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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요약

[한중록]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궁중비사_혜경궁 홍씨_스타북스_Summary요약

by 림을위하여 2023.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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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중록

 

        부제: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궁중비사

        저자: 혜경궁 홍씨 (신동운 옮김)

        출판: 스타북스

 

그림#1 책표지

 

 

오늘 소개시켜드릴 책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궁중비사이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는 한중록이라는 역사 책입니다.

 

지은이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

조선 21대왕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의 빈이자 조선 22대왕 정조의 생모.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홍봉한의 차녀로 1735년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한산 이씨이다. 열 살의 나이에 사도세자의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입궁했으며, 의소세손과 정조, 청연공주와 청선공주를 낳았다. 맏아들 의소세손이 세 살 만에 죽고, 남편 사도세자는 당쟁의 대립 속에 영조의 노여움을 사 뒤주에 갇혀 죽는 비운을 겪었다. 마흔두 살 때 둘째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올랐는데, 아버지 홍봉한을 비롯한 외가가 정조의 즉위를 방해한 세력으로 간주되어 배척당하게 된다. 1800년 손자 순조가 즉위했지만 나이가 어려 영조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고, 사도세자에게 동정적이었던 인물들이 대대적으로 숙청되면서 헤경궁 홍씨의 동생 홍낙임도 처형되었다. 1795년 회갑을 맞아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을 회고하며 <한중록>을 지었는데. 이 작품은 <인현왕후전), 〈계축일기>와 더불어 궁중문 학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1816년 사망했으며 고종때에 헌경왕후로 추존되었다.

 

옮긴이

신동운

서울대학교 '학풍'이라는 동아리에서 <TIME>지 해설 강의를 맡아 전 서울대학교 내에 시사 영어 열풍을 일으켰던 신화적인 인물이다. 최근엔 동양의 고전과 서양의 대표적 사 상가들을 결합하여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쉽게 전달하고자 하며, 동양 고전이 새롭게 읽힐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영어 관련 저서 및 역서로 「햄릿」 「하멜표류기」 「신동운 영어강의록, 「영어의연구, "영어뇌 만들기, 「삼위일체 영어 캠프, 40대가 다시 읽는 청춘 영시」 등이 있다. 인문서 로는 「손자병법 삼십육계」 「365일 촌철살인의 지혜 - 고사성어, 365일 보편타당한 지혜 - 사서오경, 『링컨의 기도」 『상상력의 마법 : 다빈치처럼 두뇌 사용하기」 등을 짓고 편역했다.

 

 

1.    세자빈되어 궁궐에 들어가다.

할아버지 정헌공께서는 영안위 [선조의 사위, 곧 정명공주의 남편, 작가의 5대조의 증손이시며 정간공 [영안위의 큰아들이며 작가의 고조부인 홍만용의 손자이시고 첨정공 [홍만용의 큰아들이며 작가의 증조부인 홍중기]이 사랑하시는 둘째 아드님이시다.  정헌공께서는 안국동에 새 집을 짓고 분가하셨는데, 집과 정원의 규모는 비록 재상집 같으나 재산을 나눠 받지 못해 살림이 가난하여 고생이 매우 심하셨다.

큰할아버지 참판공께서는 아버지를 매우 사랑하셔서, 늘 아버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고 웃으며 말씀하셨다.

"이 아이가 장차 윤오음 [선조 때의 명재상인 윤두수(1533-1601), 영의정까지 올랐으며 문장이 났다]의 팔자 같을 것이니. 지금은 가난하나 장래에는 부유할 것이다. 사람이 자고로 나중에 복을 많이 받으려면 처음에 반드시 고생하는 법이다." 그리하여 재산을 많이 나눠주지 않으셨다. 이것이 모두 큰할아버지께서 당신 동생을 매우 사랑하시는 뜻이었기 때문에 집안사람 모두 그 뜻과 마음에 감탄하였다. 하지만 우리 집 살림은 자연 궁핍할 때가 많았다. 정헌공께서는 벼슬이 상서 [예조의 높은 벼슬자리]에 이르렀으나 마음이 청렴하시어 생계를 꾸리지 않았으므로 집이 항상 모자라고 한낱 가난한 선비 같이 지내셨다.

