떤 복제 과정에서든 나타나게 되는 중요한 특성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복제 과정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오류가 생기게 마련이다. 나는 이 책에 오자가 없기를 바라지만 주의 깊게 찾아보면 한두 개는 발견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아마도 문장의 의미를 왜곡할 만큼 심각한 오자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 오자가 '제1대' 오류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쇄술이 발명되기 이전에 복음서 등의 책이 필사로 출판되던 시대를 생각해 보자. 모든 사본은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 만들었더라도 틀림없이 몇 개의 오류를 갖고 있을 것이고, 그 가운데 몇몇은 고의로 '개량'하려고 시도한 결과일 것이다. 그 사본들이 모두 하나의 원본을 베낀 것이라면 내용이 심하게 곡해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본에서 사본을 만들고 그 사본에서 또 다른 사본을 몇 번씩 만들 경우 오류는 누적되어 심각한 상태가 된다. 우리는 잘못된 사본을 나쁜 것으로 생각한다. 더욱이 인간의 문서인 경우에는 오류가 더 나은 것으로 간주되는 사례는 생각하기 어렵 다. 구약성서의 그리스어 판본을 만든 학자들이 '젊은 여성'이라는 히브리어를 처녀'라는 그리스어로 오역하여 "보라 처녀가 아들을 잉태하여..."*라는 예언으로 이어졌을 때 나는 그들이 큰일을 저지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하튼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생물학적 자기 복제자의 복제 오류는 진정한 의미의 개량으로 이어지며, 몇몇오류의 발생은 생명 진화가 진행되는 데 필수적이었다. 최초의 자기 복제자가 얼마나 정확하게 사본을 만들어 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들의 자손인 현재의 DNA 분자는 인간의 정확한 복사 기술에 견주어 보아도 놀랄 만큼 정확하지만, 그 DNA 분자도 때로는 오류를 일으킨다. 그리고 결국 진화를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오류다. 아마도 최초의 자기 복제자는 더 많은 오류를 저질렀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오류는 생겨났고, 이 같은 오류가 누적되어 왔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처럼 복제 과정에서 오류가 생기고 그것이 확대되면서 원시 수프는 모두 똑같은 복제자 사본의 개체군이 아닌, 같은 조상으로부터 '유래' 한 몇 가지 변종 복제자의 개체군으로 채워졌다. 어떤 변종은 다른 변종보다 그 수가 많았을까? 물론 그랬을 것이다. 어떤 변종은 다른 종류보다 원래부터 안정한 것이었을 수도 있고, 어떤 분자는 일단 만들어지면 다른 것보다 덜 분해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변종은 수프 속에서 비교적 그 수가 많았을 것이다. 그것은 이들의 '수명'이 길었기 때문일 뿐 아니라, 이들이 스스로의 사 본을 만드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길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수명이 긴 자기 복제자는 점점 더 그 수가 많아졌을 것이고, 다른 조건이 같다고 할 때 분자의 개체군에는 수명이 길어지는 '진화적 경향'이 나타났을 것이다.
다산성과 정확성
그러나 아마도 다른 조건이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떤 자기 복제자가 개체군 내에서 퍼져 나가는 데 보다 더 중요한 특성은 바 로 복제의 속도, 즉 '다산성'이었다. 만약 A형의 자기 복제 분자가 평균 주 1회 속도로 자기의 사본을 만드는 한편, B형의 자기 복제 분자는 1시간에 1회씩 사본을 만든다면, A형 분자가 B형 분자보다 훨씬 '장수'한다 할지라도 A형 분자는 수적으로 많이 뒤떨어지 고 말 것이다. 따라서 수프 속의 분자들이 더 높은 '다산성'을 갖는 '진화적인 경향'이 존재했을 것이다. 선택에서 살아남았을 자기 복제자 분자의 세 번째 특징은 복사의 정확성이다. 가령 X형 분자와 Y형 분자가 같은 시간 동안 존재하고 같은 속도로 사본을 만들 지만, X형 분자가 평균 열 번 중 한 번 잘못된 사본을 만드는 데 비하여 Y형 분자는 백 번 중 한 번밖에 잘못된 사본을 만들지 않는 다면, 분명히 Y형 분자 쪽이 수적으로 많아질 것이다. 이 개체군 내의 X형 분자단은 잘못된 사본인 '자식' 그 자체를 잃을 뿐 아니라 현재의 자손 또는 가질 수 있었던 자손 모두를 잃는 것이다.
진화에 관하여 어느 정도라도 알고 있다면 여러분은 위의 설명이 약간 역설적이라고 느낄 것이다. 복제의 오류가 진화에 필요한 선제 조건이라는 설과 자연선택이 정확한 복제를 선호할 것이라는 설은 과연 양립 가능한가? 우리 자신이 진화의 산물이기 때문에 우리는 진화를 막연히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실제로 진화를 '바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이다. 진화란 자기 복제자(그리고 오늘날의 유전자)가 아무리 막으려고 갖은 노력을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일이다. 자크 모노 Jacques Monod는 스펜서 강연(옥스퍼드대학교에서 허버트 스펜서 Herbert Spencer를 기리기 위해 만든 강연 - 옮긴이)에서 이 점을 잘 지적했는데, 그는 "진화론에서 또 하나 신기한 점은 누구나 그것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라고 비꼬아 말했다.
다시 원시 수프로 돌아가 보자. 수프는 여러 종류의 안정한 분자, 즉 오랜 시간 존속하거나 복제 속도가 빠르거나 복제의 정확도 가 높은 안정한 분자들로 가득 차게 되었을 것이다. 이들 세 종류의 안정성을 향한 진화적인 경향이 있다는 것은 다음의 의미를 지난다. 일정한 시간적 간격을 두고 수프에서 두 번 샘플을 취할 경우, 두 번째 샘플에서는 수명, 다산성, 복제의 정확도 면에서 우수한 분자들이 더 많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이것이 본질적으로 생물학자가 말하는 생물의 진화이며, 그 메커니즘도 바로 자연선택이다.
생존 경쟁
그 다음으로 중요한 요소는 다원 자신이 강조한 경쟁이다(비록 다원은 분자가 아닌 동식물에 관하여 기술하고 있지만 말이다).
원시 수프가 무한히 많은 자기 복제자 분자를 담고 있기는 불가능했다. 우선 지구의 크기가 한정되어 있고, 또 다른 제한 요인 역시 중요했을 것이다. 상상해 보면, 주형이 되는 자기 복제자는 복사본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작은 구성 요소 분자들이 풍부하게 존재하는 수프 속에서 떠돌아다녔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복제자가 점점 많아지면서 구성 요소 분자는 점점 더 소진되어 결국 희소하고 귀중한 자원이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 자원을 차지하기 위하여 자기 복제의 여러 가지 변종들 내지는 계동들이 경쟁했을 것이다. 유리한 종류의 자기 복제자의 수를 증가시키는 요인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검토하였다. 별로 유리하지 않은 종류는 경쟁으로 인해 그 수가 줄었고 결국은 그 계통의 대다수가 절멸했을 것이다. 다른 종류의 자기 복제자들 사이에 생존 경쟁이 있었던 것이다. 자기 복제자는 자신이 경쟁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고 그 때문에 고민하지도 않았다. 이 경쟁은 아무런 악의도 없이, 아니 아무런 감정도 없이 행해졌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히 경쟁하고 있었다. 안정성을 높이는 복제상의 오류나 경쟁 상대의 안정성을 감소시키는 새로운 방법은 어떤 것이든 자동적으로 보존되고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량 과정은 누적되는 것이다. 안정성을 증가시켜 경쟁 상대의 안정성을 감소시키는 방법은 점점 교묘해지고 효과적이 되었다. 그중에는 자기와 경쟁하는 종류의 분자를 화학 적으로 파괴하는 방법을 '발견하여' 한때 다른 분자를 구성했던 구성 요소를 자기의 사본을 만드는 데 이용하는 개체도 있었을 것이다. 이들 원시 육식자는 먹이를 얻음과 동시에 경쟁 상대를 제거할 수 있었다. 아마도 어떤 자기 복제자는 화학적으로 자신을 보 호하거나 둘레에 단백질 벽을 만들어 스스로 방어하는 방법을 찾아냈을 것이다. 아마도 이렇게 하여 최초의 살아 있는 세포가 나타나게 되었을 것이다. 자기 복제자는 단순히 존재하는 것만이 아니라 계속 존재하기 위해 자신을 담을 그릇, 즉 운반자까지 만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살아남은 자기 복제자는 자기가 들어앉을 수 있는 생존 기계를 스스로 축조한 것이다. 최초의 생존 기계는 아마도 보호용 외피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더 우수하고 효과적인 생존 기계를 갖춘 새로운 경쟁 상대가 나타남에 따라 살아 가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졌다. 이와 같은 환경 속에서 생존 기계는 더 커지고 더 정교해졌으며 이 과정은 누적되고 계속 진행되었다.
오늘날의 자기 복제자
자기 복제자가 이 세상에서 자신을 유지해 가는 데 사용한 기술이나 책략이 점차 개량되는 데에 끝이 있었을까? 개량을 위한 시간은 충분했을 것이다. 장구한 세월은 도대체 어떤 기괴한 자기 보존 기관을 만들어 냈을까? 40억 년이란 세월 속에서 고대 자기 복제자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절멸하지 않았다. 그들은 과거 생존 기술의 명수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지금 바닷속을 유유히 떠다니는 자기 복제자를 찾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그들은 이미 먼 옛날에 자유를 포기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자 기 복제자는 덜거덕거리는 거대한 로봇 속에서 바깥세상과 차단된 채 안전하게 집단으로 떼 지어 살면서,* 복잡한 간접 경로로 바깥세상과 의사소통하고 원격 조정기로 바깥세상을 조종한다. 그들은 당신 안에도 내 안에도 있다. 그들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창조했다. 그리고 그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우리가 존재하는 궁극적인 이론적 근거이기도 하다. 자기 복제자는 기나긴 길을 지 나 여기까지 왔다. 이제 그들은 유전자라는 이름으로 계속 나아갈 것이며, 우리는 그들의 생존 기계다.
Immortal coils
불멸의 코일
유전자란 무엇인가
우리는 생존 기계다. 여기서 '우리'란 인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모든 동식물, 박테리아, 그리고 바이러스를 포함한다. 지 구상 생존 기계의 총수를 파악하기는 매우 어렵다. 심지어 종의 총수마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실정이다. 예컨대 곤충의 경우 현재 약 3백만 종이 있다고 추정되며, 그 개체 수는 101마리나 된다. 생존 기계는 종류에 따라 그 외형이나 체내 기관이 매우 다양하다.
문어는 생쥐와 전혀 닮지 않았으며, 이 둘은 참나무와 또 다르다. 그러나 그들의 기본적인 화학 조성은 다소 균일하다. 특히 그들이 갖고 있는 자기 복제자, 즉 유전자는 박테리아에서 코끼리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으로 모두 동일한 종류의 분자다. 우리 모두는 같은 종류의 자기 복제자, 즉 DNA라고 불리는 분자를 위한 생존 기계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여러 종류의 생활 방법이 있는데, 자기 복제자는 이 방법을 이용하기 위해 다종다양한 기계를 만들었다. 원숭이는 나무 위에서 유전자를 유지하는 기계이고, 물고기는 물속에서 유전자를 유지하는 기계다. 심지어 독일의 맥주잔 받침에서 유전자를 유지하는 보잘것없는 작은 벌레도 있다. 이처럼 DNA는 매우 신비하게 일한다.
지금까지는 간단하게 설명하기 위해 DNA로 만들어진 현대의 유전자가 원시 수프 속의 최초 자기 복제자와 같은 것이라는 인상을 풍겼다. 논의 전개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실제로는 틀린 것일지도 모른다. 최초 자기 복제자는 DNA와 연관된 분자였을 수도 있지만 전혀 다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만약 다른 것이었다면 그들의 생존 기계를 나중에 DNA가 강탈했다고 말할 수 있다. 만일 그랬다면, 오늘날의 생존 기계에는 최초 자기 복제자의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으므로 최초의 자기 복제자는 완전히 파 괴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케언스 스미스는 우리의 선조인 최초 자기 복제자가 유기 분자가 아닌 금속이나 점토의 작은 조각 같은 무기 결정체가 아니었을까 하는 흥미로운 추측을 했다. 강탈자건 아니건 오늘날 DNA는 생존 기계를 손아귀에 쥐고 있다. 다만 이 책의 11장에서 시사하는 바와 같이 새로운 권력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예외로 한다면 말이다.
DNA 분자는 두 가지 중요한 일을 하는데 그중 하나가 복제다. 즉 DNA 분자는 스스로의 사본을 만든다. 이 과정은 생명 탄생 이래 쉬지 않고 계속되어 왔으며, DNA 분자는 복제를 아주 잘한다. 성장 한 인간은 1015개의 세포로 되어 있지만, 처음 수정되었을 때는 설계도의 원본 하나가 들어 있는 한 개의 세포였다. 이 세포는 각기 설계도 사본을 받은 두 개의 세포로 분열된다. 분열은 계속되어 세포 수는 4,8, 16, 32 ••로 증가하여 몇 조가 되고, 분열할 때마다 설계도 DNA는 거의 착오 없이 복제된다.
DNA가 복제되는 과정과 그것이 어떻게 몸을 만들어 내는 가는 별개의 문제다. 만약 DNA가 실제로 몸을 만들기 위한 설계도 한 세트라고 하면 그 설계도는 어떤 방식으로 몸을 만드는 것일까? 어떻게 몸의 재료로 번역되는 것일까? 여기서 DNA가 하는 두 번 째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보기로 하자. DNA는 다른 종류의 분자, 즉 단백질의 제조를 간접적으로 통제한다. 앞 장에서 언급한 헤모글로빈은 수많은 종류의 단백질 분자의 한 가지 예에 지나지 않는다. 네 종류의 알파벳으로 암호화된 DNA의 메시지는 단순한 기 계적 방법에 의해 또 다른 알파벳으로 번역된다. 이 알파벳은 아미노산의 알파벳이며 단백질 분자를 지정한다.
단백질을 만드는 것은 몸을 만드는 것과 무관하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은 그 방향으로 가는 작은 첫걸음이다. 단백질은 몸을 구성하는 물리적 재료일 뿐만 아니라, 세포 내의 화학적 과정 전반을 섬세하게 제어하여 정확한 시간, 정확한 장소에서 화학적 과정의 스위치를 선택적으로 켰다 껐다 한다. 이와 같은 과정이 어떻게 유아의 발육으로 이어지는가 하는 문제는 발생학자가 몇 십 년, 아니 몇 백 년에 걸쳐 알아내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그 과정이 유아의 발육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유전자는 신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간접적으로 제어하는데, 그 제어 과정은 엄격하게 일방통행이다. 즉 획득 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 일생 동안 아무리 많은 지식과지혜를 얻었을지라도, 유전적 수단으로는 그중 단 한 가지도 자식에게 전해지지 않는다. 새로운 세대는 무에서 시작한다. 몸은 유전자를 불변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유전자가 이용하는 수단일 뿐이다.
유전자가 배 발생을 제어한다는 사실이 진화에서 갖는 중요성은 유전자가 부분적으로나마 장래에 자신이 생존하는 데 책임이 있다는 데 있다. 유전자의 생존은 자신이 살고 있고 그 제조를 도왔던 몸의 효율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먼 옛날 자연선택은 원시 수프 속에서 자유로이 떠다니는 자기 복제자의 차등적 생존에 따라 이루어졌다. 지금의 자연선택은 생존 기계를 잘 만드는 자기 복 제자, 즉 배 발생을 제어하는 기술이 뛰어난 유전자를 선호한다. 그러나 이 점에서 자기 복제자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의식적이거나 의도적이지 않다. 수명, 다산성, 복제의 정확도에 근거하여 경쟁 분자 사이에서 자동적으로 벌어지는 선택이라는 낡은 과정은 아직 도 먼 옛날과 같이 맹목적으로, 그리고 불가항력적으로 계속된다. 유전자는 선견지명이 없다. 미래에 대한 계획이 없다. 유전자는 그저 존재할 뿐이다. 어떤 유전자가 다른 것보다 많을 뿐, 그게 전부다. 그러나 유전자의 수명과 다산성을 결정하는 특성은 예전처럼 단순하지 않다. 전혀 단순하지 않다.
최근 6억 년 동안 자기 복제자는 근육, 심장, 눈 등과 같은 생존 기계 제조 기술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이들 기관은 몇 번 독립적으로 진화했다). 그 이전에 그들은 자기 복제자로서 근본적인 생활양식을 철저히 변화시켰는데, 우리가 논의를 계속 하려면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현대의 자기 복제자는 무리를 짓는 습성이 대단히 강하다. 하나의 생존 기계는 하나가 아닌 수십만이나 되는 유전자를 가진 운 반자다. 몸을 제조한다는 것은 유전자 각각의 기여도를 구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한 협력 사업이다.* 하나의 유전 자가 몸의 여러 부분에 각각 다른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또 몸의 한 부위가 여러 유전자의 영향을 받기도 하며, 한 유전자의 효과 가 다른 많은 유전자들과의 상호 작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기도 한다. 또 그 중에는 다른 유전자 무리의 작용을 제어하는 마스터 유전자 역할을 하는 것도 있다. 설계도로 치면 설계도의 페이지 각각에는 건물의 각 부분에 관한 설명이 적혀 있고, 각 페이지의 내 용은 수많은 다른 페이지의 내용을 참조해야 비로소 의미를 갖는 것과 같다.
유성생식과 유전자의 정의
유성생식은 유전자를 섞는다. 이것은 개체의 몸이란 일시적인 유전자의 조합을 위한 임시 운반체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의 개체에 들어 있는 유전자의 조합은 일시적이지만 유전자 자체는 잠재적으로 수명이 매우 길다. 유전자의 길은 끊임없이 교차하면서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진다. 한 개의 유전자는 수많은 개체의 몸을 연속적으로 거쳐 생존하는 단위라고 생각해도 좋다. 이 것이 이 장의 중심 논제다. 이것은 매우 존경받는 내 동료 몇 사람이 완강하게 동의를 거부하는 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나의 설명 이 다소 장황하더라도 양해하기 바란다. 우선 성에 대한 사실부터 살펴보자. 앞서 인간의 몸을 만들기 위한 설계도가 46권 속에 분명하게 그려져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 말은 지나치게 단순화된 표현이다. 사실은 좀 기괴하다. 46개의 염색체는 염색체 23 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세포의 핵 속에 정리되어 있는 것은 23권의 설계도에 대한 대립되는 두 세트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것들을 12권과 1b권, 2a권과 26권 ... 23a권과 23b권이라고 부르자. 물론 내가 어떤 권이나 어떤 페이지에 붙이는 번호는 순전히 임의적인 것이다.
우리는 부모로부터 각각 염색체를 받는다. 이 각각의 염색체는 부모의 정소 또는 난소 안에서 조립된 것이다. 예컨대 12권, 2a 권, 3a권 ...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이고 1b권, 2b권, 3b권 ..•은 어머니로부터 온 것이다. 실제로는 대단히 복잡하지만 이론적으 로는 어떤 세포의 46개 염색체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서 아버지에게서 유래한 23개와 어머니에게서 유래한 23개를 구별하는 것이 가능하다.
한 쌍으로 된 염색체는 전 생애 동안 서로 물리적으로 붙어 있지도, 가까이 있지도 않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들을 '쌍으로 되었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버지에게서 유래한 각 권의 페이지가 어머니에게서 유래한 특정한 권의 페이지와 대응한다는 의미에서다. 가령 132권의 6페이지와 13b권의 6페이지는 모두 눈동자의 색에 관한 것을 수 있다. 한편에는 '청색'이라고 쓰여 있 고 다른 한편에는 '갈색'이라고 쓰여 있을지도 모른다.
때로는 대응하는 두 페이지에 같은 것이 쓰여 있는 경우도 있으나 눈동자 색깔의 예와 같이 다를 수도 있다. 이들이 모순된 '추 천'을 할 때 몸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 해답은 다양하다. 어떤 경우에는 한쪽에 적힌 내용이 다른 쪽의 내용보다 우세하다. 앞에서 예로 든 눈동자 색깔의 경우 그 사람은 실제로 갈색 눈을 가질 것이다. 왜냐하면 청색 눈을 만드는 설명이 무시되기 때문이다(그렇다고 그 설명이 자손에게 전해지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무시되는 유전자를 열성 유전자라고 한다. 열성 유전자의 반대 는 우성 유전자다. 갈색 눈을 만드는 유전자는 청색 눈을 만드는 유전자에 대해 우성이다. 대응하는 두 페이지가 모두 청색 눈을 추천할 경우에만 청색 눈이 만들어진다. 더 일반적인 경우에는 대립하는 유전자가 동일하지 않을 때 그 결과가 일종의 타협으로 나타난다. 즉 몸은 중간 형태를 띠거나 양쪽과 전혀 다른 것이 된다.
갈색 눈의 유전자와 청색 눈의 유전자같이 두 개의 유전자가 염색체의 같은 위치에서 경쟁할 경우, 이들을 서로의 대립 유전자 allele라고 부른다. 대립 유전자라는 말을 경쟁자라는 말과 동의어라고 하자. 건축가 설계도의 각 권을, 페이지를 마음대로 뺐다 끼 웠다 할 수 있는 바인더라고 생각해 보자. 13권에는 6페이지가 있을 텐데, 5페이지와 7페이지 사이에 들어갈 수 있는 6페이지가 몇 종류 있다. 어떤 것에는 '청색 눈', 다른 것에는 '갈색 눈'이라고 쓰여 있다. 또 개체군 내에는 녹색 등 다른 색이 쓰여 있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전체 개체군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13번 염색체의 6페이지에 해당하는 대립 유전자는 대여섯 개 정도 있는 듯하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라도 13번째 권의 염색체는 2개만 갖는다. 따라서 한 사람이 6페이지에 갖는 대립 유전자는 최대 두 개가 된다. 즉 청색 눈을 가진 사람처럼 같은 대립 유전자를 갖거나, 전체 개체군에 있는 대여섯 개 중에서 어떤 것이든 두 개의 대립 유전자를 갖는다.
물론 자기가 직접 전체 개체군 내 이용 가능한 유전자 풀로부터 유전자를 선택할 수는 없다. 항상 모든 유전자는 개개의 생존 기 계 속에 구속되어 있다. 유전자는 우리가 수태될 때 할당받는 것이므로, 이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 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개체군의 유전자들을 일반적으로 유전자 풀로 보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유전자 풀이란 유전학자가 사용하는 학술 용어다. 유성생식은 정해진 방법대로 이뤄지기는 하지만 유전자를 서로 섞어서 붙이는 과정이기 때문에 유 전자 풀이라는 말로 추상화하는 것은 상당히 유용하다. 이제 살펴보겠지만 바인더에서 페이지나 페이지의 뭉치를 빼거나 끼워 넣는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1개의 세포가 2개로 갈라지는 정상적인 세포 분열에서 그 각각의 세포는 46개의 모든 염색체 사본을 전부 받는다. 이처럼 정상적인 세포 분열을 체세포 분열이라고 한다. 감수 분열이라고 하는 다른 형태의 세포 분열이 있는데, 이는 생식 세포, 즉 난자 또는 정자를 만들 때에만 일어나는 세포 분열이다. 난자와 정자는 염색체를 46개가 아닌 23개밖에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특이한 세포다. 물론 이 수는 46개의 절반으로, 이들이 수정되면 새로운 개체를 만들기에 딱 맞는 수다. 감수 분열은 정소와 난소에서만 일어나는 특수한 형태의 세포 분열이다. 거기에서는 46개 염색체의 완전한 두 세트를 갖는 1개 세포가 분열하여 한 세트에 23개의 염색체를 갖는 생식 세포가 만들어진다(이 설명에서는 인간의 염색체 수를 쓰기로 하자).
23개의 염색체를 가진 정자는, 정소 내 46개의 염색체를 가진 보통의 세포가 감수 분열하여 만들어진다. 하나의 정자 세포에 어 떤 염색체 23개가 들어가는 걸까? 중요한 사실은 46개 중에서 아무렇게나 23개가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것이다. 즉 13권의 사본이 두 개 있고 17권의 사본이 하나도 없는 상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론적으로는 정자 하나에 이를테면 어머니로부터 받은 염색체 전부, 즉 16권, 2b권, 3b권, ·.236권을 넣는 것이 가능하다. 이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경우, 자식은 그 유전자의 절반 을 친할머니로부터 물려받기 때문에 친할아버지로부터는 아무것도 물려받지 않은 셈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처럼 염색체가 한 뭉치로 배분되지는 않는다. 실제로 벌어지는 일은 더 복잡하다. 권(염색체)을 낱장을 뺐다 끼웠다 할 수 있는 바인더로 가정했던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정자가 만들어질 때 어떤 한 페이지 또는 여러 페이지 뭉치가 빠지고, 짝이 되는 권에서 이에 해당하는 페이 지나 뭉치와 바뀌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정자에서 제1권은 1a권의 첫 페이지에서 65페이지까지, 그리고 그다음은 16권의 66페 이지부터 끝까지 이어져 있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나머지 22권도 만들어진다. 따라서 어떤 한 개체에서 만들어진 모든 정자 세포는 서로 다르다. 그의 모든 정자 세포가 46개의 염색체로 이루어진 동일한 세트의 작은 조각에서부터 23개의 염 색체를 조립하여 만들어졌더라도 말이다. 난자는 난소 내에서 같은 식으로 만들어지고 역시 모든 난자 세포는 서로 다르다.
실제로 벌어지는 이 혼합 메커니즘은 꽤 잘 알려져 있다. 정자 또는 난자가 만들어지는 과정 중에 아버지 쪽의 염색체 조각들은 서로 떨어져서 어머니 쪽 염색체의 해당 조각과 바뀐다(여기서 아버지쪽, 어머니 쪽이라고 하는 것은 그 정자를 만드는 개체의 부 모에게서 유래하는 염색체라는 의미다. 즉 그 정자가 수정하여 만드는 자손의 할아버지• 할머니에게서 유래하는 염색체를 뜻한다).
염색체의 조각이 교환되는 이 과정을 교차라고 한다. 이 교차 현상은 이 책의 논의 전반에 걸쳐 매우 중요하다. 교차라는 현상이 나 타나는 이상, 당신이 현미경으로 자기 정자(당신이 여자라면 난자)의 염색체를 들여다보며 아버지로부터 온 염색체와 어머니로부터 온 염색체를 구별하려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이것은 보통의 체세포와는 현저히 대조적이다). 한 개의 정자에 들어 있는 염 색체는 어떤 것이든 어머니 쪽 유전자와 아버지 쪽 유전자의 모자이크로 만들어진다.
유전자를 책의 페이지에 비유한 것은 여기서 무너지기 시작한다. 바인더에서는 한 페이지 전체가 삽입되거나 삭제되거나 교환되거나 하지만 한 페이지의 일부분이 삭제되거나 교환되거나 하는 일은 없다. 그렇지만 유전자 복합체는 뉴클레오티드의 문자로 이어진 긴 끈이기 때문에 페이지처럼 분명히 나뉘지 않는다. 명확히 하자면, 단백질을 지정하는 메시지에 쓰이는 것과 똑같은 네 알파벳 글자로 된 '단백질 사슬의 종결 메시지'와 단백질 사슬의 시작 메시지'가 있다. 이들 두 개의 메시지 사이에는 한 개의 단백 질을 지정하는 암호화된 설명서가 들어 있다.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의 유전자를, 시작과 종결 메시지 사이에서 한 개의 단백질 사슬을 지정하는 뉴클레오티드 문자의 서열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시스트론이 이와 같이 정의된 단위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고, 어떤 사람들은 유전자와 시스트론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교차는 시스트론 간의 경계선을 고려하지 않는다.
시스트론 간뿐만 아니라 시스트론 내에서도 쪼개지는 경우가 있다. 마치 설계도가 각각 떨어진 페이지에 적혀 있는 것이 아니라, 46개의 두툼한 두루마리 테이프에 적혀 있는 것과 같다. 시스트론의 길이는 일정치 않다. 어떤 시스트론이 어디에서 끝나고 다음
의 시스트론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아는 유일한 방법은, 두루마리 테이프에 적힌 암호를 읽고 '종결 메시지'와 시작 메시지'를 찾는 것이다. 교차는 어머니 쪽의 두루마리 테이프와 그에 상응하는 아버지 쪽의 두루마리 테이프를 맞잡아 들고, 그것에 적힌 내용 이 무엇이든 대응하는 부분을 잘라서 바꾸는 것과 같다.
이 책의 제목으로 쓰인 유전자라는 말은 하나의 시스트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미묘한 무엇인가를 가리킨다. 물론 내 정의가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유전자에 대해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정의는 없다. 설령 있다손 치더라도 그 정의에 무언가 신성한 것은 없다. 목적에 따라 원하는 대로 용어를 정의하면 된다. 다만 그 정의는 명확하며 오해의 여지가 없어 야 한다. 여기서 내가 사용하고 싶은 정의는 윌리엄스의 정의다.* 유전자는 자연선택의 단위로서 그 역할을 할 수 있을 만큼 긴 세 대에 걸쳐 지속될 수 있는 염색체 물질의 일부로 정의한다. 앞 장에서 사용한 말로 표현하면, 유전자는 복제 정확도가 뛰어난 자기 복제자라고 할 수 있다. 복제의 정확도란 사본 형태로서의 수명을 나타내는 또 다른 표현이다. 여기서는 이것을 단순히 수명이라고 줄여 부르기로 한다. 이 정의를 어느 정도 정당화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유전 단위
유전 단위는 짧으면 짧을수록 더 오래 살 것이다(세대 수로 따져서). 특히 교차에 의해 쪼개 질 확률이 적을 것이다. 감수 분열로 정자나 난자가 만들어질 때마다 한 염색체당 평균 1회 교차가 일어나며, 그 교차가 염색체의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 보자. 염색체 길이의 절반에 이르는 대단히 큰 유전 단위를 생각하면, 그 단위가 1회 감수 분 열에서 쪼개질 확률은 50퍼센트다. 우리가 생각하는 유전 단위가 염색체 길이의 1퍼센트밖에 안 된다면, 1회 감수 분열에서 절단 될 확률이 1퍼센트밖에 안 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그 단위가 자손의 몸에 담겨 여러 세대에 걸쳐 살아남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하나의 시스트론은 염색체 길이의 1퍼센트보다도 훨씬 작을 것이다. 인접한 시스트론 몇 개로 이루어진 시스트론군도 교차 때문에 해체되기 전까지 수 세대에 걸쳐 살아남을 수 있다.
유전 단위의 평균 수명은 편의상 세대 수로 나타낼 수 있고, 그것을 다시 햇수로 환산할 수도 있다. 만약 하나의 염색체 전체를 유전 단위로 가정하면, 그것은 한 세대밖에 이어지지 않는다. 당신이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은 8a번 염색체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것은 당신이 수태되기 직전에 당신 아버지의 정소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전 세계의 역사를 통틀어 그 이전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 았다. 그것은 감수 분열의 혼합 과정으로 생겨났다. 즉 당신의 친할아버지, 친할머니로부터 온 염색체 일부분을 모아 만들어진 것 이다. 그 염색체는 모두 특정한 한 개의 정자 내에 들어 있었고, 유일한 존재였다. 그 정자는 수백만의 거대한 함대를 이루는 작은 배들 가운데 한 척이었고, 배들은 일제히 당신의 어머니 쪽을 향해 전진했다. 이 특별한 정자는 (당신이 이란성 쌍생아가 아니라면) 당신 어머니의 난자 중 하나에 닻을 내린 유일한 배였다. 이것이 당신이 지금 존재하는 이유다. 우리가 고찰하는 유전 단위, 즉 당 신의 8a번 염색체는 당신의 나머지 모든 유전 물질과 함께 자기 복제를 시작했다. 지금 그것은 복제된 형태로 당신의 몸 곳곳에 존 재한다. 그러나 당신이 자식을 만들 차례가 되면 이 염색체는 당신이 난자 또는 정자를 만들 때 파괴될 것이다. 그 일부는 당신 어머니 쪽의 8b번 염색체의 일부와 교환될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생식 세포에서 새로운 8번 염색체가 만들어질 것이다. 그것은 예 전의 염색체보다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지만, 가능성이 거의 없는 우연의 일치가 일어나지 않는 이상 아주 다르고 아주 유 일하다. 염색체의 수명은 한 세대이다.
더욱 작은 유전 단위, 예컨대 당신의 8a번 염색체 길이의 1/100 길이인 유전 단위의 수명은 어떨까? 이 단위 역시 당신의 아버 지에게서 온 것이지만 처음부터 당신의 아버지 속에서 모아진 것은 아닐 가능성이 크다. 이전의 추론을 적용해 보면 당신 아버지가 부모 중 한 사람에게서 그 유전 단위를 그대로 물려받았을 확률이 99퍼센트에 달하기 때문이다. 그 유전 단위가 아버지의 어머니, 즉 당신의 친할머니로부터 온 것이라고 해 보자. 아까와 마찬가지로 친할머니가 자신의 부모 중 한 사람으로부터 그 단위를 그대로 물려받았을 확률 역시 99퍼센트다. 이렇게 작은 유전 단위의 선조를 멀리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은 최초의 창조자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 유전 단위는 어느 단계에선가 당신의 조상 가운데 한 사람의 정소 또는 난소 내에서 창조된 것임에 틀림없다.
여기서 내가 ' 창조'라는 말을 쓰는 것은 다소 특수한 의미에서라는 점을 다시 한 번 밝히고자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유전 단위를 구성하는 더 작은 소단위는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다고 봐야 한다. 우리의 유전 단위가 어느 시점엔가 창조되었다는 것은, 이러한 소단위의 특정한 배열(유전 단위를 규정하는 것은 바로 배열이다)이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 창조 시기는 예컨대 당신의 할아버지•할머니 세대 정도로 아주 최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주 작은 단위를 생각하면, 그것은 좀 더 먼 조상, 즉 원숭이와 닮은 인간 이전의 조상에서 최초로 조립되었을 지도 모른다. 게다가 당신 몸 안의 작은 유전 단위는 그만큼 먼 미래까지 그대로 살아남아 당신의 먼 후대에까지 전해질지도 모른다.
어떤 개체의 자손은 하나의 계통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갈래로 갈라진다는 것도 기억하자. 당신의 8a번 염색체의 그 짧 은 일부분을 '창조한' 것이 당신의 조상 중 누구든 간에, 그 사람에게는 분명히 당신 외에도 다른 자손이 많이 있을 것이다. 당신의 유전 단위 중 하나는 당신의 6촌 형제에게도 있을 수 있다. 그것은 내게 있을 수도, 영국 수상에게 있을 수도, 당신이 키우는 개에게
있을 수도 있다. 아주 옛날로 되돌아가면 우리는 다 조상이 같기 때문이다. 또 한 동일한 작은 단위는 우연히 독립적으로 여러 번 조립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단위가 작다면 이런 우연한 일이 일어나는 것도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가까운 친척 이라도 하나의 염색체가 완전히 당신과 같은 사람은 없다. 유전 단위가 작으면 작을수록 다른 개체도 이를 갖고 있을 가능성이 높 아진다. 즉 사본 형태로 이 세상에 여러 번 나타날 확률이 매우 높아지는 것이다. 새 유전 단위가 만들어지는 일반적인 방법은 전부 터 존재하던 소단위가 교차를 통해 모이는 것이다. 또 하나의 방법은 - 드문 일이지만 진화상 매우 중요하다 - 점 돌연변이라는 것이다. 점 돌연변이는 마치 어떤 책에 오자가 단 하나 있는 것과 같은 오류다. 그것은 드문 일이기는 하지만, 유전 단위가 길면 길 수록 그중 어느 곳엔가 나타나는 돌연변이로 그 유전자 단위가 변할 가능성이 크다.
또 다른 드문 종류의 오류 또는 돌연변이에는 역위가 있다. 염색체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가 거꾸로 된 방향으로 다시 붙는 것이다. 앞에서처럼 설계도의 비유를 들자면, 역위가 발생하면 페이지 번호를 다시 매겨야 한다. 때로는 염색체의 일부가 단순히 거 꾸로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염색체의 엉뚱한 부분에 붙는 경우도 있고, 아주 다른 염색체에 붙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한 권에 서 다른 권으로 페이지 뭉치를 옮기는 것과 같다.
일반적으로 이런 종류의 오류가 해롭기는 하지만 중요한 이유는, 때때로 이로 인해 유전 물질 조각들이 가까이 연관되어 함께 일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양쪽이 모두 존재할 때만 이로운 효과를 내는 2개의 시스트론(상호 보완적이거나 서로의 작용을 증강시 키는)은 아마도 역위에 의해 서로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자연선택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새로운 유전 단위'를 선호할 수 있고, 이 경우 그 유전 단위는 미래의 개체군 내에 퍼질 것이다. 유전자 복합체가 여러 해에 걸쳐 이와 같은 방법으로 대 폭 재조립되고 '편집'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불멸의 유전자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자연선택은 각 실체의 차등적 생존을 의미한다. 생존하는 것이 있으면 죽는 것도 있는데, 이 선택적인 죽 음이 세상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그 조건이란 각 실체가 수많은 사본의 형태로 존재 해야 하며, 적어도 그 실체의 일부는 진화의 시간 중 상당 기간 동안 (사본의 형태로) 생존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작은 유전 단위는 이 조건을 충족시키지만 개체, 집단 그리고 좋은 그렇지 않다. 유전 단위를 실제로 더 이상 나눌 수 없고 독립적인 입자로 다룰 수 있음을 입증한 것은 그레고르 멘델의 위대한 업적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것이 약간은 지나치게 단순화된 견해 라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시스트론까지도 때로는 쪼개지는 경우가 있고, 동일 염색체상에 위치한 두 개의 유전자는 완전히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입자라는 이상적인 속성에 근접한 단위로서 유전자를 정의하였다.
유전자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존재는 아니지만 좀처럼 쪼개지지 않는다. 유전자는 어떤 개체의 체내에 확실히 존재하거나 아니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유전자는 할아버지, 할머니로부터 손자, 손녀에 이르기까지 다른 유전자와 섞이지 않고 그대로 중간 세대를 거쳐 여행한다.
유전자 또 다른 측면은 그것이 노쇠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유전자가 백만 년을 살았다고 해서 백 년쯤 산 유전자보다 쉽게 죽는 것은 아니다. 유전자는 자기 마음대로 몸을 조작하며, 죽을 운명인 몸이 노쇠하거나 죽기 전에 그 몸을 버리면서 세대를 거쳐 몸에서 몸으로 옮겨 간다.
유전자는 불멸의 존재다. 아니, 불멸의 존재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유전 단위로 정의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개개의 생존 기계 인 우리는 수십 년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존재하는 유전자의 기대 수명은 10년 단위가 아닌, 1백만 년 단위로 측정되 지 않으면 안된다.
유성생식을 하는 종에서 개체는 자연선택의 중요한 단위가 되기에는 너무 크고 수명이 짧은 유전 단위다.* 나아가 개체의 집단 은 한층 더 큰 단위다. 유전적으로 말하면 개체와 집단은 하늘의 구름이나 사막의 모래바람 같은 것이다. 그들은 일시적인 집합 내 지는 연합이다. 진화적 시각에서 보면 그들은 불안정하기 이를 데 없다. 개체군은 장기간 지속될 수 있다지만 다른 개체군과 끊임없이 섞이면서 정체성을 잃는다. 또한 개체군은 내부적으로도 진화를 겪는다. 개체군은 자연선택의 단위가 될 수 있을 만큼 독립된 존재가 아니다. 다른 개체군보다 선호되어 '선택될' 만큼 안정적이지도 않고 단위로 보기도 어렵다.
개체의 몸은 그것이 유지되는 한 충분히 독립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도대체 얼마나 유지될 수 있는가? 개체들은 서로 다르다. 각 실체의 사본이 한 개씩밖에 없을 때에는 그들 실체 간에 선택을 통해 진화가 나타날 수 없다. 유성생식은 자기 복제가 아니 다. 개체군이 다른 개체군으로 인해 오염되듯이 개체의 자손은 그 개체의 성적 파트너로 인해 오염된다. 당신의 자식은 당신의 절 반 밖에 안 되고, 당신의 손자는 당신의 1/4밖에 안 된다. 그리하여 겨우 몇 세대가 지났을 뿐이지만 당신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이란 도 말이다.
개체는 안정적이지 않다. 정처 없이 떠도는 존재다. 염색체 또한 트럼프 카드의 패처럼 섞이고 사라진다. 그러나 섞인 카드 자체는 살아남는다. 바로 이 카드가 유전자다. 유전자는 교차에 의해서 파괴되지 않고 단지 파트너를 바꾸어 행진을 계속할 따름이다.
물론 유전자들은 계속 행진한다. 그것이 그들의 임무다. 유전자들은 자기 복제자이고 우리는 그들의 생존 기계다. 우리의 임무를 다하면 우리는 폐기된다. 그러나 유전자는 지질학적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이며, 영원하다.
유전자는 다이아몬드처럼 영원하지만 다이아몬드와 다른 면이 있다. 다이아몬드의 결정은 원자들의 일정한 배열 패턴으로 그 존재가 지속된다. DNA 분자는 그와 같은 영구성은 가지고 있지 않다. 물리적 DNA 분자는 어느 것이든 그 생명이 매우 짧다. 분명 히 한 생애보다는 짧다. 아마도 수개월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DNA 분자는 그 사본 형태로 1억 년 동안 살아남을 수 있다. 더욱이 원시 수프 속의 고대 자기 복제자와 똑같이, 특정 유전자의 사본이 온 세상에 퍼질 수도 있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오늘날의 복제자들은 모두 생존 기계인 몸속에 온전히 들어앉아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유전자를 정의하는 속성은 유전자가 사본 형태로 거의 불멸이라는 것이다. 유전자를 하나의 시스트론으로 정의하는 것은 어떤 목적에서는 적절할지 모르나, 진화를 논하려면 그것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얼마나 확대하느 냐는 우리가 왜 정의를 내리려고 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우리는 자연선택의 실제 단위를 알아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연선택에 성공하는 단위가 가져야 할 특성을 먼저 파악해야 한다. 앞 장에서 썼던 용어로 말하면 그 특성은 장수, 다산, 복제의 정확성 이다. 그러므로 '유전자'를 간단히 이와 같은 특성을 갖는(잠재적으로라도) 가장 큰 실체라고 정의하자. 유전자는 많은 사본의 형태 로 존재하는 장수하는 자기 복제자다. 그러나 무한히 사는 것은 아니다. 다이아몬드라 해도 말 그대로 영원하지는 않으며, 시스트론도 교차에 의해 둘로 갈라지는 경우가 있다. 유전자는 자연선택의 단위가 될 만큼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는, 충분히 짧은 염색체의 한 조각으로 정의된다.
'오랫동안'이란 정확하게 얼마나 긴 시간을 뜻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정해진 답은 없다. 그것은 자연선택의 '압력'이 얼마나 강하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즉 '나쁜' 유전 단위가 '좋은' 대립 유전 단위보다 얼마만큼 쉽게 소멸할 것인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이것은 양적인 문제이며, 경우에 따라 다르다. 실제 자연선택의 단위 중 가장 큰 것 - 유전자 -은 보통 시스트론과 염색체 사이 중간 정도일 것이다.