계조비 [정헌공의 후처, 즉 할머니]께서는 학문이 높은 선비의 따님으로 본래 배움이 남과 다르셨다. 마음이 어질며 정숙하고 인자하셔서 정헌공 모시기를 어려운 손님처럼 대하셨고, 집과 집안 살림을 다스리는 일에도 정헌공의 청렴과 고결함을 그대로 따라서 검소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어머니는 비록 재상가의 맏며느리였으나 일년 내내 비단옷 한 벌 걸친 적이 없었고, 패물상자에는 단 몇 개의 패물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나갈 때 걸치고 다닐 외출복도 한 벌뿐이어서 때가 묻으면 밤을 틈타 손수 더러워진 옷을 빠셨다. 또한 길쌈과 바느질을 밤낮으로 하셨으므로 늘 아랫방에는 날이 밝을 때까지 불이 켜져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그렇게 밤새워 일하는 것을 보고 늙거나 젊은 종들이 괴로워할까 염려하셔 친히 보자기로 창을 가리고 남이 부지런하다고 칭찬하는 것을 피하려 애쓰셨으며, 추운 밤에 수고를 하셔서 손이 다 닳아져도 괴로워하는 일이 없으셨다.

의복의 예절과 자녀의 옷은 지극히 검소하였지만 제철 제때에 맞게 하시고, 우리 남매의 옷도 비록 굵은 무명이었지만 항상 깨끗하였으니 수수함과 정결함을 갖추신 줄은 이런 데서도 알 수 있겠다. 어머니께서는 평소에 기쁨과 노여움의 감정을 가볍게 드러내지 않으시고 타고난 마음씨가 온화하면서도 엄숙하셨으니, 집안에서 그 덕을 칭찬하고 어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2.    영조와 사도세자의 불화가 극에 달하다

영조께서는 똑똑하고 인자하시며 자상하고 민첩하신 성품이시고, 경모궁은 말이 없고 행동이 날래지 못하여 민첩하지 못하셨다.

경모궁의 도량과 재능은 훌륭하시나 모든 일에 영조의 성품과는 달랐다. 보통 때 물으시는 말씀이라도 즉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대답하시고, 당신의 소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대답하면 어떨까 하시어 즉시 대답하지 못하셨다. 그래서 늘 영조께서 갑갑해하셨으니, 이 일도 화변의 큰 실마리가 되었다.

경모궁께서는 비록 존귀한 터에 태어나셨으나, 당신의 부모를 모시고 가르침을 받아 부모가 거북하지 않고 허물이 없어 야 할 때 그렇지 못했다. 포대기에 싸여 있을 아주 어린 시절부터 부모를 떠나 내인들이 아기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심지어 옷고름, 대님 매는 것까지 다 해 드리니 매사를 남에게 맡기고 너무 편한 생활을 하셨다.

물론 강연에서 강연관을 만나실 때는 엄숙하셔서 글 읽는 소리도 크고 맑으시며 글 뜻도 틀리지 않으시니. 뵙는 사람마다 훌륭함을 일컬어 궁궐 밖에까지 좋은 소문과 명예가 퍼지셨다. 하지만 갑갑하고 애달프게도 영조를 모시고는 두렵고 어려워 대답을 재빠르게 못하셨다. 영조대왕께서 한 번 갑갑해 하시고 두 번 갑갑해 하셔서. 이로 인해 몹시 화를 내시고 근심도 하셨다.

영조께서는 이럴수록 가까이 두시고 친히 가르쳐서 서로간의 인정과 도리가 친하게 될 방법은 생각지 않으신 채. 항상 멀리 두시고 동궁 스스로 잘하여 당신의 뜻에 맞으시길 기대하시니, 이럴 때 어찌 탈이 나지않으리오.

그렇게 점점 서먹서먹하게 지내시다가 서로 보실 때는 영조께서는 꾸중이 사랑보다 앞서시고, 아드님은 한 번 뵙는 것도 조심하시고 매우 두려워하심이 무슨 큰일이나 치르시는 듯싶었다. 이렇듯 어느 새 부자지간이 더 멀어지게 되었으니. 어찌 서럽지 않으리오.

 

 

경모궁이 돌아가신 후

 

그러자 영조께서 손을 잡고 우셨다.

"네가 이럴 줄을 생각지 못하여 내가 너를 볼 마음이 어렵더니, 내 마음을 편케 해 주니 아름답다." 이 말씀을 듣고 내 심장이 더욱 막히고 모진 목숨이 더욱 원망스러웠다.