유전자가 자연선택의 기본 단위에 대한 훌륭한 후보가 될 수 있는 것은 유전자의 잠재적 불멸성 때문이다. 이제 '잠재적'이라는 말을 강조해야 할 때가 왔다. 어떤 유전자는 백만 년을 살 수' 있지만 많은 새로운 유전자는 최초의 한 세대조차 넘기지 못한다. 소 수의 유전자가 그 고비를 넘기는 것은 운이 좋아서일 수도 있지만 대개는 그 유전자가 중요한 무언가, 즉 생존 기계를 잘 만드는 능 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 유전자는 자기가 들어 앉아 있는 몸의 배 발생에 영향을 주어 그 몸이 경쟁 유전자, 즉 대립 유전자의 영향하에 있을 때보다 조금 더 잘 살아남고 더 많이 번식하도록 한다. 예컨대 '좋은' 유전자는 자기가 들어앉아 있는 몸이 긴 다리 를 갖게 하여 포식자로부터 잘 도망칠 수 있게 함으로써 자기의 생존을 확실하게 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개별적인 예이지 보 편적인 예는 아니다. 긴 다리를 갖는 것이 항상 장점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두더지에게는 긴 다리가 약점이 될 수 있 다. 세부적인 사항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좋은(즉 장수하는) 유전자 모두에 공통되는 어떤 보편적인 특성을 생각할 수 있지 않을 까? 반대로 어떤 유전자를 '나쁜', 혹은 오래 살지 못하는 유전자로 규정짓는 특성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몇 가지 보편적인 특징이 있을 수도 있으나, 이 책의 내용과 특히 관련된 특성은 바로 유전자 수준에서 이타주의는 나쁘고 이기주의는 좋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에 대한 정의에서부터 필연적으로 얻게 되는 것이다. 유전자는 생존을 놓고 그 대립 유전자와 직 접 경쟁한다. 유전자 풀 내의 대립 유전자들은 다음 세대의 염색체 위에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는 경쟁자이기 때문이다.
유전자 풀 속에서 대립 유전자 대신 자기의 생존 확률을 증가시키는 유전자는 어느 것이든 그 정의상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유전 자는 이기주의의 기본 단위인 것이다.
조정 선수 한 명이 옥스퍼드대학교와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조정 경기에서 이길 수는 없다. 그에게는 여덟 명의 동료가 필요하 다. 신수 각각은 항상 특정 자리에 앉는 전문가다. 앞 노를 것든, 잎 노를 젓든, 키를 잡든, 각자 역할을 맡는다. 노를 젓는 것은 협력 작업이지만, 그중에는 다른 사람보다 실력이 더 나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코치가 여러 명의 후보자 중에서 앞 노 전문, 키 전문 등을 골라 이상적인 조정 팀을 꾸린다고 해 보자. 그리고 그가 다음과 같이 선수를 뽑았다고 가정하자. 매일 각 위치의 선수 후보자들을 무작위로 조합하여 시험 삼아 세 개의 팀을 짠 뒤 서로 경쟁시킨다. 이것을 몇 주간 계속하다 보면 이긴 배에는 종종 동일 인물이 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우수 선수로 기록된다. 또 항상 뒤진 팀에 있는 선수들도 있다. 이들은 결국 탈락한다. 그러나 특별히 팔심이 좋은 선수라도 때로는 뒤진 팀에 있는 경우가 있다. 다른 멤버들이 못하기 때문이거나 운이 나쁘게도 강한 역풍이 분다든지 하기 때문이다. 가장 뛰어난 선수들이 이긴 배에 있다는 것은 단지 평균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이 선수들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유전자다. 배에서 각 위치를 차지하려는 경쟁자는 염색체상의 동일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대 립 유전자다. 노를 빨리 짓는 것은 잘 살아남을 수 있는 몸을 만드는 것과 같다. 바람은 외부 환경에 해당한다. 교체 선수 집단은 유 전자 풀이다. 하나의 몸의 생존에서 모든 유전자는 한 배에 타고 있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좋은 유전자가 나쁜 동료 유전자와 팀을 이뤄 치사 유전자와 한 몸속에 들어앉는 일도 자주 있다. 이 경우 치사 유전자는 그 몸이 어릴 때 죽게 하는데, 이때 좋은 유전자도 다른 유전자와 함께 파괴된다. 그러나 이것이 그 유전자가 담겨 있는 유일한 몸은 아니다. 좋은 유전자의 똑같은 사본들이 치사 유 전자를 갖지 않는 다른 몸속에서 살고 있다. 좋은 유전자 사본들은 때로는 나쁜 유전자와 한 몸에 들어 있기 때문에 나쁜 유전자의 영향에 휩쓸려 사라지기도 하고, 또 머물고 있는 몸이 벼락을 맞는 등 불운한 일에 휩쓸려서 죽기도 한다. 그러나 정의상 행운이나 불운은 무작위로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늘 사라지는 쪽에 있는 유전자는 불운한 것이 아니라 나쁜 유전자다.
훌륭한 조정 선수의 자질 중 하나는 팀워크, 즉 팀 내 다른 선수들과 협조하는 능력이다. 이것은 강한 근육만큼이나 중요하다. 나 비의 예에서 말한 것처럼, 자연선택은 역위에서와 같이 염색체 일부가 대규모로 이동하는 것을 이용하여 무의식적으로 하나의 유
전자 복합체를 편집'하고, 이를 통해 잘 협조하는 유전자를 모아서 가까이 연관된 집단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이 말은 물리적으로는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은 유전자들이 상호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선택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다음 세대의 몸속에서 다시 만날 가능성이 있는 대부분의 유전자, 즉 유전자 풀 내 다른 유전자 모두와 잘 협조하는 유전자는 유리한 셈이다.
이를테면 유능한 육식 동물의 몸에는 고기를 자르는 이빨, 고기를 소화시키기에 알맞은 창자 등을 포함한 여러 가지 특성이 필 요하다. 한편 유능한 초식 동물은 풀을 씹기 위한 평평한 어금니와, 육식 동물과는 다른 종류의 소화 작용이 벌어지는 훨씬 더 긴 창자를 필요로 한다. 초식 동물의 유전자 풀에서 육식용의 날카로운 이빨을 만들어 내는 새로운 유전자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육식이 일반적으로 좋지 않은 발상 이어서가 아니라, 알맞은 형태의 창자와 기타 육식 생활에 필요한 특성들을 두루 갖 추고 있지 않으면 고기를 효율적으로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육식용의 날카로운 이빨을 만드는 유전자가 본래 나쁜 유전자는 아니 다. 그것은 초식성을 나타내는 유전자가 많이 존재하는 유전자 풀 속에 있을 때에만 나쁜 유전자다.
이 개념은 미묘하고 복잡하다. 어떤 유전자의 '환경'이 대부분 다른 유전자로 구성되어 있고, 그 환경을 구성하는 유전자들 각각 은 또 다른 유전자로 구성된 환경과 얼마나 잘 협력하느냐에 따라 선택되기 때문에 복잡한 것이다. 이러한 미묘한 점을 설명해 줄 수 있는 비유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일상생활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5장에서 소개하게 될 인간에 대 한 '게임 이론'이다. 5장에서는 동물 개체 간의 공격적인 경쟁과 관련하여 게임 이론을 살펴볼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 요점에 대한 논의를 잠시 미루고 5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언급하려고 한다. 이제 이 장의 중심 개요로 돌아오자. 이 장의 중심 개요는, 자연 선택의 기본 단위로 가장 적합한 것은 종도 개체군도 개체도 아닌, 유전 물질의 작은 단위(이것을 '유전자'라고 부르면 편리하다)라 는 것이다. 이 논의의 기초가 되는 것은 유전자가 불멸인 데 비하여 몸 이상의 큰 단위는 일시적이라는 가정이었다. 이 가정은 두 가지 사실, 즉 유성생식과 교차가 있다는 사실과, 개체는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에 근거를 둔 것이다.
'치사 유전자'란 자신을 지니고 있는 개체를 죽이는 유전자다. 반 치사 유전자는 개체가 쇠약해지도록 하여 다른 원인에 의해 서 죽을 가능성이 높아지도록 한다. 모든 유전자는 생애 중 특정 단계에서만 몸에 최대 영향을 미치는데, 치사 유전자와 반치사 유 전자도 예외는 아니다. 대부분의 유전자는 배아기에 영향을 미치지만 어떤 유전자는 유아기에, 어떤 유전자는 청년기에, 또 어떤 것은 중년기에, 그리고 어떤 것은 노년기에 영향을 미친다(나비 애벌레와 그것이 변태한 나비 성충은 똑같은 유전자 세트를 가지 고 있다는 점을 기억하기 바란다). 분명히 치사 유전자는 유전자 풀에서 제거될 것이다. 그러나 후기에 작용하는 치사 유전자가 초기에 작용하는 치사 유전자에 비해 유전자 풀 내에서 더 안정하게 유지된다는 사실 또한 확실하다. 늙은 몸에서 치사 효과를 내는 유전자가 개체가 번식을 어느 정도라도 하고 나서 그 치사 효과를 나타낸다면 그 치사 유전자는 유전자 풀 내에서 성공적일 수 있 다. 이를테면 늙은 몸에 암을 유발하는 유전자는 개체가 암이 발현되기 전에 번식하기 때문에 수 많은 자손에게 전해질 수 있다. 한 편 젊은 성인에게서 암을 일으키는 유전자는 그다지 많은 자손에게 전해지지 않을 것이며, 어린아이에게서 치명적인 암을 일으키는 유전자는 자손에게 전혀 전해지지 않을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노쇠 현상은 후기에 작용하는 치사 유전자와 반치사 유전자 가 유전자 풀에 축적되기 때문에 나타나는 부산물일 뿐이다. 이들 치사 및 반치사 유전자는 단지 후기에 작용한다는 이유만으로 자 연선택의 그물 구멍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에더워가 강조하는 점은, 선택은 다른 치사 유전자의 작용을 늦춰 주는 유전자를 선호하고, 좋은 유전자의 작용을 빠르게 하는 유전자도 선호한다는 것이다. 진화의 많은 부분은 유전자 활동의 개시 시기를 유전적으로 제어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는지도 모른 다.
인간의 수명***
이 이론의 장점 중 하나는 이에 근거하여 재미있는 추측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어떤 연령, 예컨대 40세 이전에는 번식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수백 년 후에는 이 연령 제한을 50세로 올리고 그 이후에도 조금씩 늘려 간다. 이러한 방법으로 인간의 수명을 수백 살까지 연장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정책을 진지하게 시행하려는 사람은 없겠지만 말이다.
두 번째 방법은 유전자를 '속여서' 자신이 들어 있는 몸을 실제 연령보다 젊다고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렇게 하려면 나이가 들면서 일어나는 몸속의 화학적 환경 변화를 알아야 한다. 후기에 작용하는 치사 유전자의 '스위치'를 켜는 '신호'가 이러한 변화 중 하나일 수 있다. 젊은 몸의 화학 특성을 총내 냄으로써 후기에 작용하는 유해한 유전자의 '스위치'가 커지는 것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흥미로운 것은 노화의 화학 신호 그 자체가 통상적인 의미로 반드시 유해할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문질 S 가 젊은 개체보다 높은 개체의 몸에 많이 농축되어 있다고 하자. S는 그 자체로는 별로 해롭지 않은데, 아마도 먹이에 함유되어 있 던 어떤 물질이 나이를 먹음에 따라 점점 몸에 농축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S가 있을 때는 유해한 영향을 끼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좋은 영향을 주는 유전자가 있다면 이 유전자는 유전자 품에서 선택되어 살아남을 것이며, 그 유전자가 사실상 늙어서 죽는 것에 '대한' 유전자가 될 것이다. 이 경우 치료법은 단순히 몸에서 S를 제거하는 것이다.
The gene machine
유전자 기계
생존 기계는 유전자의 수동적 피난처로 처음 생겨났다. 처음에는 경쟁자들과의 화학전으로부터, 그리고 우연히 발생하는 분자 들의 폭격으로부터 유전자를 지키는 벽에 불과했다. 초기에는 수프 속에서 자유로이 떠다니는 유기 분자를 '먹이'로 하였다. 그러 나 수백 년 동안 햇빛 에너지의 영향으로 수프 속에 천천히 축적된 유기물 먹이가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편한 생활도 끝났 다. 오늘날 식물이라 불리는 생존 기계의 한 갈래는 스스로 직접 햇빛을 사용해 단순한 분자에서 복잡한 분자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고, 초기 원시 수프에서 벌어졌던 유기물 합성 과정을 더 빠른 속도로 재현해 냈다. 동물이라고 불리는 또 다른 갈래의 생존 기계는 식물을 먹든지 다른 동물을 먹든지 하여 식물의 화학적 노동을 가로채는 방법을 '알아냈'다. 이 두 갈래의 생존 기계들은 다양한 형태의 생활 방식에 효율을 높이기 위해 점점 더 교묘한 책략을 진화시켰고, 새로운 종류의 생활 방식이 계속해서 생겨났다. 곁갈래에 또 곁갈래가 생겨났다. 그리고 그 각각은 바다에서, 지상에서, 공중에서, 땅속에서, 나무 위에서, 다른 생물체 내에서 점점 더 특수화된 생활 방식을 진화시켰다. 이 곁가지들이 오늘날 우리를 감동시킬 정도로 다양한 동식물 세계를 만들어 냈다.
동물의 행동
운동은 사실상 비가역적인 생장이다. 한편 동물은 식물보다 수십만 배나 빨리 움직이는 방법을 진화시켰다. 게다가 동물의 운동은 가역적이고 무한히 반복될 수 있다.
동물이 빠른 운동을 위해 진화시킨 부품은 근육이다. 근육은 증기 기관이나 내연 기관과 같이 화학 연료에 저장된 에너지를 써서 기계적 운동을 만들어 내는 엔진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근육이 만들어 내는 가장 일차적인 기계력은 증기 기관이나 내연 기관의 경우처럼 기압이 아닌 장력의 형태라는 것이다. 그러나 근육도 끈이나 경첩이 붙은 지렛대에 힘을 가한다는 점에서는 엔진과 유 사하다. 우리 몸에서 지렛대는 뼈, 끈은 힘줄, 경첩은 관절이다. 근육의 움직임에 대한 정확한 분자적 원리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내게는 근육 수축의 타이밍이 어떻게 결정되는지가 더 흥미롭다.
복잡한 인공 기계, 예컨대 편물 기계, 재봉틀, 베틀, 자동으로 병에 음료가 채워지는 병입 공장, 건초 묶음기 등을 한 번이라도 본 적 있는가? 이들 기계의 동력은 전동기, 예를 들면 트랙터에서 공급된다. 그러나 훨씬 더 신기한 것은 기계가 조작되는 타이밍의 복잡성이다. 밸브가 올바른 순서로 개폐되고, 강철 손가락이 능숙하게 건초의 단을 묶고, 때맞춰 칼이 튀어나와 그 끈을 자른다. 대개 인공 기계의 타이밍은 캠이라는 멋진 발명품에 의해 조절된다. 캠은 단순한 회전 운동을 편심륜10속 또는 특수한 형태의 바 퀴를 이용하여 복잡하고 반복적인 패턴으로 바꾼다. 뮤직 박스에서도 같은 원리가 사용된다. 그 밖에 증기 기관이나 자동 피아노와 같은 기계에서는 특정 패턴으로 구멍을 뚫은 카드나 두루마리 종이가 사용된다. 최근에는 이와 같은 단순한 기계적 타이머가 전자 타이머로 대체되는 경향이 있다. 디지털 컴퓨터가 대표적인 예다. 디지털 컴퓨터는 복잡하게 시간이 조절된 운동 패턴을 만들어 내는 데 사용될 수 있는 다양한 기능을 가진 대형 전자 장치다. 컴퓨터와 같은 현대적 전자 기기의 기본 구성 요소는 반도체다. 반도체의 한 형태로 우리에게 낯익은 것으로는 트랜지스터가 있다.
뇌는 주로 근수축의 제어와 조정을 통해서 실제로 생존 기계의 성공에 기여한다. 이를 위해서는 뇌에서부터 근육에 이르는 케이블이 필요한데, 우리는 이를 운동 신경이라 부른다. 그러나 근수축의 제어와 조정이 유전자를 효과적으로 보존하는 것으로 이어지 려면, 근수축의 타이밍과 외부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타이밍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어야만 한다. 깨울 것이 입 속에 있을 때만 턱 근육을 수축시키고, 무언가를 쫓거나 무언가로부터 도망가야 할 때만 다리의 근육을 달리는 양상으로 수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때문에 자연선택은 감각 기관, 즉 바깥세상에서 벌어지는 물리적 사건들의 양상을 뉴런의 펄스 신호로 바꾸는 장치를 갖춘 동물을 선 호했을 것이다. 뇌는 감각 신경이라는 케이블을 통해 눈, 귀, 미뢰와 같은 감각 기관에 이어져 있다. 감각계의 성능은 특히 놀라운 데, 가장 값비싸고 가장 뛰어난 인공 기계에 비하더라도 훨씬 복잡한 패턴 인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모든 속기사는 음성 인식 기계나 손으로 쓴 문자를 읽는 기계로 대체되었을 것이다. 속기사는 앞으로 수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필요할 것이다.
감각 기관이 뇌를 거치지 않고 근육과 직접 연결되었던 시기가 있었을 것이다. 말미잘은 현재도 이 상태와 별로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말미잘의 생활양식에서는 이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깥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타이밍과 근수축의 타이 밍 사이에 더욱더 복잡하고 간접적인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그 매개물로서 뇌와 비슷한 것이 필요했다. 진화의 과정 중에 기억 이 '발명'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기억이라는 장치 덕분에 근수축의 타이밍은 가까운 과거의 사건뿐 아니라 먼 과거 에 일어났던 사건에서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디지털 컴퓨터에서도 기억, 즉 메모리는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다. 컴퓨터의 기억은 인간의 기억보다 신뢰성이 높지만, 용량도 인간보다 작을 뿐더러 정보를 불러내는 방법도 덜 복잡하다.
생존 기계의 행동에서 가장 뚜렷한 특성의 하나는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생존 기계가 동물 유전자의 생존에 도움이 되도록 잘 설계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뜻만이 아니다. 물론 생존 기계는 그렇게 설계된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생존 기계의 행동이 목적의식 있는 인간의 행동과 매우 닮았다는 것이다.
유전자는 도박꾼이다
복잡한 세상에서 예측이란 불확실하게 마련이다. 생존 기계가 내리는 결정은 모두 도박이다. 따라서 유전자가 할 일은 뇌가 평 균적으로 이득이 되는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뇌에 미리 프로그램을 짜 놓는 것이다. 진화라는 카지노에서 쓰이는 판돈은 생존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유전자의 생존인데, 여러 가지 면에서 개체의 생존을 유전자 생존의 근사치로 보아도 좋다. 당신이 물을 마시러 물가로 간다면, 당신은 물가 옆에 숨어 사냥감을 기다리는 포식자에게 먹힐 위험이 크다. 그렇지만 물가로 가지 않으면 결 국 목말라 죽을 것이다. 어느 쪽을 택하든 위험이 따를 것이므로, 장기적 안목에서 당신의 유전자가 살아남는 기회를 최대화하도록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아마도 최선의 수단은 갈증을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다가, 못 참을 지경에 이르면 물가로 가서 오랫동안 견 딜 수 있도록 물을 잔뜩 마시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물가에 가는 횟수를 줄일 수 있지만, 물을 많이 마시느라 오랫동안 머리를 숙이고 있어야 한다. 이를 대신할 만한 가장 좋은 방법은 물을 조금씩 자주 마시는 것일 수도 있다. 즉 물가 옆을 지나치면서 재빠르 게 조금씩 마시는 것이다. 어느 것이 가장 좋은 도박 전략인지는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에 따라 달라진다. 특히 포식자의 수렵 습성 은 중요한데, 이 자체는 포식자의 입장에서 가장 효율적이도록 진화한 것이다. 여러 가지 가능성을 이리저리 재 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동물이 의식적으로 계산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올바른 도박을 하도록 뇌를 만들어 준 유전자의 개체가 당연히 더 잘 살아남고, 따라서 같은 유전자를 퍼뜨릴 것이라는 사실이다.
도박의 비유를 좀 더 써 보기로 하자. 도박꾼은 주로 판돈, 승산, 상금 세 가지 요소를 생각해야 한다. 상금이 크면 기꺼이 판돈을 크게 걸 것이다. 한 방으로 일확천금을 노리는 도박꾼은 큰돈을 모을 수 있다. 반면에 큰 손실을 볼 수도 있으나, 평균적으로 큰 판 돈을 거는 도박꾼은 판돈을 적게 걸어서 적은 상금을 노리는 도박꾼에 비해 벌이가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주식 시장에서 투기형 투자가와 안정형 투자가도 유사한 경우다. 어떤 면에서는 주식 시장에 비유하는 것이 카지노에 비유하는 것보다 더 나을 수도 있겠 다. 왜냐하면 카지노는 주인에게 유리하도록 미리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엄밀히 말해서 이 말은 돈을 많이 건 승부사는 조금 건 승부사보다 재미를 못 볼 것이며, 조금 건 사람은 전혀 돈을 걸지 않은 사람보다 재미를 못 볼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 리의 논의와 별로 관계가 없다). 이 점만 빼면 판돈이 큰 도박이건 작은 도박이건 둘 다 어느 정도 이치에 맞는 것처럼 생각된다. 동 물 중에도 판돈을 크게 거는 도박꾼이나 작게 거는 도박꾼이 있을까? 9장에서 보게 될 텐데, 수컷은 큰돈을 거는 모험적인 도박꾼으로, 암컷은 안정형 투자가로 볼 수 있다. 여러 수컷이 암컷을 놓고 싸우는 일부다처인 종에서는 특히 그러하다. 독자가 자연학자 라면 판돈도 크고 위험도 큰 승부사로 볼 수 있는 종과 좀 더 보수적으로 승부를 거는 종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유전자가 어떻게 미래를 '예측'하는가에 대해 보다 일반적인 이야기를 해 보자.