"세손을 경희궁으로 데려가셔서 가르치시길 바랍니다." “세손이 떠나면 네가 견딜 수 있겠느냐?" 내가 눈물을 흘리며 다시 아뢰었다.

"세손이 떠나서 섭섭하기는 작은 일이요. 위를 모시고 배우기는 큰일입니다." 그리하여 세손을 올려 보내기로 정하니, 모자의 정으로 서로 떠나는 모습을 어찌 견딜 수 있으리오.

세손이 차마 나를 떠나지 못하여 울고 가시니, 내 마음이 칼로 베는 듯하나 참고 지냈다. 그런데 임금의 은혜가 하늘같아서 세손을 사랑하심이 지극하시고, 선희궁께서 아드님에 대한 정을 옮기셔서 모든 행동과 음식에 오로지 한마음으로 신경을 쓰시며 지성으로 보호하셨다. 선희궁의 정으로 어찌 그렇게 하지 않으시겠는가.

 

"내려오면 윗분이 그립고 올라가면 어미가 그립다 하오니, 떠나시고 난 후에는 또 위가 그리워서 이리할 것이니 데려가소서

 

그러자 즉시 얼굴빛이 좋아지셨다.

"그렇게 하겠다." 그리고 세손을 데리고 환궁하셨다.

세손이 대조를 모시고 가며 어미가 인정 없이 떠나 보낸 일을 섭섭히 여기어 무수히 울고 가시니 내 마음이 어떠하리오 그러나 그리운 것은 사사로운 정이요. 대조를 모시고 가서 받들어 그 아버지가 못다 하신 아들의 도리를 잇는 것이 옳고, 정사며 나라 일을 배워 아는 것이 옳기에 떠날 때는 못 잊는 정을 베어 보냈다.

이것이 다 이전의 일을 징계하고 세손으로 하여금 한 마음으로 위에 효성을 다하여, 사랑하시는 임금의 뜻에 조금이라도 어김이 있을까 염려함이니 이 어찌 세손을 위한 정뿐이리오.

나라의 편안함과 위태로움이 세손 한 몸에 있으니, 내가 세손을 못 잊어 하는 마음이야 하늘이 다 알 것이다. 이는 내 마 음뿐만 아니라 모두가 아버지께서 나를 인도하여 부녀자의 사소한 사정을 돌아보지 않고 큰 뜻으로 훈계하신 힘이었다.

우리 아버지의 지극한 충성이 마디마디 세손을 위하고 나라를 위하시던 일을 누가 자세히 알겠는가.

세손이 혼궁을 떠났다가 내려오시면 애통하던 곡소리에 누구인들 아니 감동하겠는가. 혼궁의 위패가 의지할 곳 없으신 듯 계시다가, 그 아들이 와서 슬피 울면 경모궁의 영혼이 반기시는 듯하고 외로운 혼궁에 빛이 있는 듯하였다.

 

 

 남편을 하늘로 보내고 아들인 세손(정조)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은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인데 영조가 세손을 데려가고자 하는 마음을 알고 세손을 영조에게 보내는 것은 어쩌면 신의 한수가 아닐까 싶다. 여기서 혜경궁 홍씨의 위대함이 느껴진다.

 

 

임오화변은 세상에 없는 일이니 경모궁께서는 천만 불행하여 그 지경이 되셨으니, 아들을 두시어 당신의 자리를 잇게하시어 대조와 세손 사이에 사랑과 효도가 넘치니, 다시 무슨 일이 있을 줄 꿈에나 생각했으리오.

갑신년 94A(764) 2월의 처분[사도세자의 3년 상이 끝나고 세손을 사도세자의 형인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은 일]은 천만 뜻밖이니, 위에서 하신 일을 아랫사람이 감히 이렇다 저렇다 하리오마는, 내 그때의 망극함은 견주어 비교할 만한 곳이 없었다.

내가 임오화변 때 모진 목숨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 있다가 이 일을 당한 것은 천만번 나의 죄와 한이다. 즉시 죽고 싶되 목숨을 뜻대로 못하여 돌려서 처분을 하시는 듯하여 스스로 참았다. 그러나 그 망극하고도 슬프며 원통하기는 임오년(영조38, 임오화변)보다 못하지 않고, 선희궁께서 식음을 전폐하고 애통해 하시던 일이야 어찌 그렇게 기록하리오.