학습 예측 불허인 환경에서 예측을 하기 위해 유전자가 취할 수 있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학습 능력을 만드는 것이다. 이 경우 프로그램은 생존 기계에게 다음과 같은 지령을 내릴 수 있다. ***
"여기에 달콤한 것, 오르가슴, 따스한 기후, 방실거리는 아이 등 보상이라고 불릴 만한 것들의 목록이 있다. 그리고 여러 가지 고 통, 구역질, 공복, 울고 있는 아이 등 불쾌한 것들의 목록이 있다. 만약 당신이 무엇인가를 한 뒤에 불쾌한 것 중의 하나가 발생하면 다시는 그것을 하지 마라. 그러나 좋은 것 중의 하나가 생기면 그것은 반복하라." 이와 같은 프로그램의 이점은 최초의 프로그램에 넣어야만 하는 자세한 규칙의 수를 대폭 줄일 수 있다는 것과, 자세히 예측하 지 못한 환경의 변화에 대처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반면 여전히 프로그램에 넣어야 할 예측들이 있다. 우리의 예에서 유전자는 입속의 단맛이나 오르가슴은 당류의 섭취나 교미가 유전자의 생존에 적합할 것이라는 의미에서 '좋은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사카린과 자위는 예기치 못한 것이며,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당류의 과다 섭취도 마찬가지다.
체스를 두는 컴퓨터 프로그램 중에도 학습 전략을 사용하는 것이 있다. 이러한 프로그램은 인간이나 다른 컴퓨터를 상대로 한 체스 게임에서 실제로 성적이 좋다. 이들 프로그램에는 규칙과 전술의 레퍼토리가 들어 있기는 하지만, 그 의사 결정 과정에는 약간의 무작위성도 입력되어 있다. 과거의 의사 결정을 기록하였다가, 승리할 때마다 승리하기 직전에 썼던 전술의 비중을 약간씩 늘여, 다음에는 그 똑같은 전술을 선택할 확률이 더 높아지게 된다.
행동에 대한 유전자
꿀벌은 부저병이라는 세균성 전염병에 걸린다. 이것은 꿀벌의 애벌레나 번데기가 벌집 속에서 세균에 감염되어 썩는 병이다. 양봉벌 중에서 특히 어떤 종류는 다른 종류보다 이 병에 걸리기 쉬운데, 몇 가지 경우에는 그 원인이 행동의 차이에 기인한 다. 위생적인 종류는 병에 걸린 애벌레를 발견하고 봉방에서 끄집어내 버림으로써 병을 빨리 근절할 수 있다. 한편 감염되기 쉬운 종류는 이 '위생을 위한 영아 살해'를 하지 않기 때문에 병에 걸리기 쉽다. 이 위생을 위한 행동은 사실 상당히 복잡하다. 일벌은 병에 걸린 애벌레의 봉방을 발견한 뒤 그 밀랍 뚜껑을 떼고 애벌레를 끄집어내 벌집의 출입구로 끌고 가서 쓰레기장에 내던져야 한다.
꿀벌을 대상으로 유전학적 실험을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에 서 매우 복잡한 일이다. 보통 일벌 자신은 번식하지 않으므로, 한 종류의 여왕벌과 다른 종류의 수벌을 교배시켜 그 딸들인 일벌의 행동을 관찰해야 한다. 이러한 작업을 한 사람은 로센불러W. C.
였다. 그는 잡종 제1세대의 일벌들이 모두 비위생적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위생적인 부모의 행동은 마치 사라진 듯 보였다. 그러나 위생적 형질의 유전자는 인간의 청색 눈의 유전자처럼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하지만 그 유전자는 열성이었다. 로센불러가 잡종 제1세대와 위생적 형질의 종류를 '역교배'시키자(물론 여왕벌과 수벌을 이용해서) 훌륭한 결과가 나 왔다. 태어난 일별은 세 그룹으로 나뉘었다. 첫 번째 그룹은 완벽한 위생적 행동을 보였다. 두 번째 그룹은 전혀 위생적 행동을 취 하지 않았다. 세 번째 그룹은 중간쯤 되는 행동을 했다. 세 번째 그룹은 병에 걸린 애벌레가 있는 봉방의 뚜껑을 떼기는 했지만, 그 뒤 애벌레를 버리는 일은 하지 않았다. 이 결과를 바탕으로 로센불러는 뚜껑을 떼는 것에 대한 유전자와 애벌레를 버리는 것에 대 한 유전자가 따로 있다고 생각했다. 즉 정상적인 위생적 종류는 그 두 유전자를 가지고 있고, 감염되기 쉬운 종류는 두 유전자 모두의 라이벌인 대립 유전자들을 가지고 있다. 짐작컨대 중간쯤 되는 행동을 하는 잡종은 뚜껑을 떼는 유전자는 (두 배만큼) 갖고 있으나 애벌레를 버리는 유전자는 갖고 있지 않을 것이다. 로센불러는 겉보기에 완전히 비위생적인 일벌들은 애벌레를 내버리는 유전 자를 갖고 있지만 뚜껑을 떼는 유전자가 없기 때문에 그 능력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라 추측했다. 그래서 그는 이 추측을 확인하기 위해 봉방의 뚜껑을 떼어 주었다. 그러자 겉보기에 비위생적인 일벌 중 절반이 완전히 정상적인 '애벌레 버리기' 행동을 보였다.* 이 이야기는 앞 장에서 언급했던 중요한 문제점들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유전자에서 행동에 이르는 배 발생의 화학적 인과 관계의 사슬이 어떻게 되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무슨 무슨 행동에 대한, 무슨 무슨 행동을 담당하는 유전자"라고 말한다 해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음을 시사한다. 이 인과 관계의 사슬에는 학습 과정까지도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예컨대 뚜껑을 떼는 유전자는 벌이 병에 감염된 밀랍의 맛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 효과를 발휘하는 것일 수도 있다. 즉 그들로서는 병에 걸린 애벌레를 덮고 있는 밀랍 뚜껑을 먹는 것이 그들에게 보상을 주는 일이기 때문에 그것을 되풀이한다는 것이다. 비록 유전자가 작용하는 방식이 이렇다 할지라도, 다른 조건이 같을 때 그 유전자를 갖고 있는 벌은 뚜껑을 떼고, 그 유전자를 갖지 않은 벌은 뚜껑을 떼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실로 '뚜껑을 떼는 것에 대한' 유전자인 것이다.
둘째로 이 이야기는 유전자들이 공동으로 소유한 생존 기계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데에 서로 '협력'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애벌레를 버리는 유전자는 뚜껑을 떼는 유전자가 없다면 필요 없을 것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유전학적 실험을 통해 우리는 이 두 유전자가 세대를 거쳐 전달되면서 원칙상 얼마든지 분리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들의 기능에 관한 한 우리는 이들을 하나의 협력 단위로 생각할 수 있지만, 복제상에서 이들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인자다.
논의 전개상 갖가지 있을 성싶지 않은 일을 '담당하는' 유전자에 관해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예를 들어 내가 '물에 빠 진 친구를 건지는' 유전자에 대해 말하는데 당신이 그와 같은 개념을 믿기 어렵다면 꿀벌 이야기를 떠올려 보라. 우리가 친구를 구 조하는 데 관여하는 복잡한 근육 수축, 감각 정보의 통합, 더 나아가서는 의식적 결단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유전자가 단독으로 유발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또한 학습과 경험, 또는 환경의 영향이 그 행동의 발달에 관여하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다른 조건이 같고 또 여러 중요한 유전자나 환경 요인이 존재한 다면, 하나의 유전자가 대립 유전자에 비해 물에 빠진 친구를 더 잘 구할 것 같은 몸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두 유전자 간의 차이는 근본적으로 단순한 양적 변수의 근소한 차이로 생겨날 수 있다. 배 발생의 상세 과정은 재미있기는 하지만 진화에 대한 고찰에는 하등 관계가 없다. 로렌츠도 이 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동물행동학자의 전통적인 설명에 따르면, 의사소통 신호는 송신자와 수신자 쌍방이 서로 이익을 얻도록 진화한다. 예를 들면 병 아리는 길을 잃거나 추우면 큰 소리로 삐악거려 어미의 행동에 영향을 준다. 이 소리는 보통 어미를 부르는 직접적인 효과가 있어 서, 어미는 그 병아리를 둥지로 데려온다. 이 행동은 길을 잃으면 우는 병아리와 그 울음소리에 적절히 반응하는 어미 모두에게 자 연선택이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의미에서 상호 이익을 위하여 진화했다고 말할 수 있다.
동물의 거짓말
먹어도 독이 없는 많은 곤충은 앞 장에서 말한 나비처럼 다른 맛없는 곤충이나 침을 쓰는 곤충의 모습을 흉내 내 자신의 몸을 지 킨다. 우리도 간혹 착각하여 노란색과 흑색 줄무늬가 있는 꽃등에를 별로 오인하는 경우가 많다. 벌을 흉내 내는 파리들 중 몇몇은 꽃등에보다 더 완벽한 속임수를 구사하기도 한다. 포식자들도 거짓말을 한다. 아귀는 바다 밑에서 참을성 있게 기다린다. 아귀의 몸이 배경에 파묻히기 때문에 유일하게 보이는 부분이라고는 기다란 '낚시대' 끝에 매달린 지령이처럼 꿈틀거리는 살덩어리뿐이 다, 작은 물고기가 접근하면 아귀는 지령이같이 생긴 미끼를 움직여 숨어 있는 자기의 입 가까이 물고기를 유인한다. 그러다가 재 빠르게 입을 벌려 물고기를 삼켜 버린다. 아귀는 꿈틀거리는 지렁이와 같은 물체에 접근하는 작은 물고기들의 습성을 이용해 거짓 말을 하는 것이다. 아귀는 '여기 지령이가 있다'라는 거짓말을 하고, 이를 '믿는' 작은 물고기는 즉시 잡아먹히는 것이다.
어떤 생존 기계는 다른 생존 기계의 성적 교양을 이용한다. 별난초는 벌에게 암벌과 꼭 닮은 자기의 꽃과 교미하도록 한다. 별난 초가 별을 속여서 얻는 것은 수분(꽃가루반이)인데, 이는 두 개의 별난초에게 속은 벌이 이 꽃에서 저 꽃으로 꽃가루를 옮겨 줄 것이기 때문이다. 반딧불이는 빛을 깜빡거려 교미 상대를 유인한다. 각각의 좋은 특유의 깜빡거리는 패턴을 가지고 있어서 종 간의 혼란과 그 결과로 생길 수 있는 유해한 잡종 형성을 방지한다. 선원들이 특정 등대의 깜빡 거리는 패턴을 찾는 것처럼 반딧불이도 자기 종만의 깜박거리는 패턴을 찾는다. 포투리스 속 암컷은 포티누스 속 암컷의 신호를 흉내 내면 포티누스 속 수컷을 유인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렇게 속은 포티누스 수컷이 접근하면 포투리스 암컷은 즉석에서 그 수컷을 잡아먹어 버린다. 사이렌과 로렐라이의 이야기를 언뜻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콘월(영국 남서부의 해안 도시- 옮긴이) 지방 사람이라면 옛날 초롱불로 배를 벼랑으로 유인하여 난파선에서 나온 쏟아진 화물을 집어 갔던 약탈자를 떠올릴 것이다.
의사소통 시스템이 진화할 때는 누군가 그 시스템을 약용할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 우리는 '종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진화를 배워 왔기 때문에, 거짓말쟁이나 사기꾼은 포식자와 먹이, 그리고 기생자 등과 같이 다른 종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유전자들의 이해관계가 개체들마다 달라진다면 언제나 거짓이나 속임수 등 개체들이 의사소통 체계를 이기적으로 이용할 여지가 생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같은 종의 개체들 간에도 마찬가지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자식이 부모를 속이고 남편이 아내를 속이고 형제끼리 거짓말을 하는 것조차 예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
동물의 의사소통 신호는 본래 서로의 이익을 증진시키도록 진화되었고 그런 뒤 나쁜 동물들이 이 신호를 악용하게 되었다고 믿는 것도 너무나 순진한 믿음이다. 모든 동물의 의사소통에는 처음부터 사기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모든 동물의 상호 작용에는 적어도 어느 정도 이해의 충돌이 내재하기 때문이다. 다음 장에서는 진화의 관점에서 이해 충돌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는지 소개할 것이다.
5장
Aggressions stability and the selfish machine
공격-안정성과 이기적 기계
그러나 동물의 공격은 억제되고 형식적인 것이라는 해석에는 반론의 여지가 있다. 특히 불쌍한 늙은 호모 사피엔스만이 동족을 죽이는 유일한 종이며 카인의 후예라는 식의, 멜로드라마에 나올 법한 죄를 짓는 종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이다. 어떤 자연학자가 동물의 공격이 폭력적이라고 하느냐 아니면 억제된 것이라고 하느냐 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 사람이 관찰해 온 동물의 종류에 따라, 다른 한편으로는 그 사람의 진화론에 대한 선입견에 따라 좌우된다. 로렌츠도 '종의 이익'을 주장하는 사람 아니던 가. 다소 과장된 것이기는 하지만 동물들이 글러브를 끼고 싸운다고 보는 것도 어느 정도는 맞는 것 같다. 표면적으로는 일종의 이 타주의처럼 보인다. 이기적 유전자론은 어렵지만 이것을 설명해야만 한다. 동물들이 기회 있을 때마다 동종의 경쟁자를 죽이는 데 전력을 다하지 않는 것은 왜일까?
이 물음에 대한 일반적인 답은 앞뒤 재지 않고 싸우는 것에는 이익(이득)과 동시에 대가(손실)가 따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시간 과 에너지의 손실 뿐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 B와 C는 모두 나의 경쟁자인데 내가 마침 B를 만났다고 하자. 이기적 개체인 내가 그를 죽이려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C는 내 경쟁자이기는 하지만 B와도 경쟁 관계가 아닌가. 내가 B를 죽이면 잠재적으로 C의 경쟁자 하나를 제거해 C에게 이익을 주는 셈이 된다. 따라서 B를 살려 두면 B가 C와 다투거나 싸울 것이므로 결국 나 자신에게는 간접적으로 이익이 될 것이다. 이 단순한 가상적 예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함부로 경쟁자를 죽이려고 하는 것에는 뚜렷한 이익이 없다는 것이다. 크고 복잡한 경쟁 시스템 속에서는 눈앞의 경쟁자를 없애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그 경쟁자의 죽음으로 당사자보다 다른 경쟁자가 이득을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해충 방제 관계자들에게서 우리가 배운 쓰라린 교훈이기도 하다.
농작물에 심한 피해를 입히는 해충을 없앨 방법을 발견한 뒤 신나서 이 방법을 적용했는데, 그 결과 이 해충의 절멸로 다른 해충이 더 큰 이익을 보게 되었고, 우리는 전보다 더 나쁜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한편 어떤 특정한 경쟁자를 선택적으로 죽이거나 그와 싸우는 것은 좋은 계획일지 모른다. 만약 B가 암컷이 많이 있는 큰 하렘(수컷 한 마리가 여러 암컷을 거느리며 교미하는 번 식 체계 및 그 암컷의 무리 - 옮긴이)을 가진 바다표범이고, 다른 바다표범인 내가 B를 죽여 그의 하렘을 얻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지 모른다. 그러나 상대를 선택하여 싸움을 하는 경우에도 손실과 위험이 따르게 마련이다. B는 자신의 이익을 위하 여 반격할 것이고 가치 있는 재산을 지키려 할 것이다. 내가 싸움을 걸 경우 나도 그도 죽을 수 있다. 어쩌면 내가 죽을 확률이 더 높 을지도 모른다. B는 가치 있는 자원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내가 그에게 싸움을 거는 이유다. 하지만 B는 왜 그 자원을 갖고 있는 가? 아마도 B는 싸움에서 이겨 그 자원을 얻었을 것이다. 그는 이전에 다른 도전자들을 물리쳤을 것이다. 그러므로 B는 뛰어난 전 사일 것이다. 비록 이 싸움에서 내가 이겨 하렘을 차지하더라도 상처투성이가 되어 이익을 누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 또한 싸움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므로 당분간 시간과 에너지를 축적해 두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 내가 한동안 먹는 것에 전념하 고 싸움에 말려들지 않도록 조심하면 나는 장차 강대해질 것이다. 언젠가는 하렘을 놓고 B와 싸우게 되겠지만, 당장 서두르기보다는 조금 기다리는 편이 결과적으로 나의 승률을 높이는 선택일지 모른다.
게임 이론과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
이러한 예는 이상적으로는 싸울 것인가 말 것인가의 결단에 앞서 무의식적으로라도 '손익 계산'을 해 봐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싸워서 확실히 이득을 볼 때도 있지만 싸울 때마다 매번 그만큼의 이익이 쌓이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싸우는 동안 그 싸움을 확대시키느냐 진정시키느냐 하는 전술적 결단에는 각각 손실과 이득이 있으며, 이는 원칙적으로 분석이 가능하다. 이 사실은 오랫동안 동물행동학자들에게 막연히 받아들여졌으나, 이 발상을 분명히 표현한 것은 보통 동물행동학자로 인정되지 않는 메이너드 스미스였다. 그는 프라이스G. R. Price, 파커6. A. Parker와의 공동 연구에서, '게임 이론'이라는 수학의 한 분야를 응용했다. 이들의 멋진 이론은 수학 기호를 쓰지 않고도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정확도가 조금 떨어지기는 하지만 말이다.
메이너드 스미스가 소개하는 중요한 개념은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evolutionarily stable strategy, ESS인데, 그는 이 개념을 해밀턴과 맥아더R.H. MacArthur에게서 따왔다고 한다. '전략'이라는 것은 미리 프로그램된 행동 방침이다. 전략의 일례를 들어 보면, "상대를 공격하라. 그가 도망치면 쫓아가고, 그가 보복해 오면 도망쳐라" 같은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개체가 전략을 의식적으로 고안해 냈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현재 동물을, 근육을 제어하는 미리 프로그램된 컴퓨터가 조종하는 로봇 생존 기계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하기 바란다. 편의상 이 전략을 일종의 지시처럼 말로 쉽게 표현하는 것뿐이다. 어떤 불분명한 메커니즘에 의해 동물은 마치 이러한 지시를 따르는 것처럼 행동한다.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 즉 ESS는 개체군에 있는 대부분의 구성원이 일단 그 전략을 채택하면 다른 대체 전략이 그 전략을 능가할 수 없는 전략이라고 정의된다.* 이것은 미묘하고도 중요한 개념이다. 바꿔 말하면, 어떤 개체에게 가장 좋은 전략은 개체군 대부분이 무엇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이다. 그 개체를 제외한 나머지 개체들도 각각 자기의 성공을 최대화하려는 개 체들이므로, 장기간 지속될 수 있는 유일한 전략은 일단 그 전략이 진화하면 다른 어떤 전략도 그 전략보다 더 많은 이득을 볼 수 없는 그런 전략이다. 환경에 어떤 큰 변화가 일어나면 잠시 동안 진화적으로 불안정한 기간이 올 수 있으며, 개체군 내에서 변동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어떤 전략이 일단 ESS가 되면 그것은 계속 ESS로 남는다. 자연선택은 이 전략에서 벗어나는 전략을 벌할 것이다.
이 개념을 동물의 공격적 행동에 적용하기 위해 메이너드 스미스의 가상적인 예 중 가장 단순한 예 하나를 고찰해 보자. 예컨대 어떤 종의 개체군에서 개체들이 채택하는 싸움 전략은 두 종류밖에 없다고 하고, 그 이름을 매파와 비둘기파라고 하자(이 이름은 우 리가 관례적으로 사용하는 용어에 따른 것일 뿐, 실제 매나 비둘기의 습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사실 비둘기는 다소 공격적인 새다). 우리의 가상적 개체군에서 개체들은 모두 매파든 비둘기파든 어느 한편에 속한다. 매파의 개체들은 늘 맹렬히 싸우고, 심하 게 다쳤을 때가 아니면 굴복하지 않는다. 비둘기파의 개체들은 그저 품위 있는 정통적 방법으로 위협만 할 뿐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는다. 매파의 개체와 비둘기파의 개체가 싸우면 비둘기파는 그냥 도망치므로 다치는 일이 없다. 매파의 개체끼리는 한편이 중상을 입거나 죽을 때까지 싸운다. 비둘기파끼리 부딪칠 때는 어느 편도 다치지 않는다. 오랫동안 서로 위협 자세를 취하기만 하 다가 싫증이 나거나 더 이상 버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결국 싸움을 멈추기 때문이다. 당분간은 어떤 개체가 자신의 경쟁자가 매 파인지 비둘기파인지 미리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가정하자. 그 경쟁자와 싸운 뒤에야 비로소 알 수 있고, 그 개체가 싸우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특정 개체와의 과거 싸움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자.