세손이 어린 나이에 세상에 없는 큰 아픔을 당하고, 또 왕가의 당치않은 변고를 당하셔서 지나치게 애통해 하셨다. 상복을 벗으실 때 곡읍하는 소리가 천지에 사무처 초상에 천지가 깜깜하게 꽉 막히던 때의 설움보다 더하셨다.

10세 때 아비를 잃는 변을 당하시고 두 해가 지나 13살이 되셔도 당신이 만나신 바가 갈수록 원통하게만 생각되니. 이를 대하여 내 간장이 쇠가 녹을 듯, 돌이 터질 듯하였다. 즉시 죽고 싶었으나 세손의 서러워하시는 모습이 차마 못 견딜 일이었다.

 

 

임오화변 그리고 2년뒤 처분을 경험하는 홍씨의 심정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사람을 죽이는 일은 나라의 큰일이오

 

관직을 주는 것을 한 것은 '낙임의 힘'이라고 진술하였다고 전 영의정 심환지가 선왕께 아뢰었다. 이 한 마디 말로 허다한 말이 났으나 전혀 거짓이라는 명백한 증거가 있다.

오시수가 죄 입을 때 내 고조할아버지께서 대사헌으로 계셨는데, 대궐 문에 엎드려 상소하여 결국 처분이 내 고조할아버지로 하여 된 셈이기에, 오가들이 우리 집을 대대로 원수 집안으로 알더라 한다. 그러니 제 원수 집안에 드나들고자 한들 올 일이 어찌 있으며 선왕께서 낙임의 말을 듣고 오시수의 복관작을 해 주었으면 낙임의 권세가 뛰어난 셈인데, 제 삼촌은 어찌 복관작 하나를 못해 내었으리오. 견줄 데 없이 다 터무니없는 말이니 다시 의논할 것이 못된다.

사람을 죽이는 일은 나라의 큰일이오, 하물며 낙임은 내 동생이자 선왕의 외삼촌이니, 설사 그럴듯한 구체적인 죄의 내용이 있다손 치더라도 가볍게는 해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함에도 소위 꾸며낸 죄명이 한 가지도 말이 안 되는데, 죽이려고만 하여 마침내 천 리 밖에서 참화를 받게 하니 세상천지에 이처럼 더없이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다시 어디 있으리오.

내 칠십의 늘그막에 선왕을 잃고 밤낮으로 통곡하여 빨리 죽기만 원했다. 그런 중에 동생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한 가지 죄도 없이 참화를 입었으나 내 분수에 살아 앉아서 구하지도 못하니. 나같이 독버섯 같은 사람이 다시 어디 있으리오.

당신이 나이 어리셔서 비록 구하지는 못하시지만, 그 사람에게는 죄가 없는 것을 아시고 선왕이 평상시에 잘 대접하시던 일을 생각하시며, 내 처지를 서러워하시어 그러신 것이니 어찌 슬퍼하지 않으리오.

내 비록 망극하고 애통하지만 주상의 어질고 효성 어린 마음에 장래를 바랄 것이로다.

만일 내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목숨을 끊으면 나쁜 무리들이 내가 죽길 바라던 뜻을 이루었다고 좋아할까 해서 참고 살았다. 그러나 원통하게 죽은 동생은 다시 살 길이 없고 내 호흡이 날로 쇠약하여 며칠을 더 살지 알 수 없으니. 지하에서 죽은 동생을 볼 낯이 없고 오랫동안 한이 맺힐 것이로다.

하늘아! 하늘아! 이는 나를 이 세상에 머물게 하여 두었다가 훗날 동생이 억울한 누명을 벗는 모습을 보고 죽게 해달라 고 밤낮으로 피눈물 흘리며 이렇게 기도하며 빌 뿐이다.

 

 

나는 인생은 험난한 운명과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내며 유례없는 고통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말로 다할 수 없는 덧없고 기구한 사건을 곁에서 지켜보며 그야말로 살고 싶지 않는 날들을 아들 때문이라는 이유를 만들며 하루하루를 살았다. 또 한 선왕의 지성스러운 효도로 차마 목숨을 끊지 못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더니, 하늘이 갈수록 나를 밉게 여기셔서 차마 당 하지 못할 참혹한 화를 당하는가 싶다.

죽어서 사도세자를 따르는 것이 당연하나 모진 목숨이 토목과 같아서 자결을 못하고, 또 어린 임금을 그리워하고 보호하기 위해 이 한 많은 목숨을 지하다 아들인 임금까지 먼저 보내니 이 어찌 사람이 차마 견딜 바이리오.

평범한 집의 보잘 것 없는 아낙네도 칠십 노인이 외아들을 잃으면 동네사람이 서로 조문하고 위로하며 불쌍히 여길 것이다. 그런데 선왕을 여윈 뒤 얼마 안 되어 내 아버지를 무참히 욕보이고 내가 자결하려는 일을 둘째 동생 낙임의 충동이 라 하여 동생을 죄로 잡아 7, 8년에 걸쳐 앞뒤가 맞지도 않는 거짓말로 엮어 외딴섬으로 귀양 보내었다.

그리고 연이어 참화를 받게 하고 내가 자결하려는 일로 낙임에게 죄를 덮어씌운 꼴이니 이는 낙임을 죽인 것이 아니라 실은 나를 죽인 것이리라.

 

임오화변을 만나자 원통해 하고 슬퍼하심이 어른 같으시고 슬퍼하는 모습과 우는 소리가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켰으나, 보고 듣는 자라면 누가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리오. 외롭게 되신 후에는 지극한 아픔을 품고 어미 섬김이 극진하시어 한 때 도 마음을 놓지 못하셨다.

나를 떠나면 잠을 이루지 못하여 각각 대궐에 있을 때는 일찍이 내 소식을 들으신 후에야 비로소 아침상을 받으셨다. 그리고 내 몸이 조금만 불편하여도 꼭 손수 약을 지어 보내셨으니 그 효성은 하늘이 내신 것임을 이런 데서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서럽고도 서럽도다!

차마 갑신년[영조 40(1764), 세손(정조)을 효장세자의 양자로 봉한 일]의 일을 어찌 다 일컬을 수 있으며 그때 몹시 애달프고 망극하여 모자가 서로 붙들고 죽을 바를 모르던 모습이야 어찌 다 기록할 수 있겠는가? 선왕께서 겪으신 지극한 아픔이 예로부터 제 왕가에 없는 일이니, 비록 나라를 위하여 임금의 자리에 임하시나 한평생 아픔을 품으시고 추모하심이 해가 갈수록 더욱 깊어지셨다.

 

아버지의 일은 갑진년 (정조 8 194)에 세 가지 모두가 누명을 씻었다. 보통 집으로 이르면 없는 사실을 꾸였다고 하련만, 무슨 일인지 터무니없이 세상의 모욕을 받았으니 이 웬 일인가. 이것이 또한 다른 죄가 아니라 갑진년에 이미 씻어진 누명에 관한 것이니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겠는가.

무릇 모년의 일을 가지고 두 가지의 의견이 있다.

한 의견은 모년에 대처분하신 것이 옳고, 영조의 거룩하신 업적을 칭송하며 하늘의 도리에 어그러지지 않은 일이라 하는 것이다. 또 한 의견은 경모궁께서 병환이 계시지도 않은데 원통히도 그렇게 되셨다 하는 것이다.

첫 번째 의견 같으면 경모궁께 진실로 죄가 있어서 영조의 처분이 무슨 적국이나 평정하신 듯한 공적으로 칭송하는 말이 된다. 그리하면 경모궁께서 어떤 몸이 되시며 선왕께서는 또한 어떤 처지가 되시겠는가.

이는 경모궁과 선왕께 더할 수 없이 괴로운 말씀이다. 그렇다고 두 번째 의견대로 영조께서 거짓 고발을 들으시고 경모궁을 그 지경에까지 가게 하셨다면, 경모궁을 위하여 마음에 맺힌 원한을 풀고 수치스런 일을 씻어 버리겠노라고 한 일이 영조께는 또 어떤 허물이 되시겠는가. 이리 말하나 저리 말하나 삼조께 망극하기는 매 한 가지다.

 

경모궁께서는 분명한 병환이 있었으니 임금과 나라가 위태위태하고 두려움이 바로 눈앞에 있는지라 영조께서 애통. 망극하시나 만부득이하게 그 처분을 하셨다.

경모궁께서도 본심이시면 참 허물이 되실 것이나 원래의 성품을 잃으신 병환이시라 당신께서 하시는 일조차 모르셨기에 오로지 병환 드신 것이 망극하지, 경모궁께야 어찌 한 치라도 허물이 되시겠는가.