이제 순전히 임의적인 방법으로 싸우는 개체들에게 '점수'를 주기로 하자. 예컨대 승자에게는 50점, 패자에게는 0점을 주고, 중 상자에게는 100점, 장기전에 따른 시간 낭비에는 • 10점을 준다고 하자. 이들 '점수'는 유전자의 생존이라는 통화로 직접 환산될 수 있다고 보아도 좋다. 높은 점수를 얻은 개체, 즉 평균 '득점'이 높은 개체는 유전자 풀 속에 다수의 유전자를 남기는 개체다. 실제 개체들에게 수치를 얼마로 주느냐는 제법 넓은 범위 내에서는 분석상 관계없지만, 우리가 이 문제를 생각하는 데는 특정 수치를 가 정하는 것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매파가 비둘기파와 싸워 이기는 경향이 있다든가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다. 언제나 매파가 이길 것이다.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매파형 전략과 비둘기파형 전략 중 어느 것이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 략(EsS)인가 하는 것이다. 만약 한쪽이 EsS이고 다른 쪽은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ESS인 쪽이 진화할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물
론 두 개의 ESS가 있는 것도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 개체군의 대세가 매파든 비둘기파든 간에 어떤 개체에게 최선의 전략은 대세 를 따르는 것이다. 이때 개체군은 두 개의 안정 상태 중 어느 것이든 먼저 도달된 쪽으로 고정될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살펴보겠지 만, 실제로 매파와 비둘기파라는 두 전략은 그 자체로는 진화적으로 안정한 것이 아니므로, 둘 중 어느 한쪽이 진화한다고 기대할 수는 없다. 이를 설명하려면 평균 득점을 계산해야만 한다.
구성원 전원이 비둘기파인 개체군이 있다고 하자. 이들은 싸워도 다치지 않는다. 이들의 싸움은 예를 들면 째려보는 것 같이 장 기적이고 의식적인 시합이어서, 어느 쪽이든 기가 죽으면 끝난다. 이때 승자는 싸워서 자원을 차지했기 때문에 50점을 얻지만, 째 려보는 데 오래 걸렸기 때문에 10점의 점수가 깎여 결국 40점을 얻게 된다. 패자 역시 시간을 낭비했으므로 10점이 깎인다. 평균 적으로 비둘기파 개체들은 모두 싸움의 반은 이기고 반은 질 것이므로, 싸움당 이들의 득점은 +40과 -10을 평균하여 +15점이 된 다. 따라서 비둘기파의 개체군 내 비둘기파 개체들은 모두 득점이 좋아 보인다.
그런데 이 개체군에 매파의 돌연변이 개체가 나타났다고 가정해 보자. 돌연변이 개체는 여기서 유일한 매파이므로 싸움 상대는 모두 비둘기파다. 매파는 항상 비둘기파를 이기므로 그는 모든 싸움에서 +50점을 기록하게 되며, 이것이 그의 평균 득점이 된다.
그는 득점이 +15점밖에 안 되는 비둘기파에 비해 막대한 이익을 누린다. 그 결과 매파의 유전자는 개체군 내에 급속히 퍼질 것이 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매파의 개체는 자신과 부딪치는 경쟁자가 모두 비둘기파라고 기대할 수 없게 된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서 매파의 유전자가 너무도 순조롭게 개체군 내에 퍼져서 개체군 전체가 매파가 됐다면, 이번에는 모든 싸움이 매파끼리의 싸움이 될 것이다. 이제는 사정이 매우 달라진다. 매파끼리 부딪치면 한쪽이 심하게 다쳐 100점이 깎이는 반면, 승자는 50점을 얻는다. 매파 개체군의 각 개체는 싸움의 반은 이기고 반은 질 것이므로 싸움당 평균 득점은 +50과 100의 평균, 즉 • 25점이 된다. 이제 매파의 개체군 내에 비둘기파가 한 개체 있다고 하자. 확실히 그는 모든 싸움에서 패하지만, 결코 부상당하는 일은 없다. 매파 개체군 내의
평균 득점이 25점인 데 비해, 매파 개체군 내에서 그의 평균 득점은 0점이다. 따라서 비둘기파의 유전자는 그 개체군 내에 퍼질 것 이다
이다.
이 이야기대로라면 마치 개체군 내에 끊임없는 변동이 있을 것처럼 생각될지도 모르겠다. 매파의 유전자가 압승하여 우세를 점 하고 마침내 대다수가 매파로 변하지만, 그 결과 오히려 비둘기파의 유전자가 이득을 보면서 그 수를 늘려 가다가, 비둘기파가 많 아지면 다시 매파의 유전자가 번성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변동이 벌어지지않을 수도 있다. 매파와 비둘기파의 안 정된 비율이 존재 한다면 말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임의의 득점 시스템으로 계산해 보면, 안정된 비율은 비둘기파가 5/12, 매파가 기/12인 것을 알 수 있다. 개체군이 이와 같은 안정된 비율을 가지면 매파의 평균 득점과 비둘기파의 평균 득점은 같아진다. 따라서 자연선택은 어느 한쪽을 선호하지 않는다. 만약 개체군 내 매파의 수가 점점 늘어 그 비율이 7/12을 넘으면 비둘기파가 더 이익을 보기 시작하여 그 비율은 원래의 안정한 비율로 돌아온다. 안정된 성비가 50 대 50인 것처럼, 이와 같은 가상적 예에서 매파 대 비 둘기파의 비는 7 대 5다. 어느 경우에서든 안정점 부근에서 변동이 있었다고 해도 그 변동 폭은 그리 크지 않다.
표면적으로는 집단선택설처럼 들릴지도 모르나 실제로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집단선택설처럼 들리는 이유는, 개체군에 안정된 평형 상태가 있어서 그것을 흐트러뜨리면 다시 그 상태로 되돌아오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ESS는 집단선택보다 훨씬 미묘한 개념이다. 그것은 어떤 집단이 다른 집단보다 더 성공적인가와는 관계가 없다. 이 사실은 우리의 가상적인 득점 시스템을 이용하여 설명할 수 있다. 매파 7/12, 비둘기파 5/12로 된 안정한 개체군 내에서 한 개체의 평균 득점은 6%이 된다. 이것은 그 개 체가 매파든 비둘기파든 같다. 그런데 이 6%이라는 득점은 비둘기파 개체군 내 비둘기파 개체의 평균 득점(15)보다 훨씬 낮다. 개 체군 구성원 전원이 비둘기파가 되는 것에 동의하기만 하면, 어느 개체나 이득을 보는 것이다. 단순한 집단선택설에 따르면, 그 구 성원 전원이 비둘기파가 되는 것에 동의하는 집단은 ESS에 머물러 있는 경쟁자 집단보다 성공할 확률이 높다(실제로 전원이 비둘 기파가 되기로 '공모'한 집단이 성공 확률이 가장 높은 집단은 아니다. 매파 1/6과 비둘기파 5/6인 집단에서는 싸움당 평균 득점이 16⅔이다. 이것이 가장 성공 확률이 높은 공모 형태지만 현재의 논의에서는 무시해도 좋다. 전원이 비둘기파가 되는 단순한 공모 의 경우에도 각 개체는 평균 득점이 15점이나 되며 그 집단 내 모든 개체의 득점은 ESS 집단보다 훨씬 높다). 따라서 집단선택설은 전원이 비둘기파가 되기로 공모한 집단이 진화할 것이라고 예측할 것이다. 왜냐하면 매파가 7/12의 비율로 포함되어 있는 집단은 비둘기파가 되기로 공모한 집단보다 덜 성공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체들 간의 공모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장기간에 걸쳐 전원에게 이익이 되는 공모의 경우에도 악용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확실히 어떤 개체도 ESS 집단에 있는 것보다 비둘기파 의 공모 집단에 있는 것이 더 유리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비둘기파 공모 집단 속에서 한 개체의 매파는 그 성적이 너무 좋기 때문 에 이 집단에서 매파의 진화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그 공모는 내부의 불신 행위로 말미암아 파기될 수밖에 없다. EsS는 안정한 것이다. 이는 EsS에 참여하는 개체에게 딱히 유리해서가 아니라, 내부로부터의 배신에도 흔들리지 않기 때문 이다.
인간이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협정을 맺거나 공모를 하는 것은 설령 그것이 ESS의 의미에서 안정한 것이 아니더라도 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에 공모(혹은 협정)가 가능한 이유는, 개인 모두가 의식적으로 미래를 예견하고 그 협정의 규약에 따르는 것이 자기의 장기적 이익에 좋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협정에서도그 협정을 파기하면 단기적으로 큰 이득이 되기 때문에 그러고 싶은 유혹이 압도적으로 커질 위험이 있다. 이에 해당되는 가장 좋은 예는 아마도 가격 협정일 것이다. 휘발유 가격을 인위 적으로 높게 책정하면 주유업자들 모두 장기적으로 이익을 얻는다. 이를 의식적으로 예상한 주유업자들의 가격 담합이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다. 그런데 조만간 자기만 가격을 인하해 빠른 시간 내에 한몫 챙기자는 유혹에 빠지는 업자가 생겨난다. 그러면 그 즉 시 인근 업자도 가격을 내리고 순식간에 휘발유 값 인하 파동이 전국으로 퍼진다. 주유업자가 아닌 우리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주유업자들이 다시금 의식적으로 미래를 예상하여 새로운 가격 담합이 형성된다. 이와 같이 의식적으로 예견하는 재능을 가진 인 간에서도 장기적 이익을 기반으로 한 협정 또는 공모는 내부로부터의 배신 때문에 늘 붕괴할 위험이 있다. 하물며 고군분투하고 있
는 유전자에게 조종되는 야생 동물에게서 집단의 이익이나 공모 전략이 어떻게 진화할 수 있는지는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따라서 우리는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이라는 방식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고 기대해야만 한다.
앞의 가상적인 예에서 우리는 어느 한 개체는 매파나 비둘기파 중 어느 한쪽이 된다는 단순한 가정을 했다. 그리고 결국 매파와 비둘기파는 진화적으로 안정한 비율에 이르게 되었다. 실제로 이것은 매파 유전자와 비둘기파 유전자의 안정된 비율이 유전자 풀 내에 확립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전학 용어로 이 상태를 '안정 다형맛5 34, stable polymorphism'이라고 한다. 그러나 수학적으로 는 다형성을 가정하지 않고도 이와 똑같은 EsS에 도달할 수 있다. 모든 개체가 각각의 싸움에서 매파처럼 또는 비둘기파처럼 행동한 다면, 모든 개체가 같은 확률로, 위의 예에서는 7/12의 확률로 매파처럼 행동하는 ESS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것은 각 개 체가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매파처럼 행동할 것인가 비둘기파처럼 행동할 것인가를 무작위로(무작위라고는 하나 7 대 5의 비율로 매파가 많게) 결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매파 쪽으로 결정하는 빈도가 더 높기는 하지만, 어떤 다툼에서도 경쟁자는 상대방이 어떤 전략을 취할지 추정할 수단이 없으므로 그 결정은 무작위여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7회의 다툼에 계속 매파로 행동한 뒤 계속해서 5회의 다툼에 비둘기파로 행동하는 등의 방식은 전혀 쓸모가 없다. 만약 어떤 개체가 이처럼 단순한 순 서의 전략을 택했다면, 그 개체의 경쟁자는 재빠르게 이 순서를 눈치채고 그를 이용할 것이다. 단순한 순서의 전략을 취하는 상대 를 이용하는 방법은 상대방이 비둘기파로 행동하려는 것을 알았을 때에만 매파로 행동하는 것이다.
물론 매파와 비둘기파의 이야기는 너무나 단순하다. 자연계에서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으나, 이것은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하나의 '모델'이다. 모델은 이처럼 극히 단순하나 어떤 현상을 이해하거나 어떤 아이디어를 얻는 데 유용 할 수 있다. 단순한 모델은 보다 정교하게 발전시킬 수도 있고 점점 복잡하게 만들 수도 있다. 잘만 만들면 모델은 복잡해질수록 현 실 세계를 보다 잘 묘사할 수 있다. 매파와 비둘기파의 모델을 발전시킬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전략을 추가하는 것이다. 가능한 전략 중에 매파와 비둘기파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메이너드 스미스와 프라이스가 도입한 더 복잡한 전략은 보복자 전략이라고 불린다
보복자와 불량배
보복자는 모든 싸움에서 처음에는 비둘기파처럼 행동한다. 즉 매파처럼 철저하게 심한 공격을 하지 않고 전통적인 위협 행동을 한다. 그러나 상대가 공격해 오면 보복한다. 바꿔 말하면 보복자는 매파에게 공격당했을 때는 매파처럼 행동하고 비둘기파를 만났 을 때는 비둘기파처럼 행동한다. 또 다른 보복자를 만났을 때는 비둘기파처럼 행동한다. 보복자는 조건부 전략자다. 그의 행동은 상 대의 행동에 따라 정해진다.
또 하나의 조건부 전략은 불량배다. 불량배는 누군가가반격해 올 때까지는 누구에게나 매파처럼 행동하지만, 반격당하면 즉시 도망친다. 또 다른 조건부 전략은 시험 보복자다. 시험 보복자는 기본적으로는 보복자와 같으나 가끔 시험 삼아 싸움의 강도를 높인 다. 상대가 반격하지 않으면 계속 매파처럼 행동하지만, 상대방이 반격하면 다시 비둘기파의 전통적인 위협 행동으로 되돌아간다.
공격을 받은 경우에는 보통의 보복자와 똑같이 보복한다.
컴퓨터 시뮬레이션상에서 지금까지 말한 다섯 개의 전략 모두를 자유롭게 행동하도록 놔두면 보복자만이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 략이 된다.* 시험 보복자는 안정한 전략에 가깝다. 비둘기파는 그 개체군 내에 매파나 불량배가 생겨나면 무너져 버리므로, 즉 이 들의 침입을 허락하므로 안정한 전략이 아니다. 매파도 그 개체군이 비둘기파와 불량배의 침입을 허용할 것이므로 안정한 전략이 아니다. 불량배도 그 개체군이 매파의 침입을 허락하므로 안정한 전략이 못 된다. 보복자의 개체군에서는 보복자 자신보다 더 성적 이 좋은 전략이 없기 때문에 어느 전략도 침입할 수 없다. 그러나 비둘기파는 보복자의 개체군 내에서 보복자와 비슷한 정도로 성적이 좋다. 이는 다른 조건이 같다면 비둘기파의 수가 서서히 늘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비둘기파의 수가 어느 정도 까지 늘어나면 시험 보복자가(덩달아서 매파와 불량배도) 유리해지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이들이 비둘기파와 마주쳤을 때의 성적 은 보복자가 비둘기파와 마주쳤을 때보다 낫기 때문이다. 시험 보복자는 매파와 불량배와 달리 ESS에 가깝다. 시험 보복자의 개체 군 내에서 그들보다 잘할 수 있는 것은 보복자뿐이고 그 차이도 미미하다. 따라서 보복자와 시험 보복자 사이에서 약간씩 왔다 갔 다 하는 혼합 전략이 개체군 내에서 우세할 것이며, 그 변동에 따라 소수인 비둘기파도 수적 변동을 보일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경우 개체들이 항상 고정된 전략을 택한다는 다형성을 상정할 필요는 없다. 각 개체는 보복자, 시험 보복 자, 비둘기파가 복잡하게 뒤섞인 혼합 전략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시뮬레이션과 실제
이 이론적인 결론은 대부분의 야생 동물들 사이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과 그리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동물의 공격성이 '글러브를 낀 주먹'처럼 보이는 측면에 관해서도 어느 정도 설명한 셈이다. 물론 상세한 것은 승리나 부상, 시간의 낭 비 등에 주어지는 정확한 '점수'에 따라 달라진다. 바다표범에게 승리에 대한 보상은 큰 하렘에 대한 독점권이다. 그렇기 때문에 승리의 득점은 틀림없이 매우 높을 것이다. 싸움이 격렬한 것도, 중상을 입을 확률이 높은 것도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시간 낭비로 인한 손실(비용)은 부상에 따른 비용과 승리에 따른 이익에 비하면 적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추운 지방에서 사는 작은 새에게 시 간의 낭비라는 비용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손실일 것이다. 새끼를 기르는 박새는 30초에 한 번 꼴로 먹이를 잡지 않으면 안된다. 낮에는 일분일초가 귀중하다. 매파 대 매파 싸움에 소요되는 비교적 짧은 시간까지도 이와 같은 작은 새들에게는 아마 부상의 위험 이상으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사항일 것이다. 불행하게도 현재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의 비용과 이익을 실제 수치에 맞추어 보기에는 우리의 지식이 너무도 부족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임의로 정한 수치에서 단순히 얻어지는 결과를 가 지고 어떤 결론을 내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결론은 ESS가 진화할 것이라는 것, EsS는 집단 공모에 의해 얻 어지는 최적 상태와는 같지 않다는 것, 그리고 상식은 사실을 잘못 이해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소모전
메이너드 스미스가 생각한 또 하나의 전쟁 게임은 '소모전'이다. 이것은 위험한 싸움은 결코 하지 않는, 예를 들자면 부상 같은 것은 있을 수도 없는 갑옷으로 덮인 종에서 볼 수 있다. 이런 종에서 싸움은 모두 전통적으로 정해진 자세를 취하는 것으로 해결된 다. 싸움은 항상 어느 편이든 물러서면 끝난다. 이기기 위해서는 상대가 등을 돌릴 때까지 자기 진지에 버티고 서서적을 노려보기 만하면 된다. 위협하는 데 무한한 시간을 쓸 정도로 여유 있는 동물은 없다. 달리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얼마든지 있기 마련이다. 그 가 다투고 있는 자원은 가치 있는 것일지 모르지만 무한한가치가 있을 리는 없다. 그것은 시간 가치가 어느 정도 있을 뿐이고, 경 매에서 그렇듯 각 개체는 그 자원에 어느 정도의 시간만 투자하려고 한다. 이 두 입찰자의 경매, 즉 소모전에서는 시간이 통화인 것이다.
이 개체들이 모두 특정 자원에 대하여, 가령 암컷에 대하여 정확히 어느 정도 시간 가치가 있는가를 미리 계산해 놓았다고 가정하자. 계산한 '경매가'보다 조금 더 긴 시간을 투자하려고 각오한 돌연변이 개체는 항상 이길 것이다. 따라서 마음먹은 경매가를 유 지한다는 전략은 안정한 전략이 아니다. 설령 자원의 가치에 대한 추정이 아주 정확해서 모든 개체가 그 값을 불렀다고 해도 이 전 략은 안정한 것이 아니다. 이 가장 오래 버티기 전략에 따라 경매를 하는 두 개체는 똑같은 순간에 포기할 것이며 어느 편도 자원을 갖지 못할 것이다. 이 경우 개체에게는 싸움으로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다는 처음부터 권리를 포기하는 편이 상책이다.
소모전과 실제 경매의 커다란 차이는, 소모전에서 대가를 치르는 것은 두 경쟁자 모두이지만 이익을 얻는 것은 한 개체라는 점이다. 따라서 가 장 오래 버티기 전략을 취하는 개체군 내에서는 처음부터 포기하는 전략이 성공하여 개체군 내에 퍼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바로 포기하지 않고 몇 초 기다렸다가 포기하는 개체에게 이익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 전략은 현재 개체군 내에서 우세를 점하는 '즉시 포기파'에 대하여 유리할 것이다. 이때 자연선택은 포기 시간을 점점 연장하는 방향으로 작용하여, 결국 다투는 자원의 참된 경제 적 가치에 따라 결정되는 최대 버티기 시간에 다시 접근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도 수식을 쓰지 않고 말로써 개체군 내에서의 변동을 묘사했다. 그러나 수학적 분석에 따르면 이번에도 이 묘사는 틀린 것이다. 여기서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은 수식으로 표시되는데 이를 말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각 개체가 버티는 시간은 예측 불가능하다. 특정 싸움에서 개체가 버티는 시간은 예측 불가능하지만, 그 평균은 자원의 진가와 같다. 예를 들어 자원이 실제로는 5분의 가치가 있다고 하자. ESS에서 어떤 개체는 5분 이상 버틸지도 모르고, 5분도 버티지 못할지 모르고, 또 꼭 5분간만 버틸 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이 경우 그가 얼마나 버틸지 상대가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소모전에서는 내가 포기하려는 것을 상대가 눈치채지 않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수염을 조금 움직이든지 하여 포기하려는 것이 들키면 즉시 불리한 입장에 놓인다. 가령 수염을 움직이는 것이 1분 내에 포기한다는 확실한 징조라면 다음과 같은 지극히 단순한 승리의 전략이 존재할 수 있다. '상대의 수염이 움직이면 당신의 처음 계획이 무엇이었든 1분만 더 참아라. 상대의 수 염이 아직 움직이지 않고 게다가 당신이 포기하려고 했던 시간까지 이제 1분도 안 남았다면, 즉시 포기하고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하지 마라. 수염은 결코 움직이지 마라.' 이런 이유로 자연선택은 수염을 움직이는 행위나 그 밖의 속마음을 표출하는 행위를 즉시 벌 할 것이다. 그리하여 무표정한 얼굴, 즉 포커페이스가 진화하는 것이다.
철저하게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 포커페이스가 더 나은 것은 왜일까?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안정한 전략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부 분의 개체들이 정말로 장시간 버틸 작정일 때에만 목덜미 털을 세운다고 해보자. 상대방의 대응 전략, 즉 상대가 목털을 세우면 즉시 포기하는 전략이 진화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거짓말이 진화하기 시작한다. 실제로는 장시간 버틸 작정이 아닌 개체가 어떤 소모전에서나 목털을 세워 손쉽게 승리의 이익을 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거짓말쟁이의 유전자가 펴져 나갈 것이다.
거짓말쟁이가 대세를 차지하면 선택은 이제 그 속임수를 감지하는 개체를 선호할 것이다. 이 때문에 거짓말쟁이는 다시 그 수가 감소할 것이다. 소모전에서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진심을 말하는 것보다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이 아니다. 무표정한 얼굴은 진화적으로 안정하다. 결국 항복한다고 해도 그것은 돌발적이고 예측 불가능해야 한다. ***
비대칭적 싸움
우리는 지금까지 두 개체의 다툼에서 메이너드 스미스가 '대칭적' 싸움이라고 부른 것들만 다루었다. 즉 우리는 두 경쟁자의 싸 움에서 전략 이외의 모든 것은 똑같다고 가정했던 것이다. 매파와 비둘기파는 똑같이 강하고, 무기나 갑옷으로 동등하게 무장했고, 승리로 얻는 것도 동등하다고 가정했다. 이것은 하나의 모델을 만들기에는 편리한 가정이지만 별로 현실적이지 않다. 그래서 파커 와 메이너드 스미스는 비대칭적인 싸움을 고려하였다. 예컨대 전투 능력과 몸의 크기가 개체에 따라 다르며, 각 개체가 자기와 비 교해서 상대가 어느 정도 큰지 잘 수 있다면 이러한 결과는 ESS에 영향을 미칠 것인가?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크게 세 종류의 비대칭이 존재할 수 있다. 첫째는 앞서 말한 대로 몸의 크기라든가 전투 능력이 개체에 따라 다른 경우다. 둘째는 승리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개체에 따라 다른 경우다. 가령 여생이 길지 않은 노인은 앞으로 긴 삶을 바라보는 젊은이와는 달라서, 비록 부상을 입는다 해도 잃을 것이 별로 많지 않을지 모른다.
셋째는 좀 이상하기는 하지만 이 가설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하나의 결론으로, 순전히 임의적이고 전혀 무관해 보이는 비대 칭성으로 인해 ESS가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비대칭성 덕분에 싸움이 신속하게 수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많은 경우에 그렇듯 경쟁자의 한쪽이 다른 쪽보다 먼저 싸움터에 도착해 있을 수 있다. 그들을 각각'거주자'와 '침입자'라고 부르 기로 하자. 논의의 편의상, 거주자 또는 침입자로서 얻게 되는 일반적 이익은 없다고 가정한다. 이러한 가정이 실제로는 옳은 것이 아니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령 거주자가 침입자보다 일반적으로 유리하다고 생각할 만한 근거가 없 더라도, 그 비대칭(누구는 유리하고 누구는 불리한 비대칭 - 옮긴이)을 기반으로 한 ESS가 진화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이다. 이 에 상응하는 예로, 법석을 떨지 않고도 동전을 던져 신속하게 싸움을 결판 짓는 사람들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조건부 전략, 즉 '당신이 거주자라면 공격하고, 침입자라면 퇴각하라'는 전략은 ESS일 수 있다. 또 두 전략 간의 비대칭은 임의 적인 것이라 가정했으므로 '당신이 거주자라면 퇴각하고, 침입자라면 공격하라'는 정반대의 전략이 안정한 전략일 가능성도 있다.
어떤 개체군에서 이 두 개의 ESS 중 어떤 것이 선택될지는 어느 쪽이 먼저 과반수를 차지하느냐에 달려 있다. 대다수의 개체가 이 두 개의 조건 전략 중 한쪽을 취하면 그와 다른 전략을 취한 개체는 벌을 받게 된다. 따라서 그 전략은 정의상 ESS가 된다.
이를테면 모든 개체가 '거주자는 승리하고 침입자는 진다'는 전략을 취한다고 하자. 이것은 그들이 싸움에서 반은 이기고 반은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결코 다치지도, 시간을 허비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다툼이 임의의 규정에 따라 즉시 해결되 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새로운 돌연변이 반역자가 나타났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항상 공격하며 결코 물러나지 않는 순수한 매파 전략을 취한다고 해 보자. 상대가 침입자일 경우 이 개체는 이길 것이다. 상대가 거주자라면 이 개체는 부상의 위험을 감수해 야 한다. 평균적으로 그는 EsS의 임의의 규칙에 따라서 행동하는 개체보다 득점이 낮아진다. '당신이 거주자라면 도망가고, 침입 자라면 공격하라'는 관행에 반대되는 전략을 시도하는 반역자의 상황은 더욱 나쁘다. 그는 자주부상을 당할 뿐만 아니라 거의 이기 지 못한다. 그러나 어떤 우연한 일로 이 관행에 반대되는 전략을 따르는 개체가 과반수를 차지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때 이들 의 전략은 안정한 규범이 되어 이를 따르지 않는 개체는 처벌을 받는다. 아마도 한 개체군을 여러 세대에 걸쳐 관찰하다 보면 가끔 한 안정 상태에서 다른 안정 상태로 급변하는 과정을 목격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생활에서 순전히 임의적인 비대칭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컨대 거주자는 대개 침입자보다 유리한 입장에 있 을 것이다. 거주자는 그 지역의 지형을 잘 알고 있으며, 거주자가 오래도록 거기에 머물러 있었던 데 반해, 침입자는 이제 막 싸움 터로 왔기 때문에 숨 가쁠지도 모른다. 자연계에서 두 개의 안정 상태 중 '거주자는 이기고 침입자는 진다'라는 편이 안정 상태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데는 더 추상적인 이유가 있다. 즉 '침입자가 이기고 거주자가 진다'라는 반대의 전략은 스스로 붕괴하는 성향 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메이너드 스미스는 이것을 '역설적 전략'이라고 했다. 이 역설적 ESS의 상태에 있는 개체군 내의 개체는 항상 거주자로 보이지 않으려 애쓸 것이다. 어떤 다툼에서도 항상 침입자인 것처럼 보이려 노력할 것이다. 이렇게 하려면 그들은 부단히, 그리고 목적 없이 돌아다니는 수밖에 없다. 이에 소모되는 시간과 에너지는 차치하고라도, 이 진화적 경향으로 인해 '거주 자'라는 범주가 사라질 것이다. '거주자는 이기고 침입자는 진다'는 다른 안정 상태에 있는 개체군에서는 자연선택이 거주자가 되 려고 애쓰는 개체를 선호할 것이다. 각 개체에게 이는 특정 구역에 틀어박혀 가능한 한 그곳을 벗어나지 않고 마치 그곳을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러한 행동은 자연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우리는 이를 '영역 방어'라고 부른다.
이러한 종류의 행동적 비대칭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가장 훌륭한 예는 유능한 동물행동학자인 니코 틴버겐Niko Tinbergen의 기발 하고 간단명료한 실험에서 얻어진 결과다.* 틴버겐에게는 가시고기 수컷 두 마리가 들어 있는 수조가 있었다. 이 수컷들은 서로 수 조의 반대쪽 구석에 집을 짓고 자기 집 둘레의 영역을 '지키고' 있었다. 틴버겐은 이 두 마리의 물고기를 각각 큰 유리 시험관에 넣 고, 시험관을 나란히 놓아 시험관 속의 물고기들이 시험관 벽을 통하여 싸우려고 하는지 관찰하였다. 그는 매우 흥미로운 결과를 얻었다. 두 개의 시험관을 수컷 A의 집에 가까이 접근시키자 A가 공격 자세를 취하고 B는 물러나려고 했다. 그런데 시험관을 수컷 B의 영역으로 이동시키자 형세는 역전됐다. 틴버겐은 두 개의 시험관을 단순히 수조의 한 끝에서 다른 끝으로 이동시키는 것만으 로도 어떤 수컷이 공격하고 어떤 수컷이 물러서게 만들 수 있었다. 두 개체 모두 단순한 조건부 전략, 즉 '거주자면 공격하고, 침입 자면 물러나라'는 전략을 취했던 것이다. ***
생물학자들은 영역 방어 행동의 생물학적 '이점'이 무엇인가 묻는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 가능성이 제기되었는데, 그중 몇 가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언급하겠다. 그런데 이제 이 질문 자체가 쓸데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영역 방어'란 두 개체 와 한 패기의 땅 사이의 관계를 결정짓는 도착 시간의 차이, 즉 도착 시간의 비대칭성 때문에 생기는 하나의 ESS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체구의 차이
아마도 비임의적인 비대칭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몸의 크기와 일반적인 전투 능력의 차이일 것이다. 체구가 크다는 것은 싸 움에서 이기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건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중요한 요건 가운데 하나임이 분명하다. 싸움에서 몸집이 큰 편이 항 상 이긴다면, 그리고 각 개체가 자기가 상대보다 큰지 작은지를 확실히 알고 있다면 이때 쓸모 있는 전략은 단 하나밖에 없다. 즉
'상대가 더 크면 도망가라. 상대가 작으면 공격하라'는 전략이다. 몸집의 크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확실하지 않을 때는 문제가 좀 더 복잡해진다. 체구가 크다는 것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지금 말한 전략은 안정한 것이다. 그런데 부상 위험이 큰 경우에는 제2 의, '역설적' 전략도 있을 수 있다. 이는 '자기보다 큰 놈이면 싸움을 걸고, 작은 놈은 피하라'는 전략이다. 이 전략이 역설적인 이유 는 명백하다. 상식에 완전히 반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전략이 안정한 전략인 이유는, 모두가 역설적 전략을 취하는 개체군에 서는 누구도 부상을 입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싸움에서 몸이 큰 쪽이 항상 도망가기 때문이다. 여기에 작은 상대를 괴롭히 는 '상식적' 전략을 취하는 평균적 몸 크기를 지닌 돌연변이 개체가 나타난다면, 그 개체는 자신이 마주친 상대의 절반가량과 격한 싸움을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가 자기보다 작은 상대와 마주치면 공격을 하고, 그 작은 개체는 역설적 전략을 취하고 있으므로 공격에 맞서 싸우기 때문이다. 상식적 전략을 취하는 개체(상식파)가 역설적 전략을 취하는 개체(역설파)보다 이길 확률은 높으나, 한편 패할 위험과 크게 다칠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개체군의 대부분이 역설적 전략을 취하고 있으므로, 상식적 전략을 취하는 개 체는 역설적 전략을 취하는 어느 개체보다 다칠 가능성이 높다.
설령 역설적 전략이 안정한 전략이라고 해도 이것은 다만 학문적으로 흥미로운 것에 불과하다. 역설파가 상식파보다 높은 득점 을 올리는 것은 그들이 상식파보다 압도적으로 많을 때에만 가능하다. 이 상태가 처음에 어떻게 생겨날 수 있는지 상상하기란 어렵 다. 설령 그러한 상태가 생겨났다 해도, 개체군 내에서 역설파에 대한 상식파의 비율이 아주 조금만 증가하면 다른 EsS, 즉 상식파 의 EsS의 '유인 지대'에 빨려들고 말 것이다. 이 경우 유인 지대란 상식파가 유리하게 되는 개체군 내 비율의 집합을 말한다. 즉 한 개체군이 이 유인 지대에 들어가면 상식적 전략의 안정점 쪽으로 어쩔 수 없이 빨려들어 가는 것이다. 자연계에서 역설적 ESS의 예를 발견하는 것은 흥분할 만한 일이지만, 정말로 그 예를 발견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내가 너무 빨리 이 문장을 써 버렸나 보 다. 이 마지막 문장을 쓴 후에 메이너드 스미스 교수가 내게 버제스. W. Burgess가 멕시코산 사회성 거미인 오에코비우스 시비타스 Oecobius civitas(티끌거미의 일종 - 옮긴이)의 행동에 관해 쓴 것을 알려 주었다. "이 거미에게 자극을 주어 은신처에서 나오게 하면 이 거미는 바워를 쏜살같이 가로질러 가 몸을 숨길 빈틈을 찾는데, 만약 빈틈을 찾지 못하면 같은 종 다른 개체의 집으로 달려든다.
도망쳐 온 침입자가 들어왔을 때 거기에 거주하던 거미는 침입자를 공격하지 않고 밖으로 나와 자기가 숨을 곳을 새로이 찾는다.
이 때문에 일단 거미 한 마리를 자극하면 거미들이 차례대로 집을 바꾸는 과정이 수 초 동안 계속되고, 이로 인해 종종 그 집단의 개체 대다수가 자기 집에서 새로운 집으로 이동하게 된다( 「사회성 거미Social Spiders J,
r 사이언티픽 아메리칸scientific
Americang , 1976년 3월호). 이 전략은 173쪽에서 설명한 의미에서 볼 때 역설적이다.]*
순위제
만약 개체들이 과거의 싸움에 관해 무언가 기억하고 있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것은 그 기억이 개별적인 것인가 아니면 일 반적인 것인가에 따라 다르다. 귀뚜라미는 과거 싸움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일반적인 기억을 갖고 있다. 최근에 많은 싸움에서 승 리한 귀뚜라미는 매파처럼 행동한다. 반면 계속 지기만 한 귀뚜라미는 비둘기파처럼 행동한다. 이를 알렉산더R. D. Alexander가 근사 하게 입증했다. 알렉산더는 모형 귀뚜라미를 사용해 진짜 귀뚜라미를 공격했다. 그다음부터 그 귀뚜라미는 다른 진짜 귀뚜라미와 의 싸움에서 지는 일이 많아졌다. 각각의 귀뚜라미는 자기의 개체군 내 개체들의 평균적 전투 능력과 비교해 자기의 전투 능력을 끊임없이 재평가하는 것 같다. 과거의 싸움에 대한 일반적인 기억을 갖고 있는 귀뚜라미와 같은 동물이 일정 기간 동안 밀폐된 집 단을 이루면 모종의 우열 순위가 생겨난다.* 그리하여 관찰자는 각 개체를 차례대로 나열할 수 있다. 순위가 낮은 개체는 순위가 높 은 개체에게 항복하는 경향이 있다. 개체끼리 서로를 알아본다고 가정할 필요는 없다. 여기서 벌어지는 것은 이기는 데 익숙해진 개체는 계속해서 이기고, 지는 데 익숙해진 개체는 정해 놓고 지기만 하는 것뿐이다. 처음에는 개체들이 완전히 무작위로 이기고 지다가 자연히 개체들 사이에 어떤 순위가 매겨진다. 이것은 부수적으로 집단 내의 심한 다툼을 점차 줄이는 효과가 있다.
이것을 '모종의 우열 순위'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우열 순위라는 말을 개체들이 서로를 알아보는 경우에만 쓰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과거 싸움의 기억은 일반적이라기보다는 개별적이다. 귀뚜라미는 상대를 알아보지 않지만 닭이나 원숭이는 상대를 알아본다. 당신이 원숭이라면, 과거에 당신을 이긴 적 있는 원숭이는 앞으로도 당신을 이길 가능성이 높다. 이런 경우 개체 에게 최선의 전략은 이전에 자기를 이긴 적 있는 개체에 대해서는 비둘기파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이전에 맞부딪친 적 없는 암탉들 을 같이 놔두면 대부분의 경우 엄청나게 싸운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 싸움은 줄어드는데, 이유는 귀뚜라미의 경우와 다르다. 암탉 의 경우 싸움이 줄어드는 것은 각 개체가 다른 개체에 대한 ' 자신의 지위를 배우기' 때문이다. 이것은 부수적으로 집단 전체에게 좋
다. 그 증거로서, 순위가 정해져 있어 심한 싸움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 암탉의 무리가 끊임없이 구성원이 바뀌어 항상 싸움이 일어 나는 무리보다 산란율이 훨씬 높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다. 생물학자들은 흔히 순위제의 생물학적 이점 또는 '기능'은 집단 내에서 공공연하게 벌어지는 공격을 줄이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옳지 않다. 순위제 그 자체는 집단의 특성이지 개체의 특성이 아니기 때문에 진화적 의미에서 '기능'을 가졌다고 할 수 없다. 집단 수준에서 볼 때 순위제의 형태로 나타나는 개체의 행동 패턴에는 기능이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기능'이라는 말 대신에 개체 인식과 기억이라는 두 기작이 존재하는 비대칭적 싸움에서의 ESS라는 관점으로 생각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 ***
같은 종끼리 또는 다른 종끼리
지금까지는 동종 개체 간의 싸움에 관해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면 종 간의 다툼은 어떠할까? 앞서 말한 대로 다른 종의 구성원은 같은 종의 구성원에 비하면 그렇게까지 직접적인 경쟁 상대가 아니다. 이 때문에 자원을 놓고 다른 종 간에 다툼이 생기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 기대할 수 있으며, 이는 실제로도 그러하다. 가령 울새는 다른 울새에 대해서는 영역을 방어하지만 박새에 대해서는 방어하지 않는다. 어떤 숲속에 있는 울새들의 영역을 지도에 표시할 수 있고 그 위에 박새들의 영역을 겹쳐 그릴 수 있다.
이 두 종의 영역은 서로 상관없이 완전히 겹쳐 그릴 수 있다. 마치 두 지도가 별개의 행성 위에 그려져 있는 듯 말이다.
그런데 다른 종 개체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경우도 있다. 가령 사자는 영양을 잡아먹고 싶어 하나 영양은 전혀 생 각이 다르다. 보통 이것을 자원에 대한 경쟁이라고 보지 않는 경향이 있으나,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렇게 보지 않을 이유가 없 다. 이때의 자원은 고기다. 사자의 유전자는 자기의 생존 기계의 먹이로서 그 고기를 '원한다'. 영양의 유전자는 자기의 생존 기계를 위해 일하는 근육이나 기관으로서 그 고기를 필요로 한다. 그 고기의 두 가지 용도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이므로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것이다.
자기 종의 구성원 또한 고기로 되어 있다. 그런데 왜 서로 잡아먹는 일이 비교적 드문 것일까? 검은머리갈매기의 경우에서 보았 듯이 어른 개체는 때때로 자기 종의 새끼를 먹는다. 그러나 육식 동물이 자기 종의 다른 어른 개체를 먹으려고 적극적으로 쫓는 일 은 결코 없다. 왜 그런 걸까? 우리는 여전히 진화를 '종의 이익' 관점에서 보는 견해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사자는 왜 다른 사자 를 사냥하지 않는가?"와 같은 아주 타당한 질문을 하지 않는다. 누구도 던지지 않는 좋은 질문 중에는 "영양은 왜 반격하지 않고 사 자로부터 도망치는가?”라는 것도 있다.
사자가 사자를 잡아먹지 않는 것은 그것이 그들에겐 ESS가 아니기 때문이다. *** 동종끼리 서로 잡아먹는 전략은 앞에서 살펴본 매 파의 전략과 같은 이유로 불안정하다. 또 보복의 위험도 너무 크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종 간의 싸움에는 별로 해당되지 않는다.
대개 피식자 동물이 보복하지 않고 도망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것은 다른 종의 두 개체 간 상호 작용에는 같은 종의 개체 간보다 더 큰 비대칭, 즉 더 큰 차이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개체 간 싸움에서 큰 비대칭이 존재할 때 ESS는 항상 그 비대 칭에 근거한 조건부 전략이 될 가능성이 크다. 다른 종 간의 다툼에서 이용될 수 있는 비대칭은 얼마든지 있으므로 '작으면 도망가 고 크면 공격하라'는 식의 전략이 훨씬 진화하기 쉽다. 예컨대 사자와 영양은 진화적 분기를 거쳐 어떤 안정 상태에 이르렀는 데, 이들이 겪어 온 진화적 분기는 이들 간의 싸움에 본래 존재하던 비대칭을 점점 더 증폭시키는 것이었다. 그들은 각각 쫓고 쫓기 는 데 대가가 되었다. 사자에게 '맞서는' 전략을 취하는 돌연변이의 영양이 있다 해도 그는 지평선 너머로 도망쳐 사라지는 영양보 다 성공적일 수 없을 것이다.
ESS 개념
다윈 이후 진화론에서 가장 중요한 진보를 꼽으라면, ESS개념의 창안을 들어야 할 것이다.* 이 개념은 이해 대립이 있는 경우 라면, 즉 거의 어디에나 적용될 수 있다. 동물 행동을 연구하는 학생들은 '사회 조직'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습관이 있다. 어떤 종의 사회 조직은 그 자체로 생물학적 '이점'을 지닌 독자적 실체로서 취급되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그 단적인 예가 바 로 앞서 설명한 '순위제'다. 생물학자들이 사회 조직에 대해 언급하는 내용 상당수의 배후에는 집단선택주의자의 가정이 숨어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메이너드 스미스의 ESS 개념은 독립된 이기적 실체가 어떻게 해서 조직화된 전체를 닮게 되는가를 우리에게 최초로 가르쳐 줄 것이다. 이 사실은 종 내의 사회 조직뿐만 아니라 많은 종으로 이루어진 '생태계'나 '군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장기적 인 안목에서 보면 ESS 개념은 생태학에 혁명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Ess 개념은 우리가 3장에서 뒤로 미뤘던, 좋은 팀워크를 필요로 하는 한 보트 안의 조정 선수(한 몸 안의 유전자에 해당)에의 비 유에도 적용할 수 있다. 유전자는 혼자 있을 때 '좋은 것'이 아니라, 유전자 풀 내 다른 유전자를 배경으로 할 때 좋은 것이어야 선택 된다. 좋은 유전자는 수 세대에 걸쳐 몸을 공유해야 할 다른 유전자와 잘 어울리고 또 상호 보완적이어야 한다. 식물을 잘게 씹는 이빨의 유전자는 초식 동물의 유전자 풀 내에서는 좋은 유전자지만 육식 동물의 유전자 풀에서는 나쁜 유전자이다.