실상이 이러하니 이렇게 사실대로 말을 하여야 영조의 처분도 마지못한 일이 되시며, 경모궁께서 당하신 바도 할 수 없는 터이시다.

선왕 또한 애통과 의리가 각각이라고 말하여야 실상도 어기지 아니하며 의리에도 합당하다. 그러므로 영조의 처분이 홀륭하시다고 칭송하고 경모궁을 죄 있는 곳으로 돌아가시게 한 것과 또 경모궁을 위한다고 영조의 사랑이 없음을 잘못이라 한 것 두 가지 모두 삼조 [영조, 사도세자, 정조 등 세분을 말함]께는 죄인이다.

 

 

[에필로그]

 

<한중록)을 쓴 혜경궁 홍씨는 조선의 21대 국왕인 영조의 며느리이자 사도세자의 세자빈이다. 또한 22대 왕인 정조의 생모이기도 하다.

혜경궁 홍씨가 1795(정조 19) 조카 홍수영이 청하여 쓰기 시작했다. 이후 네 번에 걸쳐 완성한 글이다. 첫 번째 것은 비교적 한가로운 심정에서 집필한 것이나, 나머지는 모두 아들 정조가 승하한 직후부터 집필한 것으로, 어린 왕 순조에게 보이기 위하여 정치적 목적으로 집필하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따라서 중복된 부분도 많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조선 22대 왕으로 즉위하자 외가인 풍산 홍씨의 집안이 몰락하게 되는데 정조는 아버지의 죽음이 외가이자 당시 정치적으로 노론이었던 풍산 홍씨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여겼다. 정조 즉위와 함께 노론의 위세가 급격하게 위축되면서, 혜경궁 홍씨의 숙부인 홍인한이 처형되고 아버지 홍봉한까지 처벌을 받게 되었다. 이에 혜경궁 홍씨는 몰락한 친정 집안을 일으켜 줄 것을 탄원하였고, 정조가 이를 약속했다고 언급하며 임오화변은 자신의 친정집과 무관 하게 일어난 사건이라고 주장하였다. 혜경궁 홍씨가 자신의 친정 집안을 신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집필한 것이 <한중록>이다.

<한중록) <한중만록>이라고도 불리며, 6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두고 혜경궁 홍씨가 직접 목격했던 당시 상황, 죽음의 원인과 결과를 밝히고 있지만, 당대의 기록인 조선왕조실록과 다르게 서술된 내용이 있어 한중록의 내용을 모두 사실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현재까지도 역사적 사료 또는 가치관에 따라 다양한 의견이 있으며, 학자에 따라서도 대립된 견해가 존재한다.

 

<한중록)은 전체 4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1편은 1796년 정조 재위 19년에 쓴 것으로, 서두에 조카 홍수영의 부탁으로 작성한 글이라고 밝히고 있다. 홍씨 자신의 출생과 조부모 등 친정집안 사람들의 청렴함과 덕행, 효심 등에 대한 찬사를 나열하였고, 자신이 9세 때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입궁한 뒤에 겪은 궁중생활과 아들인 정조를 출산했던 일 등을 기록했다.

또한 부친 홍봉한의 실각 및 좌의정을 지낸 작은 아버지가 사사되고 친정 집안이 화를 입고 몰락하는 전말을 서술하였으며, 친정 집안사람들에게 알리는 당부의 글로 마무리한다.

2편은 1801(순조)에 쓰여진 글로, 당시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자신의 친정 집안이 홍국영의 모함으로 당한 화의 억울함과 부당함을 소상하게 밝히고 사면을 호소하는 목적에서 작성한 글이다. 특히 좌의정이었던 작은 아버지(홍인한)가 세손 (정조)의 대리청정을 막았다는 것은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혜경궁 홍씨 자신에 대한 모함과 동생 홍낙임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심정을 담고 있다.

3편은 1802(순조2)에 쓰여진 글이다. 임오화변으로 겪은 비통함과 더불어 부친 홍봉한 이와 관련이 없음을 주장하고, 아들 정조의 효행과 외할아버지의 충절에 대한 의리를 잊지 않고 친정 집안의 신원을 약속했다는 점을 언급한다. 또한 사도세자의 병환이 위중했던 것은 사실이며 당시에 일어난 비극은 부득이한 일이었다고 기록한다.

4편은 순조 재위 5년인 1805년에 쓰여진 글이며,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임오화변의 전말에 대해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남편인 사도세자의 병환이 망극하고 종사의 존망이 다급하여 어쩔 수 없는 비극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서술한다. 그리고 자신이 죽지 못하고 산 것은 애통하지만 도리와 의리 때문이라고 심정을 밝힌다.

 

<한증록>은 혜경궁 홍씨가 지난날 몸소 겪었던 일들을 서술한 것으로 남편 사도세자가 부왕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은 참변을 주로 하여, 공적, 사적 연루와 국가 종사에 관한 당쟁의 복잡 미묘한 문제 등 여러 사건들 속에서 살아온 일생사를 순 한글의 유려한 문장으로 묘사한 파란만장한 일대기이다. 문체에 등장인물의 성격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으며. 이 글을 통하여 조선 여성의 이면사를 엿볼 수 있다는 점과 당시의 정치풍토를 관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한중록>은 역사적 인물의 글이라는 점에서도 소중하지만, 더욱이 그가 비빈이라는 사실에서, 정계야화로서 역사의 보조 자료가 된다. 임오화변의 이유 및 홍봉한 일가에 대한 사관을 재검토하는데 도움을 주는 실기문학이다. 또한 이 작품은 여류문학, 특히 궁중문학이라는 점에서 궁중용이, 궁중풍속 등의 보고라 할 수 있다.

<한중록>은 소설로 볼 수 있을 만큼 문장이 사실적이고 박진감이 있다. 그리고 치렁치렁한 문체는 옛 귀인들의 전아한 품위를 풍기고 경어체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작자를 비롯하여 등장인물 가운데에서 전통사회의 규범적 여인상의 전형을 볼 수 있다는 점 등으로, 이 작품은 우리의 고전문학이자 궁중문학의 백미라 일컬어진다.

 

  

 [Book report after reading]

 예로부터 우리 조상님들은 예의 바르고 겸손하며 지혜로우셨던 거 같고, 홍씨의 아버님은 청렴 결백하시고 Giver로서의 삶을 사신 것처럼 보인다. 책의 내용이 얼마나 사실에 입각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느꼈습니다.

홍씨는 어렸을 때부터 성숙했고 주변 사람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얼굴이 예쁘고 총명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어른스러움과 행실을 생각만해도 너무 예쁠 것 같습니다.

 

 “저런 옷이 있다면 안 입지는 않겠지만 새로 장만해서 입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머니가 고운 치마를 입은 아이를 보면서 저런 옷이 갖고 싶은 지 물어보자 하는 말인데 정말 이렇게 말을 했을까 싶을 만큼 성숙한 말이다.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옛날분들의 특징인지 모르겠지만 문장의 많은 부분에서 과장되게 부풀린 말들이 있어 믿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홍씨의 삶은 정말 파란만장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낯선 곳으로 시집온 어린 여자아이(홍씨)에게 남편(사도세자)이란 사람은 제 정신이 아니었으니 얼마나 힘이 들었을지 상상하기 어려울 것 같다. (책을 보면 경모궁은 10세부터 병환(경계증)의 기운이 있었다고 하며 18세는 병세가 더욱 심해졌다고 함)

홍씨의 입장에서는 궁궐에서의 삶은 어쩌면 하루 하루가 작두를 타는 심정이 아니었을까? 얼마나 불안하고 조마조마한 삶을 살았을까?

 가끔 회사 생활이 지치고 스트레스를 받을 때가 있다. 아무런 문제도 없는데 뭔가 모를 압박이 밀려오면 심장이 두근거릴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혜경궁 홍씨를 생각해보면 위로가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은 힘든 게 아니구나. 정말 우리가 감당하는 스트레스는 감히 비교할 수조차 없는 수준 같다.

 제 정신이 아닌 남편을 모시고 살았고 그 남편의 잘못으로 본인마저 위태로운 상황을 맞았지만 천성이 착하고 지혜가 있었기 때문에 슬기롭게 잘 극복하지 않았나 생각된다정조는 그런 어머니 가족의 혈통을 이어 받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며느리 잘 들여야 집안이 흥한다는 말은 이런 것을 보고 하는 말 같습니다.

 홍씨는 국모 로서의 충분한 자격이 있고 훌륭한 삶을 사셨다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현 시점에서 우리의 국모 김씨는 홍씨에 견주어 보았을 때 감히 비교하는 것조차 부끄러운 일 같습니다.

 영화로 보았던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책으로 읽어보니 감회가 남 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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