서로 잘 어울리는 유전자의 세트가 하나의 단위로서 함께 선택되는 것은 상상할 수 있다. 3장에서 설명한 의태하는 나비의 경우 에는 정말로 그런 것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ESS개념은 우리에게 독립적인 유전자 수준에서의 선택으로도 이와 똑같은 결과가 얻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유전자들이 같은 염색체상에서 연관되어 있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조정 선수에의 비유는 실제로 아직 이 아이디어를 설명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이에 가장 가까운 설명은 다음과 같은 것 이다. 경주에서 이기려면 팀의 선수들끼리 언어로 자기가 할 일을 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자. 또한 코치의 지휘하에 있는 선 수들 중 어떤 선수는 영어밖에 못하고 어떤 선수는 독일어밖에 못한다고 하자. 영국인이 항상 독일인보다 노 젓는 것이 낫거나 서
툴거나 하지는 않다. 그러나 의사소통이 중요하기 때문에 영국인과 독일인이 섞인 팀이 영국인만으로 구성된 팀이나 독일인만으 로 구성된 팀에 비해 이기는 횟수가 적을 것이다.
코치는 이를 모른다. 그는 선수를 마구 섞어서 이긴 팀의 보트에 탔던 선수에게 점수를 주고, 진 팀의 보트에 탔던 선수는 점수를 깎는다. 그 코치가 데리고 있는 선수 풀에 우연히도 영국인이 많으면, 어떤 보트에 탄 한 독일인은 의사소통이 되지 않으므로 그 팀 을 지게 만들기 쉬울 것이다. 반대로 선수 풀에 우연히 독일인이 많을 때에는, 한 명의 영국인 때문에 그 팀은 경주에서 질 수도 있 다. 종합적으로 최상의 팀이 되려면 두 개의 안정 상태 중 하나일 때, 즉 전원이 영국인이든지 전원이 독일인이든지 하는 상태여야 한다. 언뜻 보면 마치 코치가 특정 언어를 쓰는 선수 그룹을 단위로 하여 선택한 듯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하는 일과는 거리 가 멀다. 그는 경주에서 이기는 능력에 근거하여 선수들을 개별적으로 선발할 뿐이다. 어떤 선수가 경주에서 이길 것인가는 대기 선수의 풀에 어떤 선수들이 있는가에 달려 있다. 영국인이든지 독일인이든지 소수로 존재하는 대기 선수들은 자동적으로 불리하 지만, 그것은 노 젓는 것이 서툴러서가 아니라 단지 그들이 소수이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하게, 서로 잘 어울리는 유전자가 같이 선 택됐다고 해서 반드시 유전자 집단이 선택의 단위가 되어야(나비의 예 에서처럼) 하는 것은 아니다. 유전자 하나의 낮은 수준에서 선택이 진행되더라도 더 높은 수준에서 선택이 진행되는 것 같은 인상을 줄 수도 있다.
이 예에서 선택은 단순한 일치를 선호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서로를 보완하는 유전자들이 선택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비유적으로, 아주 이상적인 팀 구성은 오른손잡이 네 명과 왼손잡이 네 명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아까와같이 코치는 이 사실을 모르고, 단순히 선수의 '성적'을 기준으로 선발한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대기 선수 풀에 우연히 오른손잡이가 많다면 왼 손잡이 선수는 유리한 입장에 놓일 것이다. 자기가 타고 있는 보트를 이기게 할 수 있으므로 좋은 선수인 것처럼 보일 것이다. 반대 로 왼손잡이가 많은 선수 풀에서는 오른손잡이가 유리할 것이다. 이것은 비둘기파의 개체군 내에서는 매파가, 매파 개체군 내에서는 비둘기파가 성공적인 것과 같다. 다른 점이라면 비둘기파와 매파의 예는 개체 간의, 즉 이기적 기계 간의 상호 작용에 대한 것인 데 비해, 우리의 예에서는 체내 유전자 간의 상호 작용을 비유해서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코치가 맹목적으로 '좋은' 선수를 뽑아도 결국은 왼손잡이 네 명과 오른손잡이 네 명으로 구성되는 이상적인 팀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것은 마치 코치가 균형 잡힌 하나의 완전한 단위로서 선수들을 뽑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코치가 한 수준 아래, 즉 개개의 후보 수준에서 선택한다고 보는 것이 부가적인 가정이 필요 없는, 더 '인색'한 견해일 것이다(간결하고 명료한 이론을 위해서 생 물학에서는 어떤 현상에 대해 더 인색한 설명을 채택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 인색 원리(aw of parsimony라고 한다 - 옮긴이). 왼손잡이 네 명, 오른손잡이 네 명의 진화적으로 안정한 상태(여기서 '전략'이라는 말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는 단순히 성적에 기초 한 한 단계 낮은 수준에서의 선택에 따라 얻어지는 결과일 뿐이다.
유전자 풀은 오랜 기간에 걸친 유전자의 환경이다. '좋은' 유전자란 맹목적으로 선택되어 유전자 풀에서 살아남은 것이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다. 관찰된 사실도 아니다. 이것은 동어 반복일 뿐이다. 그렇다면 좋은 유전자는 어떤 속성을 지니고 있는가? 이에 대해 나는 앞서 좋은 유전자는 유능한 생존 기계, 즉 몸을 만드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이제는 이를 수정해야 할 때다. 유전자 풀은 진화적으로 안정한 유전자들의 세트가 될 것이며, ***이는 어떠한 새로운 유전자도 침입할 수 없는 유전자 풀로 정의된다. 돌연변이나 재조합, 또는 이입으로 생기는 새로운 유전자는 대부분이 자연선택의 벌을 받아 즉시 제거되고 진화적으로 안정한 유전자 세트는 복원된다. 어떤 새로운 유전자가 그 세트에 침입하는 데 성공해 유전자 풀 내에 퍼져 나가는 경우도 있다. 그 러면 불안정한 과도기를 거쳐 진화적으로 안정한 새로운 조합이 만들어진다. 작은 진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공격 전략에 대한 예에 서 설명했던 것처럼, 개체군에는 또 다른 안정점이 하나 이상 존재할 수 있고 때때로 이쪽 안정점에서 저쪽 안정점으로 갑자기 펄 쩍 뛰어넘기도 한다. 진보를 향한 진화는 꾸준히 올라가는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한 안정기에서 다음 안정기로 불연속적인 계단을 올라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개체군 전체가 마치 하나의 자기 조절 단위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착각은 유전자의 수
준에서 진행되는 선택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유전자는 그 '우수성' 때문에 선택된다. 그러나 그 우수성은 진화적으로 안정한 세트 즉 현재의 유전자 풀을 배경으로 했을 때 그 성과가 얼마나 뛰어난지에 기초하여 결정된다.
메이너드 스미스는 개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공격적 상호 작용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이 과정을 분명히 설명할 수 있었다. 매파 의 몸의 개수와 비둘기파의 몸의 개수 사이에 안정한 비율이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하기는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몸은 큰 물체여서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다른 몸속에 들어앉아 있는 유전자 간에 벌어지는 상호 작용은 빙산의 일각 에 불과하다. 진화적으로 안정한 세트, 즉 유전자 풀 내에서 유전자 간의 상호 작용 대부분은 하나의 몸속에서 벌어진다. 이들의 상 호 작용은 세포 내에서, 특히 발생 중인 배의 세포 내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육안으로 보기는 어렵다. 모든 것이 잘 통합된 몸이 존 재하는 것은, 그것이 이기적 유전자들의 진화적으로 안정한 세트가 만들어 낸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의 주제인 동물 개체들 간의 상호 작용 수준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공격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개의 동물을 독 립된 이기적 기계로 보는 것이 편리했다. 이러한 모델은 우리가 형제자매, 사촌, 부모 자식 간과 같은 가까운 혈연자를 다를 때는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다. 혈연자끼리는 상당히 많은 유전자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의 이기적 유전자를 위해 다른 여러 개의 몸이 충성을 다한다. 이것에 관해서는 다음 장에서 설명하겠다.
Genesmanship
Genesmanship
유전자의 행동방식
이기적 유전자와 이타주의
이기적 유전자란 무엇일까? 그것은 단지 DNA의 작은 조각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원시 수프에서처럼, 그것은 온 세상에 퍼져 있는 특정 DNA 조각의 모든 복사본들이다. 우리가 원한다면 언제라도 적절한 용어로 고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유전자가 마치 의식적으로 목적을 갖고 있는 듯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이기적 유전자의 목적이 무엇인가 질문할 수 있다. 이기적 유전자의 목적은 유전자 풀 속에 그 수를 늘리는 것이다. 유전자는 기본적으로 그것이 생존하고 번식하는 장소인 몸에 프로그램 짜 넣는 것 을 도와줌으로써 이 목적을 달성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유전자가 다수의 다른 개체 내에 동시에 존재하는 분산된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 장의 핵심은 유전자가 남의 몸속에 들어앉아 있는 자신의 복사본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 것은 개체의 이타주의로 나타나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전자의 이기주의에서 생겨난 것이다.
알비노 유전자, 녹색 수염
인간의 알비노(선천성 색소 결핍증- 옮긴이) 유전자를 생각해 보자. 실제로 알비노를 일으키는 유전자는 여러 개가 있으나 여 기서는 그중 하나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기로 한다. 이 유전자는 열성이다. 즉 어떤 사람이 알비노가 되려면 이 유전자가 두 개 존재 해야만 한다. 약 2만 명 중 한 명 정도는 이렇게 알비노가 된다. 그러나 70명 중 한 명 정도는 이 유전자를 하나만 가지고 있는데, 이 들은 알비노가 아니다. 알비노 유전자와 같은 유전자는 많은 개체에 퍼져 있기 때문에 이론상 자기가 머물고 있는 몸이 다른 알비
노 개체의 몸에게 이타적으로 행동하도록 프로그램함으로써 유전자 풀 속에서 자기의 생존을 도울 수 있다. 알비노 개체는 자신의 몸에 들어 있는 유전자와 동일한 유전자를 갖고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알비노 유전자가 들어 있는 몇 사람의 죽음으로 같은 유전자를 가진 다른 몸이 생존할 수 있다면 알비노 유전자로서는 매우 다행한 일일 것이다. 만약 알비노 유전자가 들어앉은 몸 하 나가 다른 알비노 10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면, 그 이타주의자가 죽더라도 유전자 풀 속의 알비노 유전자 수가 증가해 그 죽음이 충분히 보상되는 것이다.
그러면 알비노끼리는 특별히 서로에게 더 친절한 걸까? 아마도 실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유전자를 의식적인 존재에 비유했던 것을 일시적으로 중단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그런 비유를 쓰면 분명 오해를 일으킬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다소 설명이 길어질지 몰라도 적절한 용어로 바꿔야겠다. 알비노 유전자는 실제로 살고 싶다든가 다른 알비노 유전자를 돕고 싶다든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알비노 유전자가 어쩌다가 자신이 들어 있는 몸이 다른 알비노에 대해 이타적으로 행동하도록 했다면, 결과적으로 유전자 풀 내에서 그 수가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 유전자가 몸에 대해 두 가지의 독립 적인 효과를 내야만 한다. 그것은 심하게 하얀 피부를 만들어 내는 보통의 효과뿐 아니라, 심하게 하얀 피부를 지닌 사람에게 선택 적으로 이타적 행동을 하는 경향을 만들어 내는 효과도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이중 효과를 가진 유전자가 만일 존재한다면 그것 은 개체군 내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3장에서 강조한 대로 유전자가 여러 형질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얀 피부든 녹색 수염이든 다른 어떤 유별난 특징 이든 간에, 겉으로 보이는 '표시'와 그 표시의 주인에게 특히 친절하게 하는 경향을 동시에 발현시키는 유전자가 생기는 것은 이론 적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가능하긴 하지만 가능성이 특별히 높을 것 같지는 않다. 녹색 수염은 살을 파고들며 자라는 발톱 등과 같 은 다른 어떤 형질과도 연관될 수 있으며, 녹색 수염에 대한 호감은 프리지어 향기를 맡지 못하는 형질과도 연관될 수 있다. 하나의 동일한 유전자가 표시와 그 표시에 대한 이타주의 둘 다를 만들어 낼 가능성은 아마도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녹색 수염 이타주의 효과'의 존재는 이론상 가능하다.
녹색 수염과 같은 임의의표시는 한 유전자가 다른 개체 내에서 자기 사본을 알아보는' 방법 중 하나일 뿐이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도 있을까? 특히 직접적으로 가능한 방법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이타적 유전자를 갖고 있는 개체를 단순히 이타적 행 위를 한다는 사실로 알아보는 것이다. 어떤 유전자가 자기 몸에게 "A가 물에 빠진 자를 건지려다 물에서 못 나오면 뛰어들어 A를 구하라"는 식으로 말한다’면 이 유전자는 유전자 풀 속에서 번영할 것이다. 이와 같은 유전자가 성공하는 이유는 A가 남의 생명을 구하는 이타적 유전자를 가지고 있을 확률이 평균보다 높기 때문이다. A가 다른 누군가를 도우려 했다는 것이 녹색 수염과 같은 일 종의 표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녹색 수염만큼 자의적인 표시는 아니지만, 여전히 별로 그럴싸해 보이지 않는다. 유전자가 다른 개체 내에서 자기의 사본을 '알아보는' 그럴싸한 방법이 있을까?
혈연자
한 가지 방법이 있다. 가까운 친척, 즉 혈연자가 유전자를 공유할 확률이 평균보다 높다는 것을 증명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 때문 에 그토록 많은 부모들이 새끼에게 이타적 행동을 한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밝혀진 사실이다. 피셔, 헐데인·. B. 5. Haldane, 그리고 특히 해밀턴이 알아낸 것은 이를 다른 혈연자(형제자매, 조카, 가까운 친척)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열 사람의 혈연 자를 구하기 위해 한 개체가 죽었을 경우, 혈연 이타주의 유전자의 사본 하나는 없어지지만 같은 유전자의 보다 많은 사본이 구조 되는 셈이다.
그러나 '보다 많은 사본'이라는 것은 다소 모호하다. '혈연자'라는 것도 그러하다. 해밀턴이 입증한 것처럼 우리도 이를 조금 더 분명히 할 수 있다. 1964년 발표된 해밀턴의 두 논문은 지금까지의 사회성 동물행동학 문헌 중 가장 중요한 것인데, 이들 논문이 그간 왜 동물행동학자들에게 무시되어 왔는지 이해가 안 된다(그의 이름은 1970년에 출간된 두 종의 중요한 동물행동학 교과서의 색인에서조차 없다).* 다행히 최근 그의 이론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고 있다. 해밀턴의 논문은 다소 수학적이지만, 정확한 수식 없이 직관적으로도 기본 원리를 쉽게 터득할 수 있다. 비록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것에도 문제가 있겠지만 말이다. 우선 우리가 계산하려는 것은, 예컨대 자매와 같은 두 개체가 특정한 유전자를 공유할 확률이다.
논의를 쉽게 하기 위해 전체 유전자 풀에서 드물게 존재하는 유전자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혈연관계든 아 니든 '알비노가 되지 않게 하는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다. 이 유전자가 이토록 흔한 것은 자연계에서는 알비노가 비카알비노에 비 해 생존이 어렵기 때문이다. 예컨대 햇빛에 눈이 부셔 다가오는 포식자를 알아채지 못하는 식으로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비알비노 유전자와 같이 명백히 '좋은' 유전자가 왜 유전자 풀 내에 널리 퍼졌는지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유전자의 이타성 때문에 유전 자풀 내에서 그 유전자가 퍼진다는 것을 설명하고 싶은 것이다. 따라서 적어도 이 진화 과정의 초기 단계에서만큼은 그 유전자가 드문 것이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개체군 전체에서는 드물더라도 어떤 가족 내에서는 흔히 존재하는 유전자가 있다는 점이다. 나도 개체군 전체에서는 드물게 나타나는 유전자를 많이 가지고 있고 당신도 마찬가지다. 우리 두 사람이 드문 유 전자를 공유할 확률은 극히 낮다. 그러나 나의 누이가 나와 똑같은 드문 유전자를 갖고 있을 확률은 어느 정도 있으며, 당신의 누이 가 당신과 공통으로 드문 유전자를 갖고 있을 확률 또한 같은 정도다. 이 경우 그 확률은 정확히 50퍼센트다. 그 이유는 쉽게 설명 된다.
당신이 유전자 G의 사본 한 개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자. 그것은 틀림없이 당신의 아버지나 어머니 중 어느 한편에서 받았을 것이다(편의상 여러 가지 드문 가능성들, 즉 G가 새로운 돌연변이라거나, 부모 모두가 그것을 가지고 있을 경우, 또는 부모 중 누군가가그 사본을 두 개 가지고 있는 경우 등은 무시하기로 한다). 이 유전자를 당신에게 준 사람이 아버지였다고 하자. 이 경우 아버 지의 체세포는 모두 G의 사본을 한 개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당신은 인간이 정자를 만들 때 자기의 유전자를 절반씩 나눈다 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누이를 만든 정자가 유전자 G를 받았을 확률은 50퍼센트다. 한편 당신이 어머니로부터 G 를 받았다고 하면, 같은 이유로 어머니가 만든 난자의 절반이 G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며, 누이가 G를 가지고 있을 확률 또한 50퍼 센트다. 이것은 당신에게 1백 명의 형제자매가 있다면, 그중 약 50명이 당신이 가진 것과 똑같은 드문 유전자를 갖고 있다는 말이 된다. 또 당신이 드문 유전자를 1백 개 갖고 있다면, 그중 약 50개는 형제 또는 자매 누군가의 몸에 들어 있다는 말도 된다.
근연도
친족 관계인 개체에 대해서는 멀거나 가깝거나 관계없이 이와 같은 식으로 계산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다. 당신이 유전자 H의 사본을 한 개 가지고 있다면, 당신 아이들 중 어느 한 아이가 그것을 갖게 될 확률은 50퍼센트다. 왜냐하면 당신의 생식 세포의 반수가 H를 가지고 있고, 당신 아이들은 누구라도 그 생식 세포의 하나로부터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당신이 유 전자 J를 한 개 가지고 있다면, 당신 아버지가 J를 가지고 있을 확률은 50퍼센트다. 왜냐하면 당신은 자신의 유전자 절반을 아버지 로부터, 나머지 절반은 어머니로부터 받았기 때문이다. 편의상 두 사람의 혈연자가 한 개의 유전자를 공유할 확률을 나타내는 근연 도relatedness라는 지표를 쓰기로 하자. 두 사람이 형제간인 경우,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유전자의 절반을 그 형제도 갖고 있을 것이 므로 그 근연도는 1/2이다. 이것은 평균적 수치다. 즉 감수 분열이라는 제비뽑기에서 얼마나 행운이 따르느냐에 따라 어떤 형제들 사이에서 공유하는 유전자는 이보다 많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부모와 자식 간의 근연도는 언제나 반드시 1/2이다.
혈연 이타주의 유전자
이제 혈연 이타주의 유전자에 대해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해 보자. 사촌 다섯 명을 구하기 위해 자기의 생명을 버리는 유전자가 개체군 내에 많아질 리는 없으나, 형제 다섯 명이나 사촌 열 명 때문에 생명을 버리는 유전자의 수는 많아질 것이다. 이타적 자살 유전자가 성공하기 위한 최소의 조건은 그 유전자가 형제(또는 자식이나 부모) 두 명 이상, 배다른 형제(또는 작은아버지, 작은어 머니, 조카, 조카딸, 할아버지•할머니, 손자) 네 명 이상, 또는 사촌 여덟 명 이상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평균적으로 이런 유전자 는 자신이 구조한 많은 개체의 몸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이타주의자 자신의 죽음에 따른 손실을 보상받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일란성 쌍둥이라는 사실이 확실하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행복을 자기 것과 마찬가지로 중요하게 여길 것이 다. 쌍둥이 이타주의 유전자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쌍둥이 모두에게 있을 것이므로, 한쪽이 다른 쪽을 살리고 영웅적으로 죽어도 그 유전자는 살아남는다. 아홉 줄 아마딜로는 네 마리의 일란성 쌍둥이를 낳는다. 아직까지 아마딜로 새끼들의 영웅적인 자기희생 사례는 보고되지 않았으나 모종의 강력한 이타주의가 있을 것이라 추정되어 왔다. 누구라도 남아메리카에 가서 한번 살펴볼 가치 가 분명히 있는 일이다.*
이제 우리는 부모의 자식 돌보기는 혈연 이타주의의 특수한 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전적으로 말하면, 만약 갓난아 기인 동생이 고아가 됐을 경우 형제들은 이 어린 동생을 자기의 친자식처럼 열심히 돌봐 줘야 할 것이다. 근연도가 똑같이 1/20기 때문이다. 유전자선택의 용어로 말하자면, 누나의 이타적 행동에 대한 유전자가 개체군 내에 퍼질 확률은 부모의 이타적 행동에 대 한 유전자와 같은 정도여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다음에 설명할 여러 이유에서 볼 때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것이며, 실제로 자연계 에서 누나 또는 형이 동생을 돌보는 것은 부모가 자식을 돌보는 것만큼 흔하지 않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부모 자식 간의 관계가 형제자매 간의 관계에 비해 '유전적'으로 더 특별할 것은 없다는 사실이다. 부모가 실제로 자식에게 유전자를 건네주 는 데 반해 자매간에는 유전자를 주고받지 않는다는 지적은 부적절하다. 왜냐하면 자매는 같은 부모로부터 같은 유전자의 복사본 을 물려받기 때문이다.
원숭이와 고래의 이타적 행위
별로 돌아다니지 않는 동물이나 작은 그룹을 이루어 돌아다니는 동물에서는 자기가 만나는 개체가 누구든 자기와 친척일 가능 성이 크다. 이 경우 "자기 종의 구성원이면 누구에게나 친절해라" 라는 규칙은 플러스의 생존 가치를 가질 수 있는데, 이는 이 유전 자를 갖고 있는 개체에게 이 규칙을 따르도록 하는 유전자가 유전자 풀 속에서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원숭이 무리와 고래 무리에서 이타적 행동이 자주 보고되는 이유일 것이다. 고래와 돌고래는 공기를 들이마시지 않으면 익사한다. 아기 고래들이 나 상처를 입어 수면까지 뜨지 못하는 개체를 같은 무리의 동료들이 도와서 수면으로 떠올리는 것이 관찰된 적이 있다. 고래가 자 기 친척을 알아보는 수단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은 문제가 안 될 수도 있다. 무리에서 마주치는 구성원이 친척일 가능성이 매우 높으므로, 그 이타주의는 그만한 대가(비용)를 치를 가치가 있다. 그런데 물에 빠진 사람을 야생 돌고래가 구조했다는 믿을 만 한 이야기가 있다. 이것은 물에 빠진 무리 내 구성원을 돕기 위한 규칙이 잘못 사용된 것이라 생각된다. 물에 빠진 무리의 구성원에 대한 정의는 대략 '수면 가까이에서 숨을 못 쉬고 허우적대는 기다란 물체'와 비슷할 것이다.
비비원숭이 어른 수컷은 표범 같은 포식자로부터 무리의 구성원들을 목숨 걸고 지킨다는 보고가 있다. 평균적으로 어른 수컷은 무리 내 다른 구성원에게도 들어 있는 유전자를 여러 개 가질 가능성이 높다. "몸아, 네가 어른 수컷이라면 표범으로부터 무리를 지켜라”라고 '말하는' 유전자는 유전자 풀 속에서 그 수가 늘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종종인용되는 예에 대한 논의를 마치기
전에, 권위 있는 학자 한 명 이상이 보고한 전혀 다른 사실을 이야기해야 공평할 것 같다. 그 학자에 따르면 어른 수컷 비비원숭이 는 표범이 출현하면 맨 먼저 지평선 너머로 도망쳐 버린다고 한다.
혈연선택 규칙의 오류
병아리는 모두 어미의 뒤를 따라다니며 가족 무리 속에서 모이를 먹는다. 병아리는 주로 두 종류의 울음소리를 낸다. 앞에서 이 미 언급했던, 크고 예리한 삐악삐악 소리와, 먹는 중에 내는 짧게 지저귀는 소리가 있다. 어미에게 도움을 청하는 비약비약 소리는 다른 병아리에게 무시된다. 그러나 지저귀는 소리는 다른 병아리에겐 매력적으로 들린다. 즉 한 마리의 영아리가 먹이를 찾으면 그 병아리의 지저귀는 소리가 다른 병아리를 먹이가 있는 곳으로 유인한다. 앞의 가상적인 예에서 사용했던 말로 하자면 이 지처럼 은 '먹이 신호'다. 그 예에서처럼 이와 같이 이타적으로 보이는 병아리의 행동은 혈연선택에 의해 쉽게 설명된다. 자연계에서 그 명 아리들은 모두 친형제자매이므로, 먹이를 보고 지저귀는 병아리가 감수해야 하는 비용이 다른 병아리들이 얻는 순이익의 12보다 적으면 먹이를 보고 지저귀게 하는 유전자는 확산될 것이다. 그 이익은 친형제자매들 간에 골고루 나눠지며 그 형제자매의 수는 보 통 둘이 넘으므로 이 조건이 성립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물론 가끔 가정이나 농장에서 양들이 자기 것이 아닌 알 칠면조 나 오리알)을 품고 있을 경우, 이 규칙은 적용될 수 없다. 그러나 암탉과 병아리가 이를 알아철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그들의 행동은 자연계에서 흔하게 존재하는 조건 아래 형성된 것이고, 자연계에서 보통 자기 등지에 낯선 알이 있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오류는 자연계에서 가끔 일어난다. 무리를 지어 사는 종에서는 고아가 된 새끼가 다른 암컷, 대개는 자기 자식을 잃 은 암컷에게 입양되는 경우가 있다. 원숭이를 관찰하는 사람들은 입양하는 암컷에게 '이모'라는 말을 종종 쓴다. 대개의 경우 그 암컷이 실제로 이모라는 증거는 없으며 어떤 친척이라는 증거도 없다. 원숭이를 관찰하는 사람들이 유전자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더라 면 이모'와 같은 중요한 말을 그렇게 함부로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감동적으로 보일지라도 입양하는 행동은 대부분의 경 우 어떤 정해진 규칙이 잘못 사용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암컷이 고아의 시중을 드는 것이 자신의 유전자에게는 아 무 도움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암컷은 자기의 친족, 특히 장래의 자기 새끼들을 살리는 데 투자할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매우 드물게 생기는 실수이므로, 자연선택이 모성 본능을 좀 더 선별적으로 만들려고 '수고'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 다. 그런데 많은 경우 이와 같은 입양은 거의 일어나지 않으며 대개 고아는 죽게 내버려진다.
너무나도 극단적이어서 여러분은 이게 전혀 오류가 아니라 이기적 유전자론을 부정하는 증거라고 생각할 만한 극단적 오류의 예가 하나 있다. 새끼를 잃은 어미 원숭이가 다른 암컷으로부터 새끼를 훔쳐서 그 새끼를 보살피는 것이 관찰되었던 것이다. 나는 이것을 '이중 오류'라고 본다. 왜냐하면 이 양모는 자기 시간을 낭비할 뿐만 아니라, 경쟁자인 암컷이 새끼를 키우는 부담에서 벗어 나 더 빨리 다음 새끼를 낳도록 해 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철저하게 연구할 가치가 있는 결정적인 예라고 생각된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것이 어느 정도의 빈도로 일어나는지, 양어미와 입양되는 새끼 사이의 평균 근연도는 어느 정도인지, 진짜 어미는 어떻 게 행동하는지(결국 새끼가 입양된다면 친어미에게는 이득이 된다), 어미가 일부러 미숙한 젊은 암컷을 속여서 자기 새끼를 입양 하도록 할 것인지(양어미와 새끼 도둑이 새끼를 기르는 양육 기술을 연습할 좋은 기회를 얻게 될 것이라는 견해가 제기된 적도 있 다) 등이다.
탁란과 예리한 식별력
고의적으로 모성 본능을 악용하는 에는 다른 새의 둥지에 산란하는 빼꾸기 같은 '탁란조 16W AB'에서 볼 수 있다. 뻐꾸기는 부모 새에게 내장된 "자기 둥지 속에 있는 새끼 모두에게 친절하라" 라는 규칙을 악용한다. 뻐꾸기를 제외하면, 이 규칙은 정상적으로는 이타주의를 가까운 친족에 한정 짓는 바람직한 효과를 갖는다. 왜냐하면 둥지 간 거리가 멀어 자기 둥지 속에 들어 있는 것은 거의 틀림없이 자기 새끼일 것이기 때문이다. 재갈매기 어미는 자기 알을 구별하지 못해 다른 갈매기의 알을 기꺼이 품으며, 대충 만든 나무 모형과 바꿔 놓아도 그 모형을 품는다. 야생의 갈매기에게 알을 알아보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알이 및 미터 떨어진 이웃집 둥지 가까이로 굴러가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매기는 자기 새끼를 알아본다. 알과 달리 새끼는 돌아다니고, 결국 은 이웃집 가까이까지 가서 1장에서 말했던 것처럼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한편 바다오리는 자기 알을 표면에 있는 반점의 패턴으로 구별하고, 알을 품고 있는 도중에는 더더욱 적극적으로 구별한다. 이 것은 아마 이들이 평탄한 바위 위에 둥지를 지으므로 알이 굴러서 섞일 위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왜 그들은 자기 알만 구 별하여 품으려고 애쓰는 것인가? 확실히 모든 어미가 남의 알을 품는다면 특정 어미 새가 자기 알을 품는지 남의 알을 품는지는 전 혀 문제가 안 될 것이다. 이것은 집단선택론자의 논거다. 이런 공동 육아 무리가 조성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해 보자. 바다오 리는 한배에 평균적으로 알을 한 개 낳는다. 이것은 공동 육아 서클이 성공하려면 모든 어미가 평균적으로 알을 한 개 품어야 한다 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누가 속임수를 써서 알 품기를 거절했다고 하자. 그 암컷은 알을 품는 데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에 알을 더 많이 낳는 데 시간을 투자할 수 있다. 이 속임수의 매력은 더 이타적인 다른 어미 새가 그 암컷을 대신해 알을 돌본다는 것이다. 그 이타적인 새들은 "둥지 옆에 누가 흘린 알이 있으면 그 알을 둥지에 가져와서 품어라"라는 규칙에 충실히 복종할 것이다. 그러면 이 시스템을 속이는 유전자가 개체군 내에 퍼져 우호적인 육아 서클은 붕괴되고 말 것이다.
다음과 같이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성실한 새가 속아 넘어가기를 거부하고 단호히 알을 단 한 개만 풀겠다고 결정하면 어떻게 될까? 사기 친 새의 뒤통수를 치는 꼴이 되겠지. 사기 친 새의 알은 누구도 품지 않고 바위 위에 나뒹굴게 될 테니
까. 이렇게 되면 그들은 곧 남들처럼 자신의 알을 품게 될 거야." 그러나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알을 품는 새들이 개개의 알을 구별하지 않는다고 가정하기 때문에, 가령 성실한 새가 이 작전을 실행하여 속임수에 대항한다고 해도 결국 내버려진 알이 자기의 알일 수도, 사기 친 새의 알일 수도 있게 된다. 사기 친 새 는 여전히 알을 더 많이 낳고, 따라서 새끼를 더 많이 남기게 되므로 이익을 얻는 셈이다. 성실한 바다오리가 사기꾼 개체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적극적으로 자기의 알을 잘 구별해 내어 보살피는 것이다. 즉 더 이상 이타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자기의 이 익만을 좇는 것이다.
메이너드 스미스의 용어를 써서 말하자면 이타적인 입양 '전략'은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이 아니다. 이 전략은 정해진 양보다 더 많은 알을 낳되 품기를 거부하는 이기적인 경쟁 전략을 능가할 수 없다는 점에서 불안정하다. 이기적 전략 역시 불안정하다. 왜 냐하면 이들이 착취하는 이타적 전략이 불안정하여 사라져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바다오리에게 진화적으로 안정한 유일한 전략 은 자기의 알을 인식하고 전적으로 자기의 알만 품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뻐꾸기가 탁란하는 명금류는 자기 알의 겉모양을 터득한 것이 아니라 자기 종 특유의 표식이 있는 알을 본능적으로 골라 보살핌 으로써 뻐꾸기의 속임수에 대항해 왔다. 자기 종의 개체들이 탁란할 염려는 없으므로 이 방법은 유효하다.* 그런데 뻐꾸기들도 자 기 알의 색, 크기, 그리고 표식을 숙주의 알과 더욱더 비슷하게 만들어 이에 보복해 왔다. 이것이 동물 세계에서 관찰되는 거짓말의 예이며, 종종 성공하기도 한다. 이러한 진화적 군비 확장 경쟁의 결과 뻐꾸기의 알은 숙주의 알을 완벽히 흉내 낼 수 있게 되었다.
뼈꾸기의 알과 새끼 중 일정 비율은 '발각될' 것이며, 발각되지 않은 알과 새끼가 살아남아 다음 세대의 뻐꾸기 알을 낳을 것이다.
이 때문에 보다 효과적으로 속이는 형질의 유전자가 뻐꾸기의 유전자 풀 속에 퍼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뻐꾸기 알의 의태가 조금이 라도 불완전한 것을 놓치지 않는 예리한 눈을 가진 숙주의 유전자는 동종의 유전자 풀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의 의심 많고 예리한 눈이 다음 세대에 전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선택이 어떻게 적극적 식별 능력을 좀 더 예리하게 만들 수 있었는지 를 보여 주는 좋은 예다. 이 경우 식별 능력은, 식별자의 책략을 무력화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다른 종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
많은 종에서 어미는 아비보다 자기 자식을 더 확신할 수 있다. 어미는 눈으로 보고 만져 볼 수 있는 알을 낳거나 새끼를 갖는다.
어미는 자기 유전자를 갖고 있는 개체를 확실히 알 수 있는 기회가 충분하지만 불쌍한 아비는 속기 쉽다. 그래서 아비는 어미만큼 육아에 열중하지 않을 것이라 기대할 수 있다. 아비가 어미만큼 육아에 열중하지 않는 다른 이유에 관해서는 암수의 전쟁에 대한 장(9장)에서 살펴볼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외할머니는 친할머니에 비해 자기 손자가 확실하므로 친할머니보다 강한 이타주의를 나타낼 것이라 기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할머니 자신의 딸의 아이는 확신할 수 있지만 며느리는 바람을 피웠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외할아버지는 친할머니만큼 손자에게 확신이 간다. 왜냐하면 두 사람 모두 한 세대는 확실하고 한 세대는 불확실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같은 식으로 외삼촌은 친삼촌에 비해 조카의 행복에 더욱 관심이 있고, 일반적으로 이모와 비슷한 정도로 이타 적일 것이다. 실제로 간통이 매우 흔한 사회에서는 외삼촌이 '아버지' 보다 이타적일 것이다. 외삼촌 쪽이 그 아이와의 근연도에 대해 더 확실한 근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외삼촌은 그 아이의 어머니가 적어도 자기의 이복누이일 것을 알고 있다. '법률상의 아버 지'는 아무것도 모른다. 이 예측을 지지할 증거가 있는지 어떤지 나는 모르지만, 누군가는 알고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에서, 또는 누 군가는 증거를 찾기 시작할지 모른다는 마음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해 보았다. 특히 사회인류학자들에게는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있을지 모르겠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이타주의가 형제간의 이타주의보다 더 흔하다는 사실로 되돌아가서, '식별의 문제'로 이것을 설명하는 것은 합당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부모-자식 관계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비대칭성을 설명하지 못한다. 부모-자식 간의 유전적 관계는 대칭적이고 근연도도 어느 쪽으로나 똑같이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자식이 부모에게 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극진히 자식을 돌 본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부모 쪽이 나이도 많고 매사에 더 능숙해서 자식을 도울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아기가 부모 에게 먹이를 주려고 해도 아기는 실제로 그렇게 하기에 적당한 구조를 갖고 있지 않다.
부모-자식 간의 관계에는 형제 관계에는 해당되지 않는 또 다른 비대칭성이 있다. 자식은 항상 부모보다 젊다. 이것은 항상은 아 니더라도 대개의 경우 자식의 기대 수명이 길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에서 강조한 대로 기대 수명은 동물이 이타적으로 행동할 것인 가 아닌가를 '결정할' 때 가급적 계산'에 넣어야만 할 중요한 변수다. 자식이 부모보다 기대 수명이 긴 종에서 자식의 이타주의 유 전자는 불리한 입장에 서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이타주의자 자신보다 더 빨리 노쇠하여 죽게 될 개체의 이익을 위해 이타적으로 자 기를 희생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부모의 이타주의 유전자는 그 계산식에 들어가는 기대 수명에 관한 한 그에 상응하는 이익 을 갖게 될 것이다.
흔히 혈연선택은 학설로서는 더할 나위 없으나 실제 예는 거의 없다고들 한다. 이러한 비판을 하는 사람은 혈연선택이 무엇인가 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식 보호나 부모의 자식 돌보기에 대한 모든 예, 그리고 젖샘이나 캥거루의 주머니 등의 신체 기관들 은 자연에서 혈연선택 원리가 실제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예다. 비판론자들은 물론 부모의 자식 돌보기가 널리 존재함을 잘 알고는 있지만, 부모의 자식 돌보기가 형제자매의 이타주의에 뒤지지 않는 혈연선택의 예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부모 의 자식 돌보기 이외의 예를 원하는 것인데 그런 예가 적은 것은 사실이다. 그럴 만한 이유는 앞에서 이미 제시했다. 형제자매의 이 타주의 에는 상당히 많다. 그러나 나는 굳이 그 예들을 나열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하면 혈연선택이 부모 자식 관계 이외의 관계에 대한 것이라는 그릇된 생각(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윌슨이 좋아하는 생각)을 강화시키는 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오류가 커진 것은 대체로 학문의 역사 때문이다. 부모의 자식 돌보기가 진화적으로 갖는 이점은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에 우리는 사실 해밀편의 설명을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이것은 다원 이래로 받아들여져 온 것이다. 해밀턴은 다른 관계를도 유전적으 로 부로 자식 간 관계와 동등하고 진화적으로 중요하다고 증명하면서, 자연스레 부모 자식 간 관계 이외의 관계를 강조하게 되었 다. 해밀면은 자매간 관계가 특히 중요한 개미나 잘벌 등 사회성 곤중의 예를 들었다(이에 대해서는 차후에 살펴볼 것이다). 해밀턴 의 이론이 사회성 곤충에만 적용되는 것인 줄 알았다고 말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부모의 자식 돌보기가 혈연선택의 예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은 사람들은 부모의 이타주의는 예측하지만 방계 친족 간의 이타주의는 예측하지 않는 자연선택의 일반론을 만들 의무가 있다. 내 생각에 그들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Family planning
가족계획
아이 낳기와 아이 키우기
부모가 자식을 돌보는 행동을 혈연선택의 산물인 다른 이타적 행동과 별도로 취급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무슨 이유로 그 렇게 생각할까? 그 이유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부모의 자식 돌보기는 번식의 중요한 요소인 것처럼 보이지만, 가령 조카를 위 한 이타적 행동 등은 그렇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나 역시 양자 간에는 실제로 중대한 차이점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사 람들은 그 차이점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그들은 번식과 부모의 자식 돌보기를 한편에, 다른 이타적 행동을 다른 편에 두고 있다.
그러나 나는 새로운 개체를 낳는 것을 한편에, 현존 개체를 돌보는 것을 다른 편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두 활동을 각각 아 이 낳기와 아이 키우기라고 부르자. 생존 기계 각각은 아이 낳기와 아이 키우기라는, 상당히 이질적인 두 종류의 결단을 내리지 않 으면 안 된다. 여기서 결단이라는 말은 무의식적으로 행해지는 전략적 조치를 뜻한다.
아이 키우기의 결단은 다음과 비슷할 것이다.
"여기에 아이가 한 명 있다. 이 아이와 나의 근연도는 이러이러하고, 내가 이 아이에게 음식을 주지 않을 때 이 아이가 죽을 확률 은 이러저러하다. 나는 이 아이에게 음식을 주어야 할 것인가?" 한편 아이 낳기의 결단은 다음과 같다.
“새로운 개체를 하나 낳기에 필요한 여러 단계를 밟을 것인가? 번식을 할 것인가?" 아이 키우기와 아이 낳기는 하나의 개체가 이용할 수 있는 시간 또는 여러 자원을 놓고 서로 어느 정도 경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그 개체는 다음과 같은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이 아이를 키울 것인가, 아니면 새로 하나를 낳을 것인가?"
종의 생태적인 특성에 따라 키우기와 낳기 두 전략의 여러 가지 혼합 전략이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ESS)이 될 수 있다. ES가 절대로 될 수 없는 한 전략은 바로 아이를 키우기만 하는 전략이다. 만일 모든 개체가 현존하는 아이 키우기에만 몰두하여 아이를 낳지 않는 상태가 되면, 이 개체군은 아이 낳기를 전문으로 하는 돌연변이 개체들에 의해 곧 점거될 것이다. 아이 키우기는 혼합 전략의 일부로서만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이 될 수 있다. 아이 낳기는 어느 정도 진행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낯익은 동물들 - 포유류와 조류 -은 아이 키우기 선수들이다. 일반적으로 아이 낳기 결단은 낳은 아이를 키우는 결단으로 이어진다. 이 두 결정이 이어지는 것이 너무도 흔한 일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둘을 혼동하곤 한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이기적인 유전자의 관점에서 보면 당신이 남동생을 돌보는 것과 어린 자식을 키우는 것 사이에는 원칙적인 차이가 전혀 없다.
어느 아이나 당신과의 근연도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양육 대상으로서 한쪽을 선택해야 할 때, 당신의 자식을 선택해야 하는 유전적 이유는 없다. 그러나 정의상, 당신이 당신의 남동생을 낳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신 이외의 누군가가 남동생을 낳은 다음에 야 당신이 남동생을 돌볼 수 있을 뿐이다. 앞 장에서 우리는 다른 개체에 대해 개개의 생존 기계가 이타적으로 행동할 것인가 아니 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것인가를 결정할 때 이상적인 결정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았다. 이 장에서는 새로운 개체를 출산할 것인가 출산하지 않을 것인가를 정할 때 생존 기계가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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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port after reading]
솔직히 내가 보기엔 이 책은 쉽지 않은 책이다. 읽으면서 이해가 되는 것 같지만 몇 페이지를 넘기면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처럼 생소한 느낌이 들었다.
책이 출판되었을 당시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종교계에서 반발이 있었지 않았을까? 너무 좋은 책을 끝까지 다 읽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유전학의 관점에서 동물의 거짓말은 불가피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논리적 관점. ‘유전자들의 이해관계가 개체들마다 달라진다면 언제나 거짓이나 속임수 등 개체들이 의사소통 체계를 이기적으로 이용할 여지가 생기고, 이것은 같은 종의 개체들 간에도 마찬가지다.’ 라고 책에서 언급하고 있다.
‘자식이 부모를 속이고 남편이 아내를 속이고 형제끼리 거짓말을 하는 것조차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모든 동물의 의사소통에는 처음부터 사기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지 모른다.’ 라고 했는데, 동물의 거짓말은 이기적 유전자로 말미암은 것임으로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말하면서 거짓말에 대하여 정당화 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이 든다.
소모전에서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진화적으로 불안정한 전략이며, 무표정한 얼굴은 진화적으로 안정하다고 말한다.
유전자는 이기적이기도 하고 이타적이기도 하다. 마치 본인들 꼴리는 데로 필요에 따라 자신의 이기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이타주의를 보였다가 그러지 않았다가 하면서 진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참 영리하다.” 라고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유명한 책이니 만큼 다음에 다시 한번 완독에 도전해보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